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한 신인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시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전시도 보지 못한 채 이내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전시장의 문이 잠겨있고 그 위에는 ‘곧 돌아오겠습니다(Be Right Back)’라고 써진 쪽지가 붙어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작가가 돌아오거나 전시장의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도 전시 기간 내내 이 문이 열린 일은 없습니다. 문이 잠겨있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전시장, 그리고 그 위에 붙은 쪽지가 마우리지오 카텔란이라는 작가의 첫 개인전이자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예술 작품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아무것도 없음’, ‘진입 불가능’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 작품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더 재미있는 점은 이 전시로 인해 가구 디자이너였던 마우리지오 카텔란이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데뷔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는 미술계나 전시 시스템을 풍자하거나 권위적인 인물을 허물어뜨리는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어떤 평론가에게는 뒤샹-후기의 많은 작가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요. 때때로 우리는 없음이 있음을, 비움이 채움을 이기는 상황들을 목격하곤 합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 ‘여백의 미’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예술에서 이를 특별히 귀하게 여겼습니다. 현대의 예술에서 이 여백은 어떻게 활용되어 왔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요?

존 케이지, ‹4’33” (In Proportional Notation)›, 1952/53 ©2013 John Cage Trust/The Museum of Modern Art

예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해프닝, 존 케이지의 ‹4’33”›(1952)는 모두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존 케이지는 열화와 같은 박수로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콘서트홀에 등장해 4분 33초 동안 아무 음악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악보에 적힌 악상은 ‘조용히’가 유일했다고 하지요. 멋진 음악을 기대했던 청중들은 처음에는 당황하고, 나중에는 서로 상의하다가 마지막에는 항의하거나 연주장을 걸어 나갔다고 합니다. 존 케이지가 계획한 대로 4분 33초의 시간이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상황에서만 나는 우연한 소리들로 채워진 것이지요. 누보 레알리즘 작가이자 네오-다다 작가인 이브 클랭은 ‘텅 빈 전시회(1958)’를 열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시장 안을 온통 흰색으로 칠하고 안에 어떠한 작품도 놓지 않았다고 해요. 이에 아르망은 전시장을 쓰레기로 꽉 채우고 ‘가득 찬 전시회’로 화답했다고 하지만, 그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기로 해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완벽한 작품을 관객에게 보여줄 것인지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작가는 관객이 어떻게 느끼고 행동하는지가 작품 그 자체가 되길 원했습니다. 이 작가들을 수식하는 ‘네오-다다’의 네오와 ‘누보-레알리즘’의 누보, 아방가르드는 모두 ‘새로움’을 뜻하는 단어랍니다. 이들은 예술의 여백에 관객을 끌어들임으로써 예술이 관객으로 인해 더 넓고 깊은 세상으로 날아가기를 원했던 것이죠.

‘여백의 미’ 하면 한국의 단색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아흔이 넘은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한 기법을 토대로 만들어낸 오묘한 색상, 수없이 반복되며 같은 듯 완전히 다른 시공을 넘나드는 듯하는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는 엄격하게 모든 언어를 거절하는 작품입니다. 캔버스 위를 수천, 수만 번 긋는 시간의 더께가 얹어 만들어진 대형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작품 활동이 종교인의 고행과도 같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선명하고 현대적인 색을, 오묘하고 이중적인 색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형태는 언제나 선으로 캔버스의 면을 채운다는 점이 작품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선명히 여백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모든 작품의 제목은 작가가 자신만의 단색화 기법을 터득한 작가 중기 이후 ‹묘법描法›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저는 이 제목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이상의 부수적인 설명이나 새로운 명명은 필요 없다’, ‘언어, 국적, 연도는 의미가 없으며 그 여백이 이 작품들이 존재하는 이유’라고요.

박서보, ‹Ecriture(描法)No.000105›, 2000 ©Courtesy Galerie Perrotin

한 가지 더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인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Le Jetée1› (1962)가 그것인데요. 러닝타임이 28분 남짓한 흑백 단편영화이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단 한 장면만을 빼고는 모두 사진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상을 촬영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도 아니었는데 마치 사진만이 가능했던 시대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진들을 붙여 만든 것이지요. 유일하게 영상을 사용한 장면도 움직임이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정적인 장면이기에 관객이 놓치기 쉽답니다. 본인이 세계를 여행하며 녹화한 영상과 소리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만들었던, 그래서 영상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크리스 마커가 유일한 본인의 픽션 영화에는 흑백의 사진을 입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심스럽게 그것이 의도적인 여백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간의 눈은 한시도 멈추지 않습니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영상이지요.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 파리에서 실험체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와 정적인 흑백 사진들에서 오는 묘한 균형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 사진들은 시공의 축을 넘나들며 조각난 시간을 두 번, 세 번 사는 주인공의 과잉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여백입니다. 열림과 닫힘, 역동과 정지, 안과 밖처럼 여백도 과잉과 한 쌍을 이루는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죠. 아무튼 이 영화는 잠깐의 짬을 내어서라도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두 눈 크게 뜨고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영상을 사용한 장면을 찾아보는 기쁨도 누려 보시고요.

2019년에도 어느새 끝이 왔습니다. 9라는 숫자는 언제나 넘치기 직전, 1의 부족함과 10의 과잉 사이의 아슬아슬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9년이 그렇고, 2009년이 그랬고, 세기말의 혼란이 가득했던 1999년에도 그랬겠지요. 모든 것이 과잉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예술가로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예술에서의 여백이란 언제나 가득 찬 것들, 그리하여 권력을 가진 것들에 대한 해체의 시도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둘러본 여백은 모두 과거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것을 갈망한 작가들이 행동한 결과로서 남아 있습니다. 예술사조의 흐름을 보면, 언제나 특정 사조가 권력 혹은 정도를 차지했을 때 그에 대한 저항으로 다음 사조가 탄생하는 것처럼요. 모든 것이 냄비 안에서 넘칠 듯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여백의 미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차를 한 잔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찻잔 안의 차를 비워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눈앞의 채움에 집착하며 그것만을 위해 살아갈 필요도 없겠지요. 일찍이 불교에서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고 노래했으니 말입니다.

크리스 마커, ‹환송대Le Jetée›, 1962 ©Argos Films

졸업을 앞둔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셀 수 있는 창작을 했고요. 어딘가에서는 배가 침몰했고, 절망을 배웠고, 몇 년 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등산을 종종 하고 차를 마시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가끔, 제 안에 크게 텅 비어있는 구멍이 보이곤 합니다. 그 구멍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고 그리하여 분명히 제 세계에 존재했던 것들을 삼켜 버리기 일쑤였어요. 마음속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것을 죽어라 찾다가, 찾다가, 결국 안 보일 때에야 구멍이 삼켜 버렸구나 하고 터덜터덜 돌아 나오는 식이었지요. 점점이 커지던 구멍이 제 몸뚱이보다 커졌다 싶을 때 저는 중력의 영향에서 점점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나요? 거리를 걸을 때 통, 하고 발끝을 차면 몸이 살짝 뜨는 정도였죠. 아무리 탐이 나도 풍선을 잡지 않도록 주의했어요. 풍선을 잡는 순간 저조차 날아갈 수 있고, 적어도 한겨울의 바닷물만큼 추운 공허 속에서 새들과 같이 날고 싶진 않았거든요. 아마 그 구멍이 더 커졌다면 결국 저는 중력의 끈을 끊고 혼자 멀리멀리 우주로 날아갔을 겁니다. 그 사이에도 꽃은 피고, 또 졌고, 얼음이 녹고, 수많은 생명을 먹어 치우며 살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수치를, 욕망을, 불같이 타오르는 분노를, 다시 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사랑을, 남 대신 화를 낼 수 있는 힘인 결의를 배웠지요. 감정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인간은 자라고, 더 배울 감정이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늙음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부터 몸 안의 공허는 커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안에 있을 뿐이지요. 둥근 모양을 한, 얌전한 검은색 어둠으로요. 저보다 먼저 태어나 먼저 구멍과 만난 김연수 작가는 ‹청춘의 문장들›(2004)에서 이렇게 노래했어요.

“내 마음 한 가운데는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들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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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두의 공허를 위해 건배하고 싶습니다.

글 김수림
1 한국에서는 ‘방파제’나 ‘활주로’로 번역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