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좀 개인적인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맞이하는 시점이 매거진 필진 졸업 시점과 일치하게 된 것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수업을 한 해 겪은 뒤, 이건 전혀 내가 알던 학교가 아니라는 생각에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휴학한 1년간은 그 어느 때보다 영화를 적게 보았다. 영화관에는 열 번 갔나? 나는 전형적으로 취미가 전공이 되어 취미를 잃어버린 사람인데, 그러니 재미있지 않으면 공부를 지속할 수 없는데 내가 이제 영화와 영화에 대한 글쓰기에서 재미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일까 봐 복학하기 전 홀로 고민이 많았다. 답은 없는 채로 개강을 맞이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동기가 물었다. “그래도 대면 수업이 좋아?”
나는 경기도에 살고 있어서 영상원이 있는 석관동에 오려면 한 시간 사십 분 동안 세 번의 환승을 해야 한다. 동기의 질문은 이 설명을 듣고 나온 것이다. 휴학을 했어도 학교에 일이 있어 계속 왔기 때문에 2019년 봄부터 2023년 여름 현재까지 4년 반 동안, 학교에 올 때마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이 거리를 참고 견디며 계속 학교에 다닌 것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영화 관객들은 한자리에서 같은 영화를 보지만 모두가 다른 감상을 갖는다. 이것은 사진에 기원을 두고 있어 영화의 존재 조건이 ‘프린트’이므로,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 영화가 ‘기술 복제 가능한’ 것이라서 나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물리적으로는 분명 그럴 수 없음에도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그리고 영화와 관객들이 서로 접촉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호불호는 느낌이지만 쾌불쾌는 감정이다. 즉 ‘쾌’는 신체적인 감각을 포함한다. 따라서 나는 이런 감정을 얻고 그 감정을 나누는 일이 상호 접촉으로서 사람들의 삶을 생동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살아 있는 것과 생동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 자신에게 생명이 있는 것과 내가 그것을 감각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무엇이 쾌이고 쾌가 어떤 것인지는 각자에게 다를 것이다. 나는 또한 그 점을 모두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그로써 그 다름을 이야기하는 대화를 촉발하는 것이 예술만이 가지는 고유한 힘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 필진으로 활동한 3년 동안 나는 이를 충분히 누렸다. 그래서 이제 다음 페이지로, 말하고 쓰는 즐거움의 차례를 넘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