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2023 SUMMER45

정신분석적 쾌: 쾌락원칙 반복강박 주이상스

모든 이가 즐긴다. 빠는 쾌락, 무는 쾌락, 누는 쾌락, 싸는 쾌락, 삽입하는 쾌락, 삽입되는 쾌락, 보는 쾌락, 보여주는 쾌락, 안는 쾌락, 문지르는 쾌락, 어루만지는 쾌락, 굶는 쾌락, 마구 삼키는 쾌락, 때리는 쾌락, 맞는 쾌락, 읽고 쓰는 쾌락, 곱씹는 쾌락,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족되지 않음으로 인해 다시 반복하고자 하는 쾌락을 통해 말이다.

프로이트와 함께 쾌락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사안을 확인하는 데에서 시작하자. 우리의 정신생활은 “쾌락원칙”을 따른다. 즉, 우리는 가능한 한 불쾌를 피하고 쾌를 쫓는다. 여기서 불쾌는 흥분의 양의 증가를, 쾌는 흥분의 양의 감소를 뜻한다. “쾌(快)”라는 한자어의 분석에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쾌”란 “마음(心)”과 “터놓다 혹은 깍지(시위를 당기기 쉽게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도구)(夬)”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쾌”는 마음의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음으로써 심적인 긴장을 털어버린다는 뜻이다. 여기서 “항상성의 원칙”이 작용한다. 즉, 우리의 정신은 활시위가 너무 팽팽해질 때처럼 흥분의 양이 증가하면 막힌 부분을 뚫어주듯 활시위를 놓음으로써 흥분의 양을 낮은 상태로 혹은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쾌락원칙은 자신과 대비되는 “현실원칙”을 자기 안으로 포섭하는 경향이 있다. 일생일대의 시험이라는 현실 앞에서 술을 마시고 싶은 자를 떠올려 보라. 술을 마시는 쾌락원칙에 따르는 것은 그의 자아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마시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합격하고 나서 술을 마실 가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 지연했을 뿐, 마시는 쾌락은 언젠가 성취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의 또 다른 변형이다.

프로이트는 좀 더 미묘한 지점으로 나아간다. 우리의 정신에는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영역도 있다. 그 영역은 쾌락원칙과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쾌락원칙을 적당히 무시하면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면서도 쾌락원칙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리를 추동한다. 여기서 우리는 쾌와 불쾌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모호하게 중첩되어 있는 영역과 만난다. 여기에는 쾌락으로 감지될 수 없는 쾌락, 역설적인 쾌락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쾌락에 대해 정신분석적으로 고유한 탐색이 시작되는 영역이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반복 강박”의 영역이다.
반복 강박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첫째, 외상성 신경증이 있다. 외상 혹은 트라우마란 정신의 방어력을 무너뜨릴 정도로 과도한 자극을 뜻한다. 그리고 외상성 신경증자는 외상에 고착된다. 그는 쾌락원칙의 항상성이 깨어진 상태를 항상적으로 유지하려는 상태에 놓여 있다. 둘째, 유아의 놀이가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손자가 실패를 던지면서 “갔다(fort)”를 외치고 실패를 잡아당기면서 “거기(da)”를 외치길 반복하는 것을 관찰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실패의 움직임은 어머니의 현존과 부재를 상징한다. 즉, 아이는 어머니의 부재를 수동적으로 겪는 불쾌함을 반복하는 가운데 능동적인 쾌락을 얻는다. 셋째, 신경증자의 전이다. 전이란 내담자가 분석가와 맺는 감정적 유대의 총체를 뜻한다. 어떤 신경증자는 억압된 충동을 의식화하고 기억하기보다 분석가와의 전이적 감정에 몰두하면서 과거의 패턴을 답습하고 분석의 진전에 저항한다. 넷째, 정상인의 삶이다. 어떤 악마적인 힘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반복적인 불행에 노출되는 사례를 떠올려 보라. 계속해서 지인에게 배반을 당하는 사업가, 이성 관계에서 늘 똑같은 좌절을 겪는 남자 등. 그러면 사람들은 “운명”에 대해 말하겠지만, 정신분석은 운명이란 유년기에 일정 부분 근거를 둔 반복 강박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말한다. 다섯째, 외상성 신경증자의 꿈이 있다. 전쟁, 테러, 재난, 사고를 당한 내담자는 악몽을 통해 자신이 겪은 불쾌한 경험을 재경험한다. 여기서 꿈이 무의식적 소원의 성취라는 명제는 무너진다. 어떤 꿈은 반복 강박의 논리를 따른다. 여섯째, 죽음충동이 있다. 죽음충동이란 모든 유기체가 살아 있기 전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힘을 말한다. 즉, 개체의 생명과정에는 긴장을 폐지함으로써 죽음을 향하는 경향이 본래부터 내재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삶도 삶충동과 죽음충동이 영원히 부딪히는 과정, 죽음충동에 끊임없이 매혹당하면서 그것과 맞서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입장을 계승, 확장시킨다. 그는 쾌락원칙 너머의 반복강박의 영역을 “주이상스(jouissance)”라 부른다. 주이상스란 우리의 육체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충동 만족을 위해 반복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주이상스에서 우리는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어느새 또 이렇게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만난다. 여기서 쟁점은 욕구와 충동의 구분이다. 가령 식욕에서 우리는 생물학적인 생존의 차원에서 음식을 겨냥한다. 한편, 구강충동에서 우리는 아무리 먹어도 부족해서 배가 찢어질 정도로 쑤셔 넣는 충동의 차원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을 겨냥한다. 이런 점에서 주이상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다나이데스의 구멍 뚫린 항아리(우리 식으로 하면 “밑 빠진 독”)와 같다. 그렇다면 왜 공백이 있으며, 왜 항아리에 구멍이 뚫린 걸까? 그것은 우리가 사물의 세계에서 말의 세계로 들어오면서 잃어버린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언어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추방시킨다. 그 결과 주이상스는 완전한 만족이 획득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내지만,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채로 남는다. 후기 라캉은 주이상스가 상징적 질서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질서를 통해서 유발되고 전달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마치 우리가 말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자체를 즐길 때처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주이상스를 그저 상실한 것이 아니라 찌꺼기 같은 잔여물로서의 주이상스를 탐하도록 이끌린다. 근원적인 상실을 이차적으로나마 만회하도록 부추겨지는 것이다. 실제로 동시대 세계에서 우리는 기성품처럼 끝없이 주어지는 쾌락들로 손쉽게 상실을 메울 수 있다.

맛집, 알코올, SNS, 쇼핑, 게임, 도박 등. 그리고 종종 이러한 “잉여_주이상스”들은 우리에게 삶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일깨워 주기보다는 우리를 기존 사회경제적 질서의 부속품으로 만들어 버리고는 한다. 한편, 라캉에게 성적인 주이상스는 단순히 금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타자의 육체와 만나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는 충동을 구조화하는 어떤 기준점(팔루스 함수)에 의해 매개되며, 그 기준점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갖는다. 이것은 남녀가 서로에게 이질적인 주이상스를 갖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남녀가 조화로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적인 쾌락의 실상이 드러난다. 섹스는 성관계의 불가능성이라는 난관 및 남녀의 비대칭성이라는 한계에 마주하여 하나 되기의 신기루를 좇는 쾌락이다. 마지막으로 쾌락과 관련하여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 라캉의 발언에 주목하자. 동시대 초자아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즐기면 안 돼”가 아니라 “즐겨라”라고 명령한다. 금지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향락에 대한 강요가 우리를 압박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계발에 충실해야 하는 한편, 불금을 보내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주말약속을 잡지 않으면 안될 것 같고,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요컨대 주이상스는 양가적이고 문제적이다. 주이상스는 우리가 “쾌”의 딜레마로부터 완쾌 불가능함을 뜻한다. 한편으로 주이상스의 부재가 온 우주를 공허하게 만들지만, 다른 한 편으로 주이상스는 대형 화재로 커질 수 있는 불씨와 같다. 결코 없으면 안 되지만, 한 번 발을 담갔다가 자칫 일이 어떻게 커질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프로이트의 표현처럼 마치 “악마에게 자신의 몸을 팔지는 않는 악마의 옹호자(advocatus diaboli)”로서 끊임없이 쾌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주이상스(jouir)의 치명성에 나름대로 대응하면서 다시 즐기는(re_jouir) 악마적인 반복 너머에서 어떤 기쁨(réjouir)에 닿기 위해서 말이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쾌락이 오늘날 철저히 대상화되고 상품의 논리에 종속되는 한편, 주이상스는 그 이질성과 무용성, 계산 불가능성으로 인해 주체의 특이성을 해명하는 한 가지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쾌락이 우리를 속이는 반면, 주이상스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주이상스의 괴이하고 놀라운 면에 개별 주체의 진실이 놓여 있음을 말하고, 분석이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한 아이러니한 긍정(‘내가 보기에도 나의 이런 면은 약간 이상하지만, 이 정도면 삶을 살기에 나쁘지 않다’)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그 결과 주체는 삶의 일상적 불운 속에서도 유머를 간직하고 자신의 모호한 무의식을 사랑하는 모종의 유“쾌”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동은 장벽을 뛰어넘고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과 삶은 언제나 영감을 준다. 유럽의 낯선 도시에서 스치듯 마주친 시간도 어떤 형태로든 삶에 흔적을 남긴다는 생각을 하면, 투어를 하며 생기는 모든 일들이 유의미한 것이다.

잠비나이는 거문고, 해금, 피리 등의 국악기와 기타, 드럼, 베이스 등의 서양악기로 앙상블을 만들어 내는 밴드다. 2014년부터는 매년 평균 20개국 50여 회에 달하는 해외 공연을 해오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로 최다 해외공연 수를 기록하고 있고, 글래스톤베리 외 다수의 유럽 페스티벌 한국 최초 출연과 코첼라, 헬페스트, 악탄젠트 등의 전 세계 탑 페스티벌 무대에도 올랐다. 전통 음악인으로서도 대중음악인으로서도 최초의 무대들이 많다.

이렇게 많은 해외 공연을 다니다 보면 수많은 에피소드가 생기게 마련이다. 사실 투어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압도적으로 좋다. 공연자가 아닌 여행자로 방문했다면 만나기 어려운 장소와 사람들, 처음 들어보는 낯선 도시에서도 우리 음악을 사랑해 주는 팬들, 나라와 도시마다 다른 풍경과 음식, 각양각색의 라벨을 단 다양한 도시들의 로컬 맥주를 맛보는 것도 투어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시간들 속에는 간간이 고생스러운 순간들도 있다. 방문국의 입국 보류, 항공 이동 시 악기 파손이나 누락, 투어 밴의 고장 그룹 잠비나이 등 일상을 벗어난 곳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날씨인데, 체감온도 20도 이상의 기온 차를 이겨내며 남과 북을 단시간에 이동하거나 매일 다른 물과 음식, 그리고 숙소를 옮겨 다니는 일정은 탈을 부르기도 한다. 투어 가방을 쌀 때 악기와 이펙터 다음으로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상비약과 영양제가 된 지는 오래다. 지금이야 덜하지만 십 년 전 투어 초기 시절에는 동양인이라는 인종차별도 종종 겪었다. 눈을 찢는 행위를 하며 지나간다거나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 등. 차별의 방법 중에는 ‘무시’도 있다.

2014년에 첫 장기 투어를 할 때였다. 잠비나이는 세르비아에서 열리는 동유럽 최대 규모의 페스티벌인 ‘EXIT Festival’에 도착했다. 우리는 페스티벌 내에서 헤비/익스트림 뮤직을 다루는 ‘Explosive’ 스테이지에 배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온 특별하고도 강한 이 음악을 그에 어울리는 취향의 관객들에게 소개하고자 한 디렉터의 의도였다. 같은 라인업의 밴드들은 모두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헤비 뮤직 씬을 지탱하는 굵직한 경험과 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백스테이지에는 헤비 뮤직이 삶 그 자체인 듯한 모습을 한 뮤지션들로 가득했다. 헤드뱅잉에 최적화된 장발의 남성들은 온몸에 체인을 휘감은 채 공연 전의 기분 좋은 긴장을 즐기고 있었다. 잠비나이에게 배정된 대기실 텐트로 들어서니 우리와 대기실을 공유하는 한 무리의 밴드가 미리 와 있었다. 대개의 경우, 상대 팀을 배려하여 공간을 나누어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대기실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악기를 놓을 공간도 없을뿐더러 모든 쉴 곳이며 대기할 공간을 그 밴드가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첫 번째 쾌를 경험했다. ‘불쾌’. 그 밴드는 동양의 낯선 나라에서 온 이들이 서양의 언어로 표현하는 음악을 잘 해낼 리 없다는 눈빛으로 첫 시선을 건넸다. 그 짧은 관심도 이내 사라졌지만. 덕분에 우리는 불편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를 때도 관객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어떤 관객은 당시 인기를 끈 한국 유행가의 안무를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며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하리. 우리에게 주어진 무대, 음악에 부끄럽지 않은 순간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닐까? 연주를 시작했다. 한 곡,한 곡 진행될 때마다 공연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마지막 곡을 연주할 때는 눈물을 훔치는 관객도 생겨났다. 올라갈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함성을 뒤로하고 무대를 내려와 대기실로 향했다. 잠시 불쾌한 순간을 만들었던 대기실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까지 무시로 일갈하던 그 밴드가 ‘친구!’를 외치며 환호의 융단을 깔았다. 우리를 향해 연신 찬사를 쏟아냈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쾌를 경험했다. ‘통쾌’. 사람은 늘 자신이 아는 것만을 가지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아마 우리는 그들의 사유 범주 안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바라건대, 그 순간 그 밴드의 세계도 확장됐다. 함께 웃고 술잔을 부딪히고 사진을 찍으며 대기실은 비로소 공연이 끝난 후 공유되었다. 세 번째 쾌인 ‘유쾌’한 엔딩이었다.

투어를 하다보면 많은 벽을 만나게 된다. 서로 다른 언어, 인종, 문화가 빚어낸 상황들은 불안하고 경색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럴 때는 음악이 큰 힘을 발휘한다. 언어와 인종을 뛰어넘는 것,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혼으로 마주하는 순간들을 기다리며, 잠비나이는 오늘 또다시 길 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