고백하자면 농구를 좋아했던 적은 없다. 아니, 다섯 명이서 하는 스포츠라는 것조차 몰랐다. 당연히 농구 영화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를 이끈 것은 천계영 작가의 SNS 글이다.
‘혹시 슬램덩크 책부터 보려고 일부러 극장 안 가고 계신 분들 계신가요? 안됩니다. 바로 보러 가세요. 책은 언제든 구할 수 있지만 극장에 걸린 영화는 언젠가 내려갑니다. 일단 영화를 보세요. 나중에 책 보고 그때 또 소름돋으시면 됩니다.’
(출처: 천계영 트위터 @KyeYOungChon)
천계영 작가의 말을 듣고 인지하니, 인터넷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관한 화두로 이미 뜨거웠다. 특히나 내 마음을 이끌었던 것은 ‘완벽주의자가 만든 완벽한 영화’라는 입소문이었다. 그리고 천계영 작가의 글 중에서도 ‘극장에 걸린 영화는 언젠가 내려갑니다. 일단 영화를 보세요.’라는 대목. 그렇다. 대 OTT의 시대에 극장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영화와 드라마는 언제 어디서든 소파에서, 침대에서 편히 볼 수 있는 컨텐츠가 되었다. 하지만 사실 ‘영화를 위해 갖추어진 시설’에서 ‘원하는 영화를’ 보는 경험은 그야말로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과 한 장소에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까지.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극장 경험이 한정판이라는 사실을 많이 잊고 있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극장으로, 아주 간만에, 쾌를 찾아서. 극장은 가장 가까운 환상 세계다. 일상 속에서 쾌(快)를 찾으러 떠날 때 극장만큼 적합한 장소도 없을 것이다. 뇌는 매체를 통해 느끼는 감정과 실제로 겪은 감정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렇다면 극장은 그야말로 감정의 지고를 겪을 수 있는 곳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극장 산업은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변이 일어났다. 30년도 넘은 작품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대중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2022년에는 <탑건:매버릭>이, 2023년에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하 <슬램덩크>)가 그러하다.
코로나 이후의 문화계는 마치 과거로 회귀한 것 같다. <슬램덩크>는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포켓몬빵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아이돌들은 레트로 컨셉을 내세우며, ‘y2k’ 컨셉이 패션계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복고, 키덜트 등 과거로부터 꾸준히 인기 있었던 키워드들이 두드러짐은 물론이고 밀레니얼과 할매를 합성한 ‘할매니얼’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의 흥행도 이러한 기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이토록 오래된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끌까? 답은 간단하다. 현존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우리에게 특별한 쾌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노스탤지어와 복고의 핵심이다.
‘노스탤지어’는 고대 그리스어 nostos(귀환)와 algos(고통)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다. 귀환, 집으로 돌아감은 인간에게 기쁜 일일진대 어째서 고통이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각자의 과거, 안온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움의 정서는 대중에게 무척 효과적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들이 연달아 리부트되는 것도 그러한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허나 모든 리부트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실제로 개봉 전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은 기대만큼이나 우려가 앞서는 작품들이었다.
톰 크루즈의 오랜 팬으로서, <탑건>의 리부트가 제작된다는 소식은 일종의 ‘감 떨어진 무리수’로 예상되었다. 30년도 전의 마초적인 미군 프로파간다 리부트라니! 그의 필모그래피에 큰 오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었다. <슬램덩크>도 마찬가지인데, 애니메이션이라고는 만들어 본 적 없는 만화판의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총감독과 각본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예술가는 우려를 뛰어넘는 장인 정신을 보여주었다. 흥미롭게도 톰 크루즈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둘 다 디지털 서비스보다 아날로그를 추구하기로 유명하다. <탑건: 매버릭>의 경우 OTT로 개봉하지 않기 위해 톰 크루즈가 자신의 출연료를 깎았다는 일화가 이미 유명하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경우 <슬램덩크>의 그림이 e북으로 담길 수 없다며 2023년까지도 e북을 발매하지 않고 있다. <슬램덩크> 영화판을 제작하게 된 것도 제작사에서 가져오는 파일럿 영상들을 보다 못해 자신이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15년부터 무려 8년간의 제작 기간 끝에 영화가 완성되었다.
지금은 스낵 컬처의 시대다. 작품들의 수명은 그 어느 때보다 짧아졌고, 일주일 단위도 모자라 하루에 한 편씩 나오는 웹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을 보고 공통적으로 든 감상은 ‘재능 있는 자의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다’라는 것. 진심이 언제나 통한다는 상투적 어구가 진실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단지 진심과 재능이 합쳐졌을 때의 시너지가 이 두 작품이라는 의미다. 그 진심은 끝내 ‘살아 있는’ 영화를 탄생시켰다. 실제로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턱선, 머리숱, 속눈썹 개수까지 감수하며 하나의 생명체를 그야말로 ‘빚어냈다’. 이렇듯 섬세한 작업 때문에 자연스레 제작 기간이 길어졌다. 효율과 속도가 미덕인 사회에서 상상키 어려운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탑건: 매버릭> 역시 마찬가지다. <탑건: 매버릭>은 그야말로 ‘극장 영화(cinema)’와 아날로그에 대한 헌사다. 톰 크루즈는 CG로 대체할 수 있는 장면도 직접 촬영하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단지 그가 아날로그에 집착해서가 아니다. 아날로그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생동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탑건>으로부터 30년 후, 속편의 서두에서 매버릭은 마치 뒷방 늙은이처럼 나온다. 무인기의 발전으로 전투기 조종사들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고, 50대의 매버릭은 단지 다음 세대 파일럿을 가르치는 역할로 임명될 뿐이다. 그는 아직 전투기를 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매버릭이라는 캐릭터로 표상되는 ‘영화’와 ‘톰 크루즈라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비유다. OTT, 숏폼, 미드폼 드라마, 유튜브가 성행하며 2시간 분량의 영화가 설 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더는 전투기에 올라타기 어려운 매버릭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긴 스토리를 감내할 만큼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는다. 극장을 찾는 관객은 줄고, CG는 발전해서 더는 이전처럼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을 할 필요도 없어진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 크루즈는 증명한다. 아날로그가, 영화가,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금만큼 노력의 가치가 폭락한 시절이 있을까.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은 ‘노력이 보상받는 세계’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보상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예고 없는 재난 사태 앞에서 지금까지의 세상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현세대에도 두 작품이 흥행한 주 사유다.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은 단지 리부트여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그 시대를 직접적으로 즐기지 못 했던 젊은 계층에게도 어필했으니까. 특히나 <슬램덩크>는 2030 세대에 반향을 일으키며 굿즈 대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 쾌의 원인은,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어찌 보면 뻔할 정도로 ‘건강한’ 스탠스가 작금의 대중 컨텐츠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보자면, 이 작품은 점프 소년만화의 왕도 키워드인 ‘우정, 노력, 승리’를 갖추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현재 대한민국의 2030 세대, 요즘 기사에서 좋아하는 말로 MZ세대 중에서 ‘우정, 노력, 승리’의 힘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지겹도록 뻔하고 새로울 것 없는 단어지만 바로 저 낡은 단어들이 사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이미 판타지다.
현대는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 세계다.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해서는 성공할 수 없으니까.그래서 회귀, 빙의, 환생이 유행한다. ‘인생 2회차’를 살아가지 않고서는 계급 사다리를 오를 수 없다. 그러므로 개천용보다는 금수저를 동경하고 추앙한다. 협동보다는 복수 서사가 짜릿하고, 고구마 같은 현실에는 사이다가 필요하다. 언젠가부터 정당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과정은 지루하게 여겨지고, 노력은 미덕 아닌 미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물론 이런 스탠스의 서사도 대중들에게 쾌감과 해방감을 선사한다. 나 역시 이런 서사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어쩐지 뒷맛이 찝찝하지는 않은가. 탄산음료를 먹을 때 짜릿하고 행복하지만 텁텁한 단맛이 남는 것처럼.
그런 서사들이 유행하는 한편 <슬램덩크>는 보다 청량음료에 가까운 질감을 선사한다. 마음 놓고 농구를좋 아해도,즉 일견 가치 없어 보이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 그것이 허용되는 세계. 이러한 노력의 가치를 <슬램덩크>는 끝없이 재고시켜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다. 세상의 평범한 절망과 흔해빠진 악에 익숙해지기 전,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도 되었던 시절. 그 시절은 어쩌면 영화 속에서밖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에게 극상의 쾌락과 고통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러므로 겪어본 적도 없는 그 시대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누구나 지나쳤을 유년기의 순수함을 ‘리부트’ 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희고 투명한 쾌를 즐길 수 있다.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은 30년 전의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던 노력의 가치를 현대에서도 그대로 재현시켰다. 그들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도덕책 같은 논조를 이어가는 것도 아니다. 30년의 세월 후 두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추가된 것은 ‘상실’을 대하는 태도다.
<슬램덩크>는 주인공 송태섭의 형 송준섭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원작에서 늘 여유롭고 사연 없어 보였던 송태섭은 사실 9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슬램덩크>를 처음 감상할 때 진입장벽이었던 것도 이 서사인데, 다소 신파적이고 클리셰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서사’를 대하기보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로 송태섭을 조망한다. 이들의 비극은 결코 불행 포르노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슬플지언정 불쌍하게 그려지지도 않는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송준섭에 관한 대화가 나올 때 ‘송태섭의 표정에서 특정한 감정이 느껴지게 그리지 말라’고 디렉팅했다. 보통의 작품이었다면 송태섭 일가의 불행을 질척하고 암담하게 그려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줄초상이 나도, 그것 때문에 자살 시도에 가까운 행위를 해도, 슬픔을 채 소화하지 못하고 억지로 살아가도, 영화는 그것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낸다.
예컨대 송태섭과 송준섭은 생일 날짜가 같은 형제다. 송준섭이 죽고 9년이 지난 송태섭의 17살 생일에도 케이크에는 ‘준섭&태섭 생일 축하해’라고 적혀 있다. 죽은 사람의 생일을 챙기다니 위화감이 든다. 당연하다. 송태섭 가족에게 아직 송준섭은 망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송준섭은 12살에 바다로 나갔다가 장기 실종된 상태이다. 장례식조차 제대로 올렸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송태섭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형이 떠났던 오키나와의 바다를 보고 싶어서 달리고, 달리다가 화이트 아웃. 죽기 직전의 상태로 입원. 이 모든 과정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게 그려진다. 죽음과 상실은 삶의 한 부분일 뿐 도드라지게 조명해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체에서의 죽음과 상실,특히 어린 가족의 죽음에 대한 장면은 마치 그 죽음이 전부이고 마지막인 것처럼 표현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이 역시 인생의 한 과정일 뿐 종착지가 아니라는, 위로도 절망도 아닌 진심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들의 인생을, 그 속에 담긴, 꾹꾹 눌려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을 몇 번이고 곱씹게 된다.
<탑건: 매버릭>도 마찬가지다. 매버릭은 더 이상 30년 전의 반항아가 아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도 정착지도 없다. 그런 매버릭에게 송준섭 같은 존재는 아이스맨이다. 송태섭의 빛났던 어린 시절만큼 소중했던 20대를 함께한 윙맨. 그러나 아이스맨의 배우 발 킬머는 후두암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영화는 그렇다고 해서 아이스맨을 포기하지 않는다. 발 킬머는 자신의 상태 그대로 나온다. 그야 그 대단한 수석 파일럿 아이스맨도 나이 들면 목소리를 잃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발 킬머는, 아니 아이스맨은 휠체어에 앉아 타이핑 기계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It is time to let go.” 흘려보낼 때가 됐다는 말. 이것이 두 영화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다. 상실 앞에 소리치고 분노하기보다는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두 영화는 오락성에 충실하면서도 인생의 비밀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려준다.
앞서 말했듯 나는 농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슬램덩크>를 보게 된 이후 꾸준히 농구 교실에 다니고 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영화 속 정우성의 대사처럼 ‘내게 필요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넘기게 되었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이토록 내 인생을 단기간에 변화시킨 작품은 <슬램덩크>가 처음이다. 그것은 <슬램덩크>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그 시기로 돌아가게 만드는 특별한 쾌를 주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우리는 점점 꿈을 잃게 되고, 노력과 우정의 가치를 등한시하게 된다. <슬램덩크>는 잊힌 가치들을 재조명시킨다. <탑건: 매버릭>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가장 기본적인 세계. 아무 걱정 없이 순수한 가치를 추구해도 되는 세계가 아닐까. <슬램덩크>와 <탑건: 매버릭>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기꺼이 말해주는 작품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대리만족시켜주는 것, 이것이 예술 작품의 가장 큰 효용이자 쾌임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슬램덩크>가 보여준 세계는 그 어떤 세계보다 반짝인다. 그러니 말할 수 있다. 단지 농구만이 좋아서 <슬램덩크>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그 세계는 우리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시기로 돌려보내준다. 우리는 그 시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돌아갈 수 없지만 돌아가고 싶은, 스크린을 통해서나마 한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세계. 우리가 가장 쾌청할 수 있는 세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