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쓰는 작업실의 공간을 둘러보라. 얼마큼의 빈구석이 보이는가? 작업할 공간은 충분한가? 작품을 잘 보관할 수 있는가? 지금 나는 공백을 공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공간과 미술 작품 사이에 관계가 삐거덕거리며 나타난 신경증인데, 이것은 창작의 결과인 작품이 창작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모순을 감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미술 생산자인 나는 텅 빈 작업실에서 창작하고 작품이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 과정에서 빈 곳은 창조적 생산물로 채워지고, 전시가 끝난 후에는 앞날을 위한 저장고가 된다. 그러나 작업실과 작품이 맺고 있던 긍정적 관계는 예전만 못하다.2 오히려 창작 의욕을 분출할수록 작품은 점점 공간을 먹고 그에 따라 내 몸과 정신을 제한한다. 작품을 생산해야 생존한다는 옛날식 믿음과 공간의 수용 능력을 초과한 물리적 현실이 부딪친다. 말하자면 작품은 창작을 방해하는 악성 재고로 돌변한다. 그렇기에 빈구석을 만드는 것은 창작만큼 중요해졌다. 이 같은 현실은 미술계의 연례행사인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3에서도 보인다.

이주요, ‹Love your Depot-team depot›

그중 이주요의 ‹Love your Depot› 섹션은 작가들이 겪고 있는 작품 제작과 보존에 대한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들어서는 계단 입구에서 상영되는 영상은 전시 이후 보관될 수 없는 작품들이 파쇄되는 광경과 “어떻게 작품을 관리하느냐?”는 젊은 작가의 질문을 통해 전시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알린다. 그리고 작가는 이 서글픈 창작환경에 대한 대안으로서 전시를 구현한다. 전시장에는 크게 작품창고, 랩lab, 그리고 팀 디포team depot로 불리는 콘텐츠 연구소로 구성된다. 이곳에는 이주요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이 보관되고, 전시 기간 동안 전시장에 상주하는 참여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되고 기록된다. 동시에 현장에서 생성된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송출할 수 있는 플랫폼이 운영되면서 살아있는 커뮤니케이션 허브가 구축된다. 전시장은 작품보관 창고이자 다양한 창작이 가능한 새로운 형태의 대안 공간으로 거듭난다.4

‹Love your depot›은 전작 ‹십 년만 부탁해›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십 년만 부탁해›는 작가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십 년 동안 본인의 작품을 보관할 곳, 위탁할 사람을 찾아 맡기고 다시 작품을 모아 사물로서의 작품이 지닌 시간의 흔적과 위탁자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을 새롭게 재고하는 프로젝트였다. 유랑하는 예술가인 그에게 작품의 보관 문제는 당연히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고 그 대안적 실천은 멋졌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펼쳐진 일련의 제안들은 날 때부터 어떤 한계를 가진다.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특수 공공기관과 이름난 예술가, 민간자본의 지원이 결합하여야 일어날 수 있는 이례적 방안이며,5 그 작가적 상상력은 ‹올해의 작가상›이라는 경쟁 관계 속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적 대안으로 변질될 수 있다.6 또한 거기에 볼거리 미술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거든다. 일반 관람객은 우아한 테마파크로서 미술관 속 전시장을 근사한 셀피의 배경으로 또는 문화예술 시설의 이벤트가 열리는 투어의 장소로 소비하고 업로드용 인증샷이 퍼진다. 그 덕분에 작품은 장기간 보존될 기회를 얻는다. 결국 보통의 형편과는 거리가 있고, 내가 아는 미술인의 처지는 당면한 사태를 유지하기도 급급하다.


사례 1
대형 작업이라 자신의 작업실에는 더 보관할 곳이 없어 일 년 이상 장기전시를 조건으로 지방 전시장에 보냈다는 중견 미술인

사례 2
자신이 지나치게 그림을 많이 그린 것인지 몰라도 작업실의 한계를 초과하여 작업 자체를 할 수 없어, 삼 년마다 자신의 그림을 군고구마 구이용 불쏘시개로 사용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 또 다른 중견 미술인

사례 3
졸업한 지 오래되지 않아 일단 학교 작업실에 작품을 짱 박아두고 자신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간다는 신진 미술인

사례 4
한 달 수입과 대출금의 명세를 내밀며 상대적 불우함을 호소하는 미술인들 간의 불행 경쟁으로서의 공간지원금 심사과정

사례 5
작품을 비우고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하여 인원별 월세를 줄인다는 공동 작업실을 사용하는 미술인


머문 공간에 빈구석을 만들려는 시도는 모두의 문제가 됐다. 과거나 지금이나 창작과 보관을 위한 지출은 지대 상승률과 밀접하게 상승했다. 최근 5년 동안의 지대 상승률7이 보여주듯 부동산 상승세는 꾸준했고, 그동안 젠트리피케이션이란 경제 용어는 일상어가 됐으며 값싼 곳을 찾아 헤맨 노력도 옷에 물감 묻힌 애들이 몰린다는 소문에 다시 작업실 유목민으로 되돌아왔다. 팔려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치던 이들도 간절히 팔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서기에 충분했다. 이 과정에서 외상적 징후가 나타난다. 작품의 굿즈-화가 그것이다. 이는 근 몇 년 사이에 활발히 나타난 현상으로 굿즈-전시8 혹은 작품을 유명 백화점 등에서 진열하여 판매하는 것을 일컫는다. 작품은 상품 진열과 작품 전시 사이를 오가며 기존 미술시장의 유통 구조를 익살스럽게 흉내 낸 것처럼 보이지만 참여하는 작가들의 속내는 제각각이었다.9 그럼에도 그 경향성은 외상적 공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주요, ‹Love your Depot-그린 패그 방송차 depot tv›

하나, 작품을 공간에서 비워내기 위한 경량화 과정10이다. 작품의 물리적 실체의 보존비용 증가로 인해 작품은 활동을 제약하는 버거운 짐이 됐다. 이것은 버릴 수도, 보관할 수도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의 작품을 보존하는 새로운 경향이다. 즉 파기된 작품은 디지털 이미지가 대신하고 디지털 인쇄술로 인해 어디든 프린트되고 새로운 형체로 변형 가능해졌다. 이제 작품의 보존은 JPG 안에 있고 그 덕택에 작품은 하드디스크 혹은 플래시 메모리, 웹 저장소든 지우개, 손수건, 텀블러, 자석, 병따개든 어쨌든 보존 가능해진다. 둘, 이 순수 미술의 문화상품은 작품의 물리적 실체가 사라져 감에 따라 그 잔존감이라도 회복하려는 정서적 반응이다.

분명 작업자들도 알 것이다. 제 것이 진열장에 있는 대상이 된다는 것. 자신의 예술적 의지와 실천이 한낱 미적 대상으로 전환됨에 따라 그것이 가졌던 믿음은 아이러니해지고 인위적인 것으로 변형된다는 것.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소멸을 막는 애매한 소원의 성취로서 굿즈가 충분히 작동될 수 있다는 것에 내기를 거는 것 같다.

기존의 문화상품은 작품을 둘러싼 부스러기였다면 이제 작품의 물리적 형상은 문화상품의 다양한 외피 자체가 돼 간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껍데기는 순수하게 외재적 요소로 뽑혀 나간다. 과거의 예술 활동이 경제적 수익으로 환원되지 못해 생긴 괴리였다면 굿즈 예술은 그 자체로 생산 활동의 목적이 되고 파편화된 형태로 분할된다. 작품의 상징적 효력은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어진다.

공백을 둘러싼 현실에는 반발과 끌림이 뒤섞여있다. 그래도 선명해지는 것은 창작환경을 유지하기 위한 비움과 보존의 문제가 작품을 먹어 치우고 있다는 사실과 작품보다는 공백이 더 큰 돈이 된다는 사실. 그것이 미술 생태계의 리얼리즘이다.

글 신기철
1 마크 피셔가 쓰고 박진철이 번역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영감을 받았다.
2 창작의 터전으로서의 작업실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작품이 생산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으로서의 작업실이 깨졌다는 것이다.
3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는 홍영인, 박혜수,이주요, 김아영의 전시가 선보이고 있다.
4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이주요 전시 설명 중에서
5 작가의 문제의식에 대한 제스처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올해의 작가›전시 모두 어떤 주제이든 스펙터클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이 방식이 작가의 진실한 실천적 태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지 의구심이 있다.
6 이주요 작가의 ‘2019 올해의 작가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이 글은 수상 전 작성한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이러한 사실을 각주에 남긴다.
7 서울시 표준공시지가 상승률은 2015년부터 2019년 동안 4.3%, 4.09%, 5.46%, 6.89%, 14.10% 전체 평균 약 7% 폭으로 상승했다. 개별공시지가로 환산하면 더 큰 폭을 예상할 수 있다. 통계는 국토교통부 참고.
8 ‹언리미티드에디션› 2009-2017, ‹굿-즈전› 2015,‹굿즈모아마트› 2019
9 새로운 수입원으로서의 가능성, 팬덤 문화와 창의적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소비문화가 얽힌 현상, 수입에 보탬보다는 기존 세대와 선을 긋기 위한 태도의 반영 등 다양하다.
10 여기서 경량화는 작품의 이동, 설치, 저장의 용이함이 포함된 의미다. 공백의 부족으로 다 언급할 수 없지만 공간의 부족은 부피를 최소화하고 휴대성을 높인 작품의 물리적 경향으로도 나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