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와 위선은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곧잘 혼동되곤 한다. 내가 단순히 마음이 내켜 행한 일도 평소 나를 마뜩잖게 여기던 누군가는 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직 배뚤어진 성정을 가진 이들만이 그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일상 속 숱하게 지나쳐가는 사건들 사이에서 참 쉽고 빠르게도 합리화와 일반화를 행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개인의 이익이랄지 가치관이랄지 다양한 종류의 이름을 가진 입맛에 따라 한 사람의 순간적인 행동과 발언으로 전체를 평가하고 선별한 이미지들로 사람 자체를 재창조하여 대중들의 도마 위에 선보인다.
절대적인 선과 악을 나누어 판단할 수 있는 잣대라는 것이 애당초 어디에 있겠는가. 있다 한들 타인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를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본성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이 모든 행위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 사람을 향한 누군가의, 또는 누군가들의 손가락과 목소리가 모여 커다란 흐름을 만든다. 관조하는 위치이건 참여하는 위치이건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흐름 속에 늘상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야 어떻든 긴 생각 없이 뱉은 말과 행동으로 한 개인의 인생을 옭아매는 것은 명징한 폭력이다. 임솔아 작가의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무수한 폭력들과 그 속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의 시대적 흐름은 당대의 예술 작품이 지닌 핵심을 날카롭게 관통한다. 떠올리기만 해도 그때로 회귀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작품 안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내러티브의 일부가 된다. 임솔아 작가가 한 데 엮어낸 여덟 편의 단편소설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 저마다 외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같은 하늘 아래에서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 같다. 그들이 가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작 속에서 개인 혹은 집단들로부터 ‘대상화’ 됐다는 점이다. 이들은 마땅히 본인의 상황을 밝히고 오해를 해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매한 단정(斷定)과 시선들에 의해 주변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자신을 둘러싼 관객들과 껍데기뿐인 말속에서 당사자는 정작 입을 열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열여덟에서 스물다섯까지, 폭력의 피해자에서 피해자의 주변인, 관조자에서 가해자까지 ‹눈과 사람과 눈사람› 속에서는 폭력이라는 이름 속에 포함되는 참으로 다양한 군상을 그려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작가가 인물들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전까지 (극적 혹은 일상적) 폭력이라는 소재를 담은 작품에서는 -뚜렷한 선악의 대립을 위해서일지는 몰라도- 일대일 혹은 일대다 대응 방식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성을 으레 택해왔다. 그러나 임솔아 작가는 여덟 편의 단편소설 속에서 단순히 주고받는 폭력이 아닌, 거대한 폭력의 공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의 주변인들까지도 탈출구 없는 사지로 몰아세우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절대적인 가해자는 가려지기 일쑤지만 흐름이 지나간 후에도 그에 짓눌리고 무너진 피해자는 오랫동안 남는다.
B강사와의 일 이후로 정원은 ‘시적 허용’이라는 말을 곱씹는 습관이 생겼다. 전날까지만 해도 정원이 좋아한 말이었다. 가슴이 무너진 모든 기억을 시는 허용해줬으니까. 그러나 이제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말이 어떤 부당함을 시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듯했다. 그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고는 했지만, 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면모는 타자, 그중에서도 유독 약자 앞에서만 강하게 분출되는 특징이 있었다.
- 「추앙」 중에서
글을 마무리 짓고 잠들려던 차에 인터넷에 올라온 충격적인 소식들이 내 잠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어린 나이에 영원한 잠을 선택한 내 나이 또래의 소녀들. 어느 누가 보아도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아 마땅하다 여겼기에, 그 안일한 마음만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을 마음 깊은 곳의 쓸쓸함과 울적한 표정은 아무도 이해해주질 않았기에,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 어느 날에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 남겨진 이들에게는 하고픈 말이 많았을 것이다. 흐름 속에 있을 때에는 관객 모두가 저 듣고픈 대로만 해석하니 섣불리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입을 빌려 해명한다 한들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더욱 무거운 폭력의 공기임을 누가 모를까. 흐름 속에서는 누가 나를 등지고 있는지만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가 내 곁에 있는지도 쉽사리 알기 어려운 법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흐름에 맞서 나를 지탱해주려는 이가 분명히 있다고 해도 당사자가 그 사실에 온전히 의지해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줄 게 있어›의 영후가, ‹눈과 사람과 눈사람›의 피해자가 그랬을 것이다. 아름다운 글과 사진을 찾아보고 누구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했던 한 소녀가 그랬을 것이고, 익명의 힘을 빌려 던져대는 폭력적인 말속에서 짐짓 강한 체했지만 때론 이불 속에서 눈물을 쏟아냈던 다른 소녀가 그랬을 것이다.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도 없는 폭력의 주체자보다도 자신을 다독이며 일으켜 세우려는 사람들의 몸짓이 유난히도 부담스럽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도 자괴감이 몰려오는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괴로운 일은 끝나고 새로운 자리에서 훌훌 털어나리라 장담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현실이니까.
떠오르는 이들이 많은 작품이다.
초겨울 밤이 유난히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