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에서는 공간의 속성을 바꾸어 놓는 것만큼 다시 원래의 여백으로 돌려놓는 일도 중요하다. 전시 이외의 기능이 있는 공간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미술원 2층 미술이론과 복도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복도갤러리는 이번 학기 들어 7번이나 채워졌다가 다시 비워졌다.
멈춰 서서 머무는 공간이 아닌 이동의 공간, 통행로라는 복도의 기능은 전시를 방해하는 요소일까 혹은 반대로 전시의 주제를 촉발시키는 요소일까. 누군가는 복도갤러리의 전시들이 일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공간에 최소한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복도의 사용자인 미술원 학생들이 전시의 주체이기 때문인지, 오히려 복도의 특성을 교란시키고 새로운 성격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도전자들이 정기적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전시를 통해 복도는 부분적으로나마 누군가의 침실이 되기도, 청소 노동자의 휴식 공간이 되기도 했었다.
2019년 하반기에도 복도의 속성을 바꾸고자 시도한 전시가 있었다. 10월에 열렸던 «밀실 유토피아와 그 적들»은 복도 공간의 일부를 밀실로 탈바꿈시키면서 고의적으로 통행을 방해했다. 작가 그룹 ‘아시바와 다루끼’는 건축을 도시 환경의 요체로 보고 주요 탐구 대상으로 삼으며,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야기하는 ‘밀실 유토피아’를 그들의 첫 번째 프로젝트 주제로 다뤘다. 여기서 밀실은 ‘인간의 완벽한 컨트롤이 가능한 독립된 공간’을 욕망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도시 건축의 유토피아로 제시되었다.1
전시는 복도 한가운데에 ‘밀실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와, 복도를 지나며 이 밀실의 문을 여닫을 수밖에 없는 일상을 교차하며 7일 동안 이를 기록했다. ‘새시sash’2로 두꺼운 밀실의 문을 만들고 그 사이 공간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문에 추를 매달거나 실리콘, 우레탄폼을 덧바르는 등 작가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열리지 않아야 밀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강의실로 향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밀실을 와해시켜야 했고 막으려는 자와 열려는 자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복도의 사용자들은 공간을 쓰임새대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유토피아를 불가능하게 하는 적들이 되었던 것이다.
전시 «밀실 유토피아와 그 적들» 전경
한편 복도갤러리의 11월 전시인 서이을, 옥세영 2인전 «Ghostly Lines»는 비가시적인 경계를 만들어 상징적 의미의 벽을 탐구하고자 했다. 설치작업 ‹유령 선›을 보면, 형상을 흐릿하게 반영하는 바닥 위에 잘 보이지 않는 아크릴 선들, 비닐로 된 투명한 벽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작 지점에는 ‘조심! 선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발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 주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보였다. 작업이 복도라는 공간의 속성을 은근히 방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가는 길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벽은 육중한 물리적 실체가 될 수도 있지만 가벼운 비닐이 될 수도 있는,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로 상정된다. 물리적이거나 관념적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는 프레임, 위계질서, 생각의 차이와 같은 것들을 ‘선(Line)’ 또는 ‘벽(Wall)’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성을 가졌다고 해도 선과 벽은 사람의 움직임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3 무심한 자들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걸려 넘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유령 선›은 우리의 일상에 깊게 침투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경계들이 실은 우리의 움직임과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처럼 복도갤러리에서는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공간의 속성에 개입하는 전시들을 선보이고 있어 우리에게 다른 감각을 열어 준다. 미술사와 인문학, 논리와 수사로 미술을 이야기하는 미술이론과의 복도에서, 미술의 또 다른 측면인 시공간적 감각을 잊지 않도록 주지시킨다.
전시 «Ghostly Line» 전경
복도갤러리는 매 학기 공모를 받아 전시를 지원한다. 한예종 재학생 기획자 혹은 작가가 공모 대상이며, 팀의 경우 한예종 학생이 한 명 이상 속해 있으면 된다. 또한 개인전은 되도록 지양하여 기획이 중심이 되는 그룹전을 지향하고 있다. 작가가 전시를 공모한 경우에는 미술이론과 재학생 가운데 기획자를 매칭하여 전시 홍보와 서문, 오프닝 행사 등을 전담하게 한다. 이것은 미술이론과 소속인 복도갤러리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조형예술과와 미술이론과 사이에 드문 교류와 협업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예종 조형예술과 작가들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기획자가 외부에서 작가를 섭외하는 경우도 있다.
복도갤러리 전시를 진행하다 보면 모순되는 지점이나 어려움도 있다. 기획자와 작가는 인건비를 받을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작가를 외부에서 섭외한 경우 ‘아티스트 피fee’를 지급할 수 없다는 난관이 생긴다. 모든 운영을 주관하는 복도갤러리 조교가 한 학기마다 바뀌기 때문에 안정화된 시스템이 부재하기도 한다. 지원 예산은 전시장 조성비로 사용할 수 있지만 작품 제작비로는 사용할 수 없고, 복도갤러리 예산으로 제작한 전시장 조성 물품(액자, 전시대 등)은 전시가 끝난 후 모두 학교 측에 반납해야 한다. 예산을 사용할 때마다 학교 카드로 현장 결제해야 하고 인터넷 결제 등 다른 방식이 불가능하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미술원의 공간들이 학생들의 전시 실험을 위해 열려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학교 내부라는 위치상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다면 조형연구소에서 운영하는 175갤러리의 전시공모를 활용할 수 있다. 역시 한예종 재학생, 졸업생 및 수료생을 1인 이상 포함하는 팀에게 열려 있는 공모이며, 보다 큰 예산과 접근성을 제공한다. 175갤러리는 최근 종로구 자하문로(통인시장 부근)로 이전하여 근처의 사루비아다방, 보안여관, 윌링앤딜링을 비롯한 여러 문화·전시공간들과 함께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하고 있다.
여러 방면에서 학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학생의 특권이다. 미술원 학생들에게는 전시 기회를 얻어 자신이 뜻한 바를 공간에 구현하는 경험이야말로 소중한 도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미술 작업이나 글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적 공간으로 나아가도록 시도할 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끊임없이 공간은 채워졌다가 비워지고, 다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