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른사람

고등학생인 나와 두 살 터울인 누나는 종종 지하철에서 만나 집으로 갔다. 어떤 날 누나는 3번 출구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 멈췄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붉은 얼굴, 슬픈 눈으로 누나를 쳐다보던 남자. 일주일 전 나는 누나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먼저 집에 들어가.” “괜찮겠어?”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와 함께 걸어가던 뒷모습을 두고 나는 집에 들어왔다. 후회는 불안과 함께 밀려왔다.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둠 속을 떠돌아다니던 그림자 같은 단어들. 늦은 밤, 남자와 술의 리에종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폭력을 드러낸다. 모든 것은 흐려졌다. 보이지 않는 씨앗은 우리 주변에 뿌려진 채 무수한 폭력으로 자라나 여성을 향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2014년 29,863건으로 2010년 대비 9,924건 증가했으며 2005년 이후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전체 성폭력 피해자의 95.2%는 여성으로 이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다. 흉악 범죄의 경우 여성 피해자는 2014년 28,920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89.1%를 차지한다.1) 통계상으로도 여성의 불안은 이유를 품고 있다. 강화길 작가는 일상 속 여성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관해 파고드는 작가이다. 작가의 장편소설 <다른 사람>은 남성 가해자의 권력으로 여성 피해자에게 생긴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을 다룬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마치 뇌가 쪼개어진 듯 찢어진 정신을 느끼게 한다. 한 땀씩 꿰매어보지만 잘 맞지 않고 있다.2)
주인공 진아는 남자친구이자 회사 상사인 이진섭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고소한 뒤, 그녀를 둘러싼 일들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재판 끝에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은 이후에도 이진섭의 협박이 계속되자 진아는 인터넷에 글을 올려 공론화 한다. 그녀를 향한 대중의 옹호는 직장 동료들이 가세하면서 반전된다. 자신을 향한 비난의 이유를 찾던 진아는 트위터에서 ‘진공청소기’라는 단어를 보고 숨이 막힌다. 대학생 동창이었던 하유리를 부르는 혐오의 단어이자 그녀의 죽음 뒤에도 끊임없이 따라붙었던 별명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다. 진아는 글을 올린 사람을 떠올린다. 자신의 오랜 동창이면서 열등감과 증오의 감정을 공유한 수진이다. 진아는 고향 안진으로 내려가 수진을 만난다. 그녀는 이진섭에게 못했던 말을 수진에게 하려 한다. 하지만 수진을 향한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와 이진섭을 향한 “나를 때리지 마”는 다르다. 전자는 ‘너에게’가 빠진 결백의 문장, 후자는 ‘너는’이 빠진 단언이자 명령이다. 하지만 진아는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채 수진에게 모두 쏟아낸다. 관계는 뒤틀리고 해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진아에게는 자신의 결백보다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유리와 자신에게 향한 ‘진공청소기’라는 단어를 지워내기 위해 유리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을 밝혀야 했다. 그리고 수진은 진아를 만나고 난 뒤, 자신이 억압하고 숨겨왔던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강화길, <다른 사람>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을 사건의 무대 위에 올려놓기보다 각각의 기억을 통해 인과관계를 엮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진아와 수진은 그들의 불가피한 어리석음으로 우정이 나빠졌던 시작점을 떠올린다. 또 다른 권력으로 인해 진아가 수진의 손을 놓아버린 사건이었다.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 숱하게 했던 어리석은 선택들과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학생 때 하유리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인물이 밝혀지면서, 그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상처의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악의 수렴점으로 갈수록 진아는 유리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던 구조 신호들을 떠올린다. 그 신호들은 “서로가 외면했던 목소리의 냄새”이면서 이미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지만 숱하게 부정했던 말들이었다. 사실 그 냄새는 잊어서 안 되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진아는 유리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 했던 근원을 찾아내자 수진에게 다가가 털어놓는다. 자신이 잃어버렸던 목소리는 유리의 목소리이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우리의 목소리이자 기억이었다. 그 기억은 자신을 오랫동안 억압해왔던 이유 없는 자기 혐오였다. 자신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책감은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있던 전 남자친구인 동희의 한마디로 규정된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너 피해의식 있어.” 누군가로 인해 생긴 자기 혐오의 인과 관계는 자신이 아닌 폭력을 정당화하는 남자의 입에서 빌려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애초부터 폭력의 원인은 진아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유리를 향했던 수많은 소문과 별명의 원인도 그녀에게 있지 않았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을 뿐이다.
이제 그녀는 다른 언어로 수진 앞에 선다. 그들은 어렸을 적 거대한 논밭에서 보았던 주홍빛 노을을 떠올린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었던 시절,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죄책감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어리석은 이야기는 그렇게 서로를 만나 화해한다. 우리를 떼어버리려 했던 사회의 폭력 속에서 그들은 굳게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진아는 이진섭에게 그의 언어를 고스란히 돌려주면서, 그들의 언어를 지운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마.” 레베카 솔닛은 말한다. “우리는 가해자가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가해자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야 하는 것들의 출발점에 서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원한다. 대답할 사람은 바로 우리니까. “이제는 네 차례다.”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유리의 리포트 제목은 ‘다른 사람’이다. 당신이 서로를 구분 짓던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스스로 당신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가 그녀에게 생겼다. 다른 사람이라고 자신을 이해하고 완성한 리포트는 폭력을 향한 폭로이자 자기 자신을 향한 이야기이다. 끊임없이 죄책감을 심어줬던 당신은, 끊임없이 다르다고 규정짓고 폭력을 행사하던 언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이제 나의 언어만이 남았다. 다르다던 나는 다르다.

글 | 송원재
1)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극 <보이 겟츠 걸> 마정화 드라마터그 글 인용
2) 드라마 <그레이스>에 나온 에밀리 디킨슨의 문장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