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鬪爭)_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투쟁(鬪爭)이라고 했다. ‘어떤 대상을 이기거나 극복하기 위한 싸움1’이 바로 투쟁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투쟁인 걸까. ‹인정투쟁; 예술가편›은 분명 제목만으로는 그 내용을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연극임이 틀림없었다. 텅 빈 극장, 빽빽하게 놓인 좌석에 앉아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내가 보게 될 것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아니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연극은 말 그대로 ‘인정투쟁’ 그 자체이다. 무엇을 위한 투쟁인 것인가에 대한 답은 제목에 모두 들어있었다. 인정을 위한 투쟁이었다. 중요한 것은 인정의 의미일 테다. 연극이 말하는 인정이란 곧 예술가라는 인정을 받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인정투쟁; 예술가편›은 말 그대로 예술가가 예술가임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인 셈이다. 그들의 투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 투쟁을 지켜보는 100분의 시간 동안 공연은 총 7명의 ’예술가들‘을 등장시킨다. 예술가들은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 공연은 이 투쟁의 과정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시킨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영상 장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양 사이드에 배치된 모니터에서는 마치 연극의 대본 혹은 지문을 그대로 타이핑하는 듯한 화면이 계속 등장하고 무대 배경으로 세팅되어 있는 스크린에도 계속해서 텍스트가 등장하곤 한다.

ⓒ두산아트센터

#투쟁(鬪爭)_어떻게 투쟁하는가
성급하게 말하자면 ‹인정투쟁; 예술가편›은 반복이다. 극은 7명의 등장인물들을 예술가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반복하고 있다. 1막 ‘나’, 2막의 ‘너’ 그리고 3막의 ‘그’라는 과정을 거쳐 가는 인물들은 모두 ‘나’이면서 ‘너’이고 동시에 ‘그’가 된다. 이들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기에 같은 대사를 저마다 반복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극은 비슷한 구성을 반복한다. 커튼콜을 시작으로 해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인 죽음, 이후 1막부터 3막까지의 본 극, 그리고 다시 에필로그이자 프롤로그인 죽음. 이는 마치 문학 시간에 배웠던 수미상관법2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기도 하다. 또한 진행되는 동안 극은 각 막을 구별하는 데에 헨델의 음악과 김춘수의 시 ‹꽃›을 반복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형식적 측면 외에 서사적인 부분은 어떨까? 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대 위에 놓여있고 1막에서는 ‘나’로, 2막에서는 ‘너’로, 3막에서는 ‘그’로 불리지만 이름이 바뀌는 까닭 역시 알 수 없으며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래서 결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 알 수 없음은 인물들로 하여금 “올드해!”를 반복해서 외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인물들은 계속해서 나와 너 그리고 그가 ‘되기(Being)’를 반복해서 꿈꾼다.

이런 반복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이 싹튼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걸까? 극에서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예술인패스를 발급받으려 한다. 예술인패스를 가진 자는 곧 예술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인패스는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 조건이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예술가가 예술가이기 위해서는 예술가패스라는 자격증, 즉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셈이다. 이를 위해 인물들은 ‘나’가 되고 ‘너’가 되며 ‘그’로 반복하고 변화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너와 그가 ‘되기 (Being)’를 꿈꾼다. 이 꿈은 예술가가 되는 것 혹은 예술계에 진입하는 것에 더 가깝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폭력적인 구조 안에서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소비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예술인 패스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 중의 예술가들이 반복적으로 자신을 소비하는 동안 관객이 보는 것은 결국 예술에 대한 모순이다. 누구를 예술가라고 부르는가의 문제는 결국 무엇을 예술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문제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창작극이라고 믿었더니만 올드한” 극이라는 자기비판-자기반성적 대사는 결코 웃음을 위한 코드로만 읽히지 않는다. 이 자기비판에는 예술에 대한 인식과 예술계에 대한 인식과 냉소가 자리한다. “기계가 멈추는 것도 내 잘못이 되는” 세계, 선배에게 끊임없이 “멈추지 말고 뭐라도 할 것”을 종용받는 세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감아야 하는 세계, 그래서 잘못된 선생님이 외치는 “다시!”가 결국은 수많은 너-타자들을 ’다시‘ 양산해내는 세계가 곧 예술계라는 냉소다.

극의 말미에서 ‘그’가 되기를 포기했던 한 명의 예술가는 모두가 죽어버린 무대에 홀로 남아있다. “인정 못 해!”를 외치며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가 되어 극장에 붙은 자신의 얼굴을 본다. 인정받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던 모든 동료들이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서 인정할 수 없었던 자만이 유일하게 예술가로 인정받아 살아남은 그 아이러니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예술가는 그 살아남음을 그저 버텨낸 자의 승리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얼굴이 붙은 포스터를 떼어냄으로써 부정한다. 이런 세계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두산아트센터

#투쟁(鬪爭)_왜 투쟁하는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친 예술가들은 예술가로 인정받은 것일까? 공연은 이에 대해 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그들은 언젠가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들의 투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애초에 이것은 타당한 질문인 걸까?

어쩌면 ‹인정투쟁; 예술가편›에는 하나의 연극이 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누가, 무엇을 예술이라고 인정하는지 그 자격 조건을 묻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안에서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폭력은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 그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정투쟁; 예술가편›은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그간 예술이기에, 예술계이기에 그래도 좋다고 인정해왔던 것이 정말로 인정받아 마땅하느냐고 말이다. 만약 이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인정투쟁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글 전하림
1 투쟁의 국어사전적 정의
2 문학, 특히 시에서 주로 사용되는 수사법으로 시의 도입부와 마지막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구절을 반복하는 기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