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유리해변이 있다. 해변에 버려진 유리병, 그릇 등의 유리 쓰레기 파편이 파도의 풍화작용으로 둥그렇게 깎여 해변을 뒤덮고 있다.
전시 《유리 까는 사람들》(2023.05.26.–06.08, 00의 00)은 김승일의 시 <유리해변> 1을 토대로 하는데, 작가들은 시에 등장하는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유리를 까는 사람’이 되어 유리해변을 만들어낸다.
전시의 큰 축을 시 <유리해변>이 담당하고 있기에 먼저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승일의 시 속 유리해변에 깔린 유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캘리포니아 유리해변의 유리들과는 달리 뾰족하고 날카로워서 그 위를 맨발로 걷는 이들의 발에는 유리가 박힌다.
시의 화자 ‘나’는 유리해변에 있다. 유리해변에서 ‘나’는 ‘같이 유리 깔던 여자’와 “특히 아름다운 해변들만 골라 유리를 깔고 가는” 순례를 하고 있었다. 해변의 아름다움을 이해해보기 위해서 ‘나’와 ‘여자’는 함께 유리를 깔았다. 하지만 여자는 ‘해변에서 눈이 맞은 어떤 남자’와 밤마다 어디론가 떠나 ‘나’는 홀로 유리를 깐다. ‘나’는 혼자 유리를 깔다 피곤해져 유리해변 위에서 잠드는데, 꿈속에서 ‘나’처럼 유리를 까는 ‘그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은 유리해변 위를 맨발로 걸어 발에서 피가 나고, 꿈에서 깨어난 ‘나’의 온몸에도 “어제 당신과 함께 깐 유리”가 박혀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나’는 해변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데 성공했는가. 그건 알 수 없지만 다른 남자와 사랑을 속삭이다 돌아온 ‘당신’이 유리가 박혀 피칠갑이 된 ‘나’를 보고 끔찍하다 울먹이면, “나는 가끔 이해받았다.”
이런 ‘나’와 달리 ‘밑창 두꺼운 신발’을 신은 ‘관광객과 시인들’은 아름다움을 이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다치고 유리 박히고 ‘당신’이 돌아왔을 때만, “끔찍해”라고 말할 때만 가끔 이해할 뿐이지만 시인과 관광객들은 하나의 상처 없이 “참 아름답지?”라고 말하며 “서로에게 동의”한다. 하지만 ‘시인과 관광객’이 정말 해변의 아름다움을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사실 이해의 여부는 ‘나’에 한해서든 ‘시인과 관광객’에 한해서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뾰족한 유리 위를 맨발로 걸어야만 아름다움을 향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 마음은 사실 함께 유리를 깔고 있는 한해서만 순례와 같은 것이고 혼자 유리 까는 일은 피곤에 지쳐 해변에서 잠들게 되는 고단한 일이라는 것, 그럼에도 ‘당신’이 ‘나’를 보며 울먹일 때 비로소 이해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유리를 깐다.’ 는 목적과 행위 사이에는 이토록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다.
전시로 돌아와 보면, 전시명이 ‘유리해변’이 아닌 ‘유리 까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시의 이러한 면이 두드러진다. 전시명이 ‘유리해변’이었다면 전시 공간은 곧 유리해변이 되고, 관객은 김승일의 시 속에 등장하는 유리해변에 밑창이 두꺼운 신발을 신고 오는 관광객 혹은 시인처럼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하지만 이 전시의 이름이 ‘유리 까는 사람들’이 되는 순간(전시 공간이 유리해변이 된다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을지라도) 관객은 유리 까는 마음을, 유리 까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해의 여부가 아니라 이해의 시도는 어떤 장면들을 포함했는가이다. 그렇다면 시 속 화자가 아닌 전시 속 작가들이 유리 까는 사람이 되어 품은 마음, 거쳐 간 장면은 어떠한 것들인가. 전시는 서문 속에 그 단서를 놓아둔 듯하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유리를 깔며 각자가 마주한 단절에 반응한다. 2
전시장에 도착하면 시 <유리해변>이 프린트된 A4 크기의 종이와 유리 모양의 사탕이 담긴 원통형 유리병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원통형 유리병 속 찐득한 유리 사탕 하나를 집어 요리조리 혀로 굴려 가며 전시장에 들어섰다. 들어선 전시장에서는 투명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유리들이 깨져있는 것이 아닌 불투명하고 움직이고 솜으로 채워져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김성연은 패브릭을 이용해 만든 세포, 뼈, 장기 등의 신체 일부를 벽면에 식물 구조도같이 부착해 두었다. 이 광경은 아주 부드럽고, 몸의 여러 부분은 해체되었음에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손이다. 손은 <토닥이>(2017)와 <Handshaker>(2022) 두 작품을 구성한다. 특히 <Handshaker> 속 옅은 회갈색의 손은 벽에 문손잡이처럼 붙어있다. 혹은 벽 너머에 있는 정체 모를 누군가가 벽에 딱 손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뚫어 손을 빼꼼 내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뭐가 되었든, 이 손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손이 관객에게 잡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이 손을 덥석 잡고 싶어진다. 김성연의 작품들은 분해하고 조각내었음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과 연결되고 싶게 만든다.
이정윤의 작품은 날카로운 감정을 꼭꼭 씹어내는데, 그 고통스러울 과정은 장난스럽게 변주된다. <First aid kit: for self harm>(2020~2023)에서 뾰족한 커터칼은 푹신한 솜으로 만든 직사각형 상자에 보관된 채 12번 반복된다. 어떤 상자에는 칼날만 있고, 어떤 상자에는 칼은 없고 칼의 흔적만 흰색 박음질로 테두리 처져 있기도 하다. 상자 안에 삼켜진 듯한 칼은 이제 더 이상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상자의 새빨간 색감이 칼이 표면을 스쳤을 순간들을 놓지 못하게 한다. <SAD VIDEO>(2022)에서는 ‘자판에서 sad를 쓸 때는 너무 쉬워요. 왼쪽부터 A S D F 이런 순으로 있어서 S를 기준으로 왼쪽 오른쪽 한 번씩만 왔다 갔다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SAD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누르면서 대낮의 길거리를 달려 나가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숨을 헉헉대면서도 ‘왼쪽, 오른쪽’을 말하며 달리고, 왼쪽 한 번 오른쪽 한번 한 쪽 발로 깡총거리는 장면에서 SAD는 전혀 슬프지 않게 다만 가쁜 숨으로 발화된다.
김연진의 유리 작품은 바닥에 깔려 있기도 하고 (<뉘앙스>(2022–2023)), 스테인레스 판에서 솟아 나오며 출렁거리기도 (<요변덕>(2023)) 한다. 곡선의 유리 조각은 꿈틀거리고 다양한 색으로 반짝이며 무엇보다 여러 조각이 느슨하게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침울한 살>(2022)에서는 살굿빛 물감이 고여있는 여러 모양의 유리 조각들이 철 트레이 위에 무질서하게 올려져 있다. 물감의 색상을 바탕으로 이것을 작품 제목에서 언급되는 ‘살’이라 연상해본다면, 트레이에 올려진 살덩이들은 어떤 몸에서 찢겨 선반에 올라가 있는 듯하다. 군데군데 늘어져 있는 금색 실타래는 살덩이들의 곡선과 함께 출렁인다. 살덩이, 유리는 본래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던 것이 깨져 파편이 된 것이라기보다는 탄생의 순간부터 독립적이었던 조각들이 함께 모여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파편적이다. 조각들의 단면을 이어 붙여 완성시킬 수 있는 하나의 형체는 없으며 그저 각각의 살덩이가 물화(物化)된 채 트레이 위에 나열되어 있다.
박정은의 유리 조각은 물의 흐름, 시곗바늘 등의 움직임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작은 소리를 만든다. <녹지 않는 눈사람 시계>(2022)에서는 유리로 만든 눈사람 모양의 시계 안에 흰색 모래가 얕게 쌓여 반짝거린다. 흘러가는 시간에 가장 취약한 존재 중 하나는 눈사람일 것이다. 눈사람은 시간이나 온도 변화에 따라 그 존재 자체가 계속 흔들린다. 그러나 박정은의 눈사람은 스스로 시계가 되어 시간을 버틸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눈사람을 녹이지 않고, 다만 고운 흰색 모래가 시침, 분침, 초침의 움직임을 닮은 모양으로 흩어져 있는 것으로 시간의 자욱을 분명히 남긴 듯하다. 눈사람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흐른다.
손을 뻗어 다른 손을 마주 잡게 하는(김성연), 유리를 삼킨 채 온몸으로 내달리는(이정윤), 출렁이는 몸을 가진 유리를 생각하는(김연진), 시간과 함께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을 새겨나가는(박정은), 이러한 장면들이 단절을 마주한 작가들이 거친 장면이라 여겨진다. 단절에 반응하는, 혹은 단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의 유리 깔기는 소개한 작품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 안에서 벌어진다.
전시를 통해 상상하게 되는 유리 까는 마음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해로 가닿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이해를 넘어서려는 마음이다. 시를 통해 “참 아름답지?”라는 말보다 “끔찍해”라는 말이 아름다움을 향한 이해에 더 가까울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전시 역시 단절을 몸으로 고단하게 체험하며, 이를 섣부르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단절의 과정을 다시금 배열해낼 뿐이다.
시와 전시의 유리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캘리포니아의 유리해변 속 유리와는 달리 결코 둥글게 깎일 수 없다. 유리가 둥글게 깎여 주워갈 수 있는 것이 되면, 해변의 아름다움은 그저 이해될 뿐이다. 전시에서 관객이 입장하며 집게로 집어 갈 수 있었던 유리조각 사탕은 어쩌면 실재하는 유리해변의 기념품같은 유리와 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을 위해 마련해 둔 유리 조각 사탕은 날카로웠다. 입에 넣으면 모서리가 느껴져 입안이 간지러웠다. 입에 직접 넣어야만 달그락거리는 모서리, 맛보아질 수 있는 달콤함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