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기억, 공동체와 타자, 윤리와 미학, 그리고 정치적인 것들과 감각적인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투하고 있는 작가 임민욱을 만났다. 우리 사회의 적대를 드러내어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미술은 결국 세계에 파묻힌 얼굴들을 구하는 실천이라고 말하는 그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보자.

©LEILA MESDAGHI

지속해서 공동체나 장소에 대한 문제들을 작업으로 풀어오셨습니다. 그런 주제에 대한 탐구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요?
누구나 어딘가에 속하여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현실은 항상 그렇지 않다 보니 고립된 존재들의 긴급함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소와 공동체의 문제는 단순한 작업의 주제라기보다는 가족과 이웃, 내 삶 자체가 맺고 있는 관계가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 박탈감이나 연루감으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손의 무게›나 전시 «미열이 전하는 바람» 같은 열화상 카메라 작업들에서 언급하신 체온의 보편성으로부터의 공동성, 혹은 ‹소나무야 소나무야› 같은 작업에서 주목하시는 보편성에 대한 논의들은 작가님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작업들로 보입니다.
작품들은 매체를 통해 타자가 타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공동체 내부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손의 무게›에서 완전한 어둠 속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소나무›라는 노래가 번역된 상황을 소개하며 전시장을 관객들이 개입할 수 있는 녹음실로 만드는 작업들을 통해 그런 지점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동질성으로서 공동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부재를 주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복종하지 않고 분출되는 블랙홀 같은 것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간격이고 작품들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따라서 경험에서 누락된 기억이 이런 작품 속에서 또 다른 공동체를 구성하는 계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임민욱, ‹손의 무게›, HD video & sound single channel projection

말씀해주신 내용들과 관련하여 자크 랑시에르가 논하는 ‘불화’, ‘불일치’ 같은 개념들을 언급하시는 자료들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 혹은 치안과 정치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구분하면서 정치와 감각의 근원적인 연동을 이야기하죠. 작가님의 미술과 정치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스위스 출신의 작가 토마스 허쉬혼은 자신이 정치적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정치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그 말은 삶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질적 평가의 원리에 맞서는 제작 방식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그의 작품들은 ‘관계의 미학’에서 언급되는 작품들 속의 관객처럼 자신들만의 소우주에 참여하거나 사람들을 통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긴장을 느끼거나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히려 미학적으로 고려되지 않는 것이나 배제된 것을 환대함으로써 지위나 위상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예술과 정치에 대한 태도를 미술 담론 안에서 자기참조적으로 장르나 매체를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이죠. 그의 작업 방식이나 장소와 공동체를 사유하는 방식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유골이 보관된 컨테이너를 경산과 진주의 골짜기로부터 광주비엔날레 전시장 앞마당으로 옮겨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확인할 수 있던 것은 미학과 정치의 연동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확고부동한 자기참조였습니다. 제게 쏟아지던 윤리적 비난들은 배타적이고 오만한 권위주의와 가부장적 언어에 의해 점철되어 있는, 일방적이면서도 폐쇄순환적인 미술의 언어를 스스로 폭로시켰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작품을 하는 동기는 윤리적으로만 귀결되지 않습니다. 적대를 통해 민주주의 조건을 성찰시키는 미술이 혁신하고자 하는 것도 있습니다. 작품은 그때, 예술도 오락에 굴복하고, 비평도 팬덤에 의해 분리되는 사회 속에서, 겹쳐 있으나 비어있는 곳을 가리키며 돌아오는 (불)가능한 환대의 순간이 됩니다.

미술과 윤리적인 것에 대한 문제를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불의 절벽2_서울› 같은 작업에서는 증언을 하는 당사자를 무대에 올려 퍼포먼스를 기획하시기도 했습니다. 증언자를 무대에 직접 올리는 작업 역시 여러 가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논쟁의 속내는 혹시 장르나 형식 실험에 대한 권위 의식이나 미술 전문인들의 폐쇄적 태도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소위 ‘미술공동체’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고문 피해자라고 정체성이 규정된 사람이 무대 위에 서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각자의 기대와 경험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증언을 통해 전달하려는 내용이 환상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이라면, 그것을 왜 주의 깊게 귀 기울여서는 안 된다는 것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불의 절벽2_서울›은 다큐멘터리도, 재현적인 연극도 아니었습니다. 옛 기무사가 국립극단으로 탈바꿈한 장소에서 배제된 자들의 귀환을 통해 예술 공동체 내부의 ‘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작품이라는 것을 창조의 경험으로만 결론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시간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작품 자체의 의미를 의심과 불안에 내맡기는 행위로 모색해야 합니다.

임민욱, ‹O Tannenbaum›, 2ch. video installation, still image

최근 기획하신 민주인권기념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전시 «끝없는 여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직접 작업하시지 않고 기획자로 나서신 이유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불의 절벽2_서울›의 무대에 주인공이었던 그분도 바로 대공분실에서 조작 간첩으로 몰려 온 가족이 고문을 받았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작년 10월에 돌아가셨죠. 대공분실은 영화 ‹1987›을 통해서도 알려졌고, 그것을 건축한 김수근에 대한 연구도 넘쳐나기 때문인지 사실 잘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공간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그곳에 개인전을 제안받아 방문했는데, 제가 개인전을 펼치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박종철이 학생으로서 발언했듯이 저보다도 젊은 세대가 전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떠안고 사는 분단국가의 작가로서 현대미술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쟁과 식민을 겪고 전통과 기록이 파괴된 곳의 미술은 무엇으로부터 어디를 향해 나갈 것인가. 나아가 이런 상황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나는 청년 세대에게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지.
이런 질문들을 해오던 차에 학생들과 아예 전시를 함께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전시의 모든 단계를 능동적으로 이끌었고 작가들 특유의 폐쇄적이고 경쟁적인 관계가 아니라 준비 기간 내내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며 협업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자발적 홍보와 함께 이번 전시가 주목을 받게 되자 작가 교수가 젊은 세대를 줄 세운다는 비난을 하는 블로거도 있었어요. 저열한 방식으로 초조함을 드러낸 그 속마음에서 우리는 결국 비평적 실천보다 작가적 지위와 그 위상에만 급급한 것은 아닌지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계속 질문합니다. 미술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끝없는 여지»라는 제목은 역사와 기억의 문제, 그것을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 그리고 재현의 (불)가능성을 운운하는 대신 기억이라는 것을 넘어서는 사유로 강제해보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열린 의미의 미술이라는 것은 또 다른 것의 배제나 장소특정성으로 의미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을 함께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질문들을 던져보려고 전시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선생님으로서의 임민욱의 모습도 궁금합니다. 스튜디오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학생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할까요. 올해 초부터는 학생들과 단체 사진을 찍어서 간직하고 있는데, 학생들은 영문을 모르니 어색해하더군요. 학생들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제 작업할 때보다 더 벅차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 안에는 그들의 고통과 욕망, 그리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 그들만의 비밀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기 때문이죠. ‘나’를 표현하라고 배운 그들에게 ‘나’의 조건을 읽어내는 ‘나’는 그들이 원하는 선생님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학생들은 점점 트렁크 강의록을 원하고 트렌드를 원하는데, 저는 지적 평등 공동체로서의 학습 공동체를 원하고, 또한 학교가 예술 이전에 인간성을 돌보는 곳이 되길 바라죠. 이곳은 ‘예술학교’니까요. 이 세상 모두가 일등만 기억한다고 해도 경쟁 말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여기 오는 것 아닌가요.
저는 이 학교에 와서 학생들에게 부탁하기 시작한 것 가운데 두 가지를 들라면, 하나는 계승해야 할 학교의 전통과 가치를 학생들이 세워줄 것, 나아가 그것이 졸업 이후에도 지속가능한 학습 공동체와 세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할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을 위한 ‘동무 비평’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 말처럼 ‘안알랴줌’하고 혼자 작업만 하거나, 크리틱 시간을 서로를 끌어내리기 위한 순간으로 알거나 타인의 상처는 오로지 남의 몫으로만 생각하는 신자유주의적 유형의 미술계 축소판이 한예종의 이미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저는 최근의 졸업전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그 전통과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믿고 싶어요. 그리고 입시 과정에서 매번 다시 한번 느끼고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걸. 오히려 학교에 와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습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고유한 리듬이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그것을 위해 서로를 배려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공동의 삶에 대한 사유와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는 작업을 해낼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임민욱, ‹Navigation ID›, 광주비엔날레 프레스 오프닝 장면

검열 논란으로 문제가 되었던 이번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표현의 부자유»전에 참여하셨다가 전시 도중 작품 철수에 함께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가 불거진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아이치 트리엔날레 «표현의 부자유»전이 폐쇄되었을 때 연대의 뜻으로 전시를 중단했습니다. 일본 작가들은 전시 중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에 놀랐다고 해요. 성명서를 주도하는 일본 작가 그룹과 계속 통화하고 메일을 주고받을 때, 그들은 자신들은 왜 보이콧 하지 못할까 하고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쿠바 출신의 작가 타냐 브루게라와 함께 2차 보이콧 그룹이 생기니까 그제야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붕괴하고 있다고 외치더군요. 저는 이 전시는 이미 붕괴했었다고 대꾸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로 저는 소중한 일본 친구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당한 것과 유사하게 물리적 제재와 심리적 압박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작가비도 차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최근에 일본 문부청 초대로 워크숍에 갔을 때도 저는 또 악역을 맡았습니다. 탈식민주의를 다루는 워크숍 과정을 보면서 문득 그들에게 근대의 기획과 추상화의 쓰임새가 모두 셀프 면죄부 같은 것은 아닐까, 누가 누구를 향해 말하는 걸까 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녀상은 단일한 관점이나 보편적인 것을 조직하는 체계에 균열을 가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이번 사태를 지워버렸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통해 발견한 것이 있다면 천황 아래 민주주의는 화합과 조화이며 봉쇄될 따름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면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오히려 공동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불화와 적대를 드러내 역설적으로 진보해 왔구나 하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학교에서 불이익과 배제를 당하는 일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자유라는 단어를 쓰기만 해도 목이 메입니다. 봉쇄되어버린 과거를 도래할 공동의 운명을 위해 발굴하고자 하는 작가로서 말합니다. 학교는 제게 이미 유토피아적 공동체지만, 논쟁적 토대로 지속하는 활동들을 보호하고 표현의 자유를 구원하는 이상적 공동체의 역할을 현실사회 속에서 학교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권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