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단면을 잘라본다. 물질 만능주의와 엘리트주의,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세대가 숨기고 있던 거짓의 오물이 우리 눈앞에 쏟아졌다.1 우리는 그들이 감추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촛불을 들었고, 드디어 빛이 우리 곁을 채울 것이라 생각했다. 최근 미국에서 딥페이크 기술2을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실재가 환상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디지털 알고리즘은 우리를 더욱 편협한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보는 시간조차 부족한 공간과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나간 폭력적인 메시지를 동조하는 공간이 혼재된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움켜쥔 진실은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이다. 또다시 냉소와 혐오, 우울과 몽상의 시대에 서 있는 광장을 목도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꿈을 품고 있던 디지털 청원은 난잡한 공론 영역으로 변해버리고, 사실을 통해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외침은 자극적인 사건과 보도로 가려진다. 광장의 불빛에 어둠이 서리기 시작한다.
해방 전·후와 도시 복구 과정까지 20세기 한국에는 광장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거리를 광장으로 만드는 마술은 ‘광장’이라는 이름을 단 서울광장,광화문광장, 청계천광장을 만들게 된 계기를 이끌어낸다.3 그래서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전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는 거리의 역사에 있었던 마음의광장을 불러보고자 한다. 최근 세월호 추모 집회와 탄핵 집회, 광화문과 서초동 집회를 통해 광장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고자 하는 듯도 보인다. ‘쿵!’4 우리의 일상에 불시착한 사건들을 되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광장을 뜻하는 plaza가 open space를 뜻하는 라틴어 platea에서 유래되었듯 광장은 길의 연속된 공간이면서 길의 넓혀진 공간이다. 도시의 공공 공간인 광장에서 사람들의 자유로운 만남이 가능해지면서, 광장은 토론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자발적인 정치적 참여가 일어나는 장소로 변화한다.5 오늘날 광장은 공공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한 극장의 형태로 확장되면서, 원형 극장을 연상시키는 타원형이나 기하학적인 도형이 주를 이룬다. 농업이 발달했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풍작을 기원하는 보름달을 표현하는 원형의 전통 놀이뿐만 아니라 관객과 배우의 거리를 좁혀 열린 호흡을 추구하는 마당극이 원형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써 이전 광장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외적인 의미와 함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사적이거나 공적인 공간이 부재하고 이념에 사로잡힌 한반도에서 진정한 광장에 대한 내적인 의미를 묻고 있는 소설이다. 이러한 소설을 모티브로 1900년부터 2019년까지의 시간을 3부로 나눈 이번 전시는 한국 광장의 원형을 묻고 있었다. 성운처럼 존재했던 시간의 이미지가 기억을 품은 채, 역사의 광장에 떠올라 있었다.
김구림, ‹1/24초의 의미›
1938년에 완공된 덕수궁관의 석조 건물 안에서 1900년대 초반의 작품을 보는 감상은 남다르다. 전시는 연대기적인 흐름에 따라 의로운 인물 義, 학문과 글 藝, 백성 衆, 조선의 마음 心으로 섹션이 나뉘어 있다. 먼저 제국의 위협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로 굴복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사회적 의지를 감지할 수 있다.6 작가 김용준의 수필 ‹근원수필›의 한 부분인 ‘예술에 대한 소감’에서 튼튼한 기술과 유연한 인격의 합일에 곧 미의 영혼이 서식할 수 있다고 말하듯, 작품에서 느껴지는 기개와 화폭에 펼쳐지는 능숙한 기술이 전시장을 채운다. 또한 ‹무제›라는 제목을 통해 국가의 존폐가 나의 생명과 직결되는 사회 안에서 이름 없는 의병의 희생을 기리는 꼭두의 얼굴을 교차시킨다.
인쇄술의 발달은 출판물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고, 다수의 정신을 계몽시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된다. 그들이 쓴 글과 그림이 수없이 불타고 찢기더라도, 그들은 단 하나의 면綿이 있다면 검은 먹墨으로 정신을 누르고 새기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면으로 완성되려 했던 국가는 정치적 선으로 갈려 두 개의 광장으로 나뉜다.
이응노, ‹군상›
과천관은 흐드러지게 핀 단풍에 둘러싸인 풍경과는 달리 한국 현대사의 과거가 무겁게 다가온다. 장대한 공간 가운데 최인훈의 ‹광장›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여섯 가지의 키워드로 이루어진 전시를 마주하게 된다. 총성 소리와 함께 무용수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죽음과 소생을 통해 6·25전쟁을 현실로 소환시키는 ‹열 번의 총성›을시작으로 ‹달 두 개›로 이어지는 전시는 연대기적인 시간으로 배치된 전시보다는 다양한 광장의 역사를 교차하고자 하는 기획으로 보인다. 그중 ‹1/24초의 의미›에서 1초가량 짧은 시간 동안의 약 300개의 불분명한 이미지는 전쟁 이후 1960년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설명하면서, 서울 도시의 급속한 개발을 통해 점점 파편화되고 파괴되는 일상을 은유한다. 작가의 일상이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명준의 삶과 겹쳐 보인다. 부채의 사북 자리 위에 서 있던 정도가 온전히 자신의 광장이라고 이야기한 이명준의 말이 결국 나 자신의 광장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나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는 ‹군상›의 그림자처럼 뒤엉키고, ‹선으로부터› 시작된 각자의 선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일상의 미술이 현실의 거울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밀레니엄을 지난 사람들에게 IMF의 상흔은 그들의 일상에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상흔은 물질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게 유지된다. ‹바닥›의 수만 개의 인물상이 팔을 뻗쳐 땅에서 유리판을 지탱한다. 유리천장 위에 올라서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동시에 우리는 한국 사회의 위태로운 시스템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실의 기억 속에서 ‹보이스리스›, ‹둘이서보았던 눈›을 통해 외상은 아물고, 기억은 뚜렷하게, 슬픔은 공감과 애도를 보내려는 작가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여섯 개의 하이쿠 텍스트를 수화로 치환해 감정의 여백을 담아내고자 한 작가는 소리 없는 이들에게 음악-소리로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자 한다. 7
서도호, ‹바닥›
요코미조 시즈카, ‹타인›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와, 광화문 광장과 가까이 있는 서울관의 광장을 만나본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일곱 명 소설가의 이야기가 담긴 ‹광장›은 전시실 앞을 휴게 공간으로 만든 ‹바› 옆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주변에 존재했던 광장이 우리의 일상 속에 어떻게 침투해 있고, 현재의 터전에서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묻고 대답한다. ‹한평조차› 되지 않는 집은미얀마에서 무국적자로 취급받는 소수민족인 로힝야 난민촌을 작가가 방문한 뒤, 국가라는 보호 없이 위태롭게 떠 있는 그들의 상황을 한국의 공간에 세워보고자 한다. 집이라는 공간을 일정한 관계의 거리를 위한 장치로 활용하는 ‹Stranger›는 일정한 거리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반대로 익명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언어폭력을 담아낸 ‹이제 쇼를 끝낼 때가 되었어›는 ‹썰매›와 함께 악플러와 키보드 워리어의 가해자를 열린 공간에 꺼내어 불편함을 극대화한다.
‹마음›은 미술관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을 모아 디지털로 변환시킨다.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인공지능으로 분석하여 열다섯 개의 오션 드럼 위로 흘러가는 구슬을 통해 바닷소리를 만들어낸다. 촛불 광장에 모인 다양한 표정이 물결을 만들어내고, 물결이 만나 파도를 만들어낸 경험을 떠올린다. 하나의 구슬이 빠졌다 해서 울림이 달라지는 걸 알아차릴 수 없지만 광장에서 서로 부딪혀 일으킨 파장을 너와 나는 알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신승백・김용훈, ‹마음›
마이클 S. 최는 ‘공유된 지식’을 가진 다수가 한 공간에모여야 사람이 모여들고 집회가 열린다고 이야기한다.8 그 공유된 지식은 다른 사람과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메타 지식’이어야만 성립된다. 결국 서로가 가진 국가에 대한지식이 융합되고 재조립되어야 우리는 공유된 광장으로 모이게 된다. 너와 나의 메시지가 하나의 선이 되고, 광장의 면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광장을 지도에 검색해본다. 지형에 따라 그려진 기하학적인 도형과 화살표로 가리키고 있는 광장은 걸어본 사람만이 그곳의 형태를 알 수 있다. 도시에 존재하는 광장이 텅 빈 공간으로만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 공백의 광장에 다양한 생각의 화살표가 그려지길 기대한다. 영화 ‹초행›에서 지형과 수현은 삼척에서 돌아와 광화문 집회 행진에 참여한다. 어그러질 것 같던 관계가 단단해지고 그들의 메시지가 공유되자 그들은 방향에 상관없이 광화문 집회를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봐.또 여기로 가니까, 다 반대로 가잖아.”
반대의 길, 지독한 외로움과 싸우는 또 다른 누군가의 메시지가 있다. 촛불 집회의 누군가로 존재했을 사람들, 59,647명 중 964명만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은 난민,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임금을 받는 외국인 노동자, 소수자는 정치와 종교의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다수로 인해 예외로 취급된다. 우리는 항상 망각되고 왜곡되고 비난받을 위기에 처해있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역사의 거처는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는 증언과 증인이 필요하다.9 가짜 뉴스와 소셜 미디어의 필터 버블(filter bubble)10이 우리의 알고리즘을 협소화시키더라도 우리는 진실의 선을 끊임없이 직조해내어 후대에 전할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이루어낸 기억에는 여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늘 결과를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서로 대면하고 있고 모두가 깨어 있다면, 이 사실은 공유 지식이 되고 성공적인 조정이 가능하다. 우리는 다시 광장에 모인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찾아내고 얘기하지않은 것의 않은 것의 않은 것을 찾읍시다라고 말하며 얘기를 시작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