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워진 날씨의 뮌헨에서 연습을 끝낸 바이올리니스트가 바이올린이 든 케이스를 휙 둘러맨 채 자전거에 올라타고는 석양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오늘이 지나가고 내일이 오면 그 바이올리니스트는 뮌헨의 헤르쿨레스잘이나 가슈타이크 홀, 프린츠레겐텐 극장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켤 것이다. 그러다 세계의 어딘가에서 종종 오케스트라 혹은 트리오 가온과 연주하다가 홀로 무대에 서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지나온 길만큼 성장해온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에서, 그와 함께 연주하는 이들의 깊어지는 세계에서, 그들을 만나는 청중들의 감정에서 음표들이 멎지 않는 사이클을 계속 달리고 있다.

나의 오케스트라: 독일 뮌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방송국 내 라디오 채널인 BR 클래식에 소속되어 있어요. 1949년에 창단되어서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오이겐 요훔이 초대 상임 지휘자를 맡았고, 라파엘 쿠벨릭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가 지금은 마리스 얀손스1가 지휘하고 있습니다. 명지휘자들이 계속 오케스트라에 계셔서 옛날부터 이름이 굉장히 알려져 있고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연주도 많이 하고 있어요.
저희 오케스트라는 함께 호흡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개인이 튀는 것보다는 오히려 옆 사람과 맞추고 그 사람이 앞 사람과 맞추면서 서로 하나의 곡을 만들어가는 스타일이에요. 80명이 같은 소리를 내고 같은 색깔을 내고 같이 호흡을 내면서 가기 때문에 어려울 때도 많고 연주가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잘 됐을 때 나오는 에너지는 최고예요. 쉼표가 있는데 거기서 다 같이 딱 멈춘다든지, 오케스트라에서 정말 작은 소리로 피아니시시모를 내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함께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느낄 때. 80명이 완벽하게 같이 가고 있다는 그 느낌은 정말 말로 다 못 해요.

동양인 최초, 여성 최초가 되기까지: 제2바이올린 수석
제가 오케스트라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동양인 여성이 수석으로 앉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서로 신뢰나 믿음을 많이 키워나가야 했어요. 지금은 어린 연주자들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제가 엄청 어린 편이었고요. 정식 단원이 되기 위해 음악적인 면은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부분이었지만 그 이외의 것들이 더 많은 숙제란 걸 알았죠. 처음으로 들은 말이 “여기는 독일 오케스트라니까 무조건 독어를 배워라”였어요. 첫마디가 그랬어요. 영어를 편하게 하다 보니까 독어를 하기가 쉽지 않아서 처음에는 하나도 못 했거든요. 나중에는 언어나 음악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자 노력했어요. 예전엔 생각의 폭이 하나부터 다섯까지였다면 지금은 일부터 오십까지 넓어지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노력하는 걸 보고 사람들도 일단 마음을 열더라고요. 그렇게 1년, 2년 시간이 지나니까 신뢰가 두터워지고 서로 점점 더 알아가는 게 느껴질 때마다 너무 좋아요. 특히 연주를 할 때 느껴지면 더 좋고요.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거름의 시간: 아욱스부르크 오케스트라 악장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수습 기간의 거름이 된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오케스트라를 대표하는 악장 자리에 처음 앉게 되면서 리더십을 배웠던 것 같아요. 아욱스부르크 오케스트라는 심포니부터 오페라, 발레, 뮤지컬 등 그 도시의 극장에서 공연하는 모든 음악을 다 해요. 처음 갔을 때 오페라가 세 개, 모던 발레곡이 하나에다가 다음 달에는 심포니 연주까지 있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레퍼토리를 해본 적도 없는데 매번 리허설 할 때마다 다른 곡들을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고 호흡은 가쁘고, 거의 극기 훈련 수준이었어요. 36년 동안 악장을 맡은 분이 계셨다가 오케스트라를 전문적으로 해본 적이 없는 어린 동양 여성이 악장으로 왔으니 오케스트라 분들한테도 너무 큰 변화였죠.
그런데 다행히 그런 상황을 즐겨 주셨어요. 실수를 해도 “와, 저런 실수는 우리가 꿈도 못 꾸는 실수야” 하시면서 재미있게 봐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조언해주신 게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래서 누군가 저한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아욱스부르크 오케스트라 악장을 할 건지’ 물어본다면 다시 할 것 같아요. 너무 중요했어요. 그때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연주: 말러 교향곡 제3번
저한테 기억에 남는 연주는 감정적으로 뭔가 남았거나 느껴보지 못했던 지점을 느껴본 연주예요.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연주한 것보다 조금 실수가 있었어도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걸 다 표현해낸 연주가 저한테는 좋은 연주인 것 같아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수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말러 교향곡 제3번을 연주할 때는 모든 만감이 교차했어요. 당연히 기쁘고 감사한 감정이 컸지만 너무 지치고 힘든 감정들도 섞여 있는 상태에서, 제가 음악을 하면서 음악에 치유 받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특히 말러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느껴지는 감정의 폭을 가장 넓게 표현한 작곡가 같아요. 말러의 교향곡은 하면 할수록 제 인생에서 느꼈던 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다채롭게 느껴져요. 사람으로서 감각의 경지가 최고치에 달했을 때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이올리니스트의 첫 바이올린
첫 바이올린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처음 잡았던 장난감 바이올린은 아직도 기억나요. 어머니께서 악기 하나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데 제가 피아노에 싫증을 냈거든요. 마침 사촌 언니가 바이올린을 추천했는데 제가 싫증을 낼지도 모르니까 진짜 바이올린 말고 플라스틱 바이올린을 사주셨어요. 고무랑 플라스틱으로 된 활로 동그란 버튼이 네 개 있는 바이올린을 그으면 전자음이 났어요. 사촌 언니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걸 보고 막 따라하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한테 진짜 바이올린 사달라고 계속 졸랐대요. 그때가 첫 바이올린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때가 좋은 거다 싶은: 배움의 시간들
학생일 때 누가 “그때가 좋은 거야” 그러면 아무도 이해 못 하잖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그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누가 그렇게 정기적으로 레슨해주고 챙겨주고 이래라 저래라 말해주겠어요. 한예종은 제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시간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이 배우기도 했던 시간이에요. 기본적으로 제가 음악인이 되기 위해서 기초부터 배웠던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까요. 김남윤 선생님 덕분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는데, 선생님 아래서 콩쿠르 연습도 엄청 열심히 하고 노는 것도 열심히 했어요. 아직도 서초동 캠퍼스의 과방이라든지 연습실 풍경들이 되게 생각나요. 그 후 미국 보스턴 뉴 잉글랜드 콘서바토리에 가서는 왜 내가 음악을 하는지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처음 외국에서의 유학 생활이었기에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죠. 독일에 와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배웠어요. 음악인의 삶 자체에 대해서 배웠다고 해야 하나.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는 매달 마스터클래스에서 유명한 음악인들이 오셔서 배움을 많이 얻은 것 같아요.

트리오 가온의 연주 모습 ©TRIO GAON Website by Wulf Schaeffer, Shin-Joong Kim, Michael Keating

서로 채워가며 성장하는: 트리오 가온
김태형 피아니스트와는 오랜 친구인데 옛날부터 실내악을 같이 하고 싶다는 애기를 서로 종종 했어요. 마침 제안을 하길래 지금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에서 만난 사무엘 루츠커 첼리스트를 소개하면서 실내악을 하겠다고 했죠. 각자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서로 채워가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욕심이 나고, 연주를 하려면 그래도 컬렉션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지름길이었던 게 콩쿠르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콩쿠르에 나가는 게 붐이었거든요. 당연히 수상하면 기분이 좋죠. 예종에 플랜카드 붙여주면 또 기분이 좋고.(웃음) 그런데 수상하고 나서 ‘어떤 걸 하고 싶다, 어떤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확실한 지점이 없으니까 다른 콩쿠르에 나가서 또 입상하고. 계속 그런 반복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 수상까지 하고나서야 이제 뭘 할 건지 생각해야겠다 싶었죠. 콩쿠르 수상은 많은 분들이 지금도 기억해주시는 일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줬고 오케스트라에 들어올 때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저한테는 길이 중요하게 남는 의미 있는 것이죠. 그렇게 차이콥스키가 끝나고 제 인생에 콩쿠르는 없다 했는데(웃음) 서로 오랜만에 콩쿠르 준비하면서 ‘나이 들어서 하면 안 되겠구나’ 하면서 고생을 좀 했죠. 서로 직업이 있으니까 연습을 맞추는 것도 어렵고,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니까 마음 편히 연습도 못 하겠는 거예요. 콩쿠르라는 세계에서 살았다가 다시 들어간다는 게 어렵고 너무 떨리더라고요. 다행히 입상을 하고 나니까 음반도 내고 부상 연주나 다른 연주 기회들이 생기게 됐어요. 또 실내악 연주자들을 만나다 보니까 인터랙션도 생기고 저희 연주를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만나게 됐죠. 이제는 트리오 가온이 저희 셋에게 비중이 커지고 있어서 다들 밸런스를 잘 맞추고 있어요.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잘할 수 있는 범위 내 좋은 음악을 최대한 많이 만들고 싶어요.

내 인생 그 자체: 바이올린
부모님, 가족 말고는 이렇게 제 인생에서 오랫동안 관계를 가진 존재는 바이올린 밖에 없거든요. 바이올린은 그냥 제 인생이에요. 옛날에는 제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요새는 그냥 제 인생 자체로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저와 같이 가야 하는 것이에요. 신기한 관계죠.(웃음)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아나 추마첸코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당연히 바이올린이 너의 전부여야 하고 음악이 너의 전부여야 하지만, 절대 바이올린을 네 위에 두지 마.” 그 당시에는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죠. 커리어를 더 쌓아야 하고, 뭔가를 더 이뤄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계속 생각하게 되고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이제 조금씩 이해가 가요.

뮌헨 헤르쿠레스잘 공연장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음악은 자신을 반영하기에: 궁극적인 목표
음악은 자신을 반영하는 것 같아요. 옛날에 김남윤 선생님께서 항상 “네가 생긴 대로, 네가 하는 대로 바이올린을 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음악을 하면 할수록 저를 포함해서 친구들, 다른 연주자들을 보면 진짜 사람대로 성격대로 음악도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사람,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어떤 음악이 좋은 것이라는 정의는 없지만 내가 좋은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일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나 전파력이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곳이든 어떤 자리든 누가 앉아있든 제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 뭔가를 남길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더 깊어지고 싶고,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좀 더 넓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궁극적인 목표인 것 같기도 해요.

이지혜의 스타일: 소통하는 음악
제 성격이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 좋아하는데 음악도 그래요. 연주자분들도 각자 스타일이 있잖아요. 저는 솔로를 해도, 협연을 해도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걸 좋아해요. 서로 교감하면서 제가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줄 때,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느낀 연주들이 있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영감이나 에너지 같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그만큼 또 채워져요. 지휘자에게서 배운 것을 트리오를 하면서 나누고, 트리오를 하면서 깨달은 것을 오케스트라에 가서 활용하고, 또 솔로 연주할 때는 그런 상호작용들이 원동력이 돼요. 그래서 점점 소통하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득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가 연주하는 것은 바이올린이나 음악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음악뿐 아니라 언어와 역사, 문화에 대한 지평까지 넓히며 다양한 층위를 연주하고, 제2바이올린 악장으로서 동료 연주가로서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함께 연주하며 이를 통한 자신의 변화까지 연주해내는 바이올리니스트. 그가 연주하는 음악엔 그 모두가 오롯이 담겨 있기에 결국 음악은 음악이면서 모든 것이면서도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그 자체가 된다.

글 주은영 | 영상 전보름
1 인터뷰 이후 매거진이 나오기 전인 11월 30일 故마리스 얀손스 지휘자가 타계했다. 11월 8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고인의 마지막 연주에 함께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는 “연주 내내 다리 휘청였지만 마지막 음을 놓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출처: 김호정,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 타계 보도, 중앙일보, 2019.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