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리정원

<유리정원>에는 내가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모두 등장한다. 우선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피 채널에서 방영되는 대자연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싱싱’이나 ‘파릇파릇’과 같은 의태어들이 지시하는 초록색의 미감은 눈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마음 편히 대자연의 스펙터클을 즐길 수 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연인이 되는 이야기도 좋아한다. 다루는 제재가 무엇이든 간에 SF라는 장르도 좋아한다. 또한 차분하고 느린 전개에도 반감이 없고 오히려 느린 영화를 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예고편은 앞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잘 섞어놓은 힐링물처럼 보였고, 나름의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스크린을 마주하고 난 뒤 10분이 지나자마자 <유리정원>은 그와는 다른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예상했던 소박한 힐링물이 아니라 신수원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야심을 가진 영화였다. 소박한 힐링을 기대했던 나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2시간 동안극장에 있는 관객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영화를 보았다.
영화 <유리정원>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데뷔작인 <레인보우>를 보고 신수원 감독의 GV를 들었던 적이 있다. 신수원 감독은 교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박차고 나와서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그러한 도전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인지 알지 못했다. 6년이 지난 지금의 내게 신수원 감독의 도전은 새삼 대단하게 보인다. <레인보우>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밑바닥에 깔고 시작하는 영화다. 신수원과 마찬가지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필생(畢生)의 소원인 영화를 찍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인디 록 밴드가 등장하는 영화를 준비하다가 제작사의 반대로 인해 영화는 엎어진다. 여기에서 또 다른 주요인물은 주인공의 아들인데, 중학생인 그는 밴드를 만들고 싶어 한다. 나는 영화를 찍는 엄마와 음악을 하는 아들의 꿈이 공연장에서 무지개를 그리며 만난다는 내용으로 <레인보우>를 기억하고 있다.

6년 동안 <레인보우>와 신수원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유리정원>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유리정원>은 <레인보우>의 세계관을 문예영화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킨 작품이었다. <유리정원>의 주인공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만드는 재연(문근영)과 첫 소설의 실패로 슬럼프를 겪던 무명작가 지훈(김태훈)이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짧기에 간추려 말하자면, 지훈은 재연에 집착하고 재연은 초록색 자연에 집착한다. 때문에 영화의 핵심 소재는 초록색 자연이다.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나뭇잎을 보고 있노라면 <유리정원>이 목표로 하는 미장센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자연을 보여 주기보다는 문예적 요소로 삼는 편을 선택한다. 즉 <유리정원>은 자연을 삶에 대한 은유로 간주한다.

이는 <레인보우>에서도 감지할 수 있던 요소로, 신수원 개인의 경험이 반영된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특히 <유리정원>에서 누차 반복하는 관료제와 삶 사이의 경쟁은 아스팔트와 초록빛 자연의 경쟁으로 재현된다. 이를테면 재연은 믿었던 전임 교수와 후배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긴다. 지훈은 선배 소설가와 대판 싸우고 출판사에서 버림받는다. <레인보우>에서도 영화사나 학교와 같은 조직은 주인공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신수원은 조직과 개인을 언제나 이항 대립의 관계 속에 놓고, 개인의 삶을 강조하는 데 힘을 쏟는다. 다시 말하자면 꿈과 현실 간의 대립을 다룬다. <레인보우>에서 주인공이 영화감독의 꿈을 맹렬히 좇았듯 <유리정원>에서 재연은 자신의 꿈인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맹신하다시피 하고, 지훈은 이런 재연에 집착하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 이처럼 신수원의 세계관에서 꿈과 현실, 자연과 삶과 같은 대립은 매우 중요한데 <유리정원>에서는 이 두 요소들이 때때로 뒤섞인다. 재연의 꿈은 지훈의 꿈으로 옮아가고, 재연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러한 점들이 <레인보우>로부터 변화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레인보우>에서도 감지할 수 있던 요소로, 신수원 개인의 경험이 반영된 세계관으로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특히 <유리정원>에서 누차 반복하는 관료제와 삶 사이의 경쟁은 아스팔트와 초록빛 자연의 경쟁으로 재현된다. 이를테면 재연은 믿었던 전임 교수와 후배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빼앗긴다. 지훈은 선배 소설가와 대판 싸우고 출판사에서 버림받는다. <레인보우>에서도 영화사나 학교와 같은 조직은 주인공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신수원은 조직과 개인을 언제나 이항 대립의 관계 속에 놓고, 개인의 삶을 강조하는 데 힘을 쏟는다. 다시 말하자면 꿈과 현실 간의 대립을 다룬다. <레인보우>에서 주인공이 영화감독의 꿈을 맹렬히 좇았듯 <유리정원>에서 재연은 자신의 꿈인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맹신하다시피 하고, 지훈은 이런 재연에 집착하며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 이처럼 신수원의 세계관에서 꿈과 현실, 자연과 삶과 같은 대립은 매우 중요한데 <유리정원>에서는 이 두 요소들이 때때로 뒤섞인다. 재연의 꿈은 지훈의 꿈으로 옮아가고, 재연은 결국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러한 점들이 <레인보우>로부터 변화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정원>

이런 이항 대립의 관계가 문예영화적이라는 점이 아쉽다. <유리정원>을 본 관객에게는 이미지와 서사의 총체로서의 인상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자연이라는 비유만이 남는다. 두 영화에서 유독 많이 나오는 장면들은 노트북 모니터다. <레인보우>의 주인공이 시나리오를 쓰듯 <유리정원>의 지훈도 소설을 쓰고, 영화는 이를 내레이션으로 관객에게 들려준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신수원은 대화를 다루는 데 있어 서투른 편이다. 문어체 대사들은 이질감을 준다. 예를 들면 ‘감히’, ‘죽은 아내’, ‘아담과 이브’ 등등 현실이라면 사용하지 않았을 법한 대사들이 들려온다. 이러한 문어체 대사들은 독립 영화에 대한 전형적인 선입견인 어색한 어투가 신수원의 영화에서만큼은 그저 편견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신수원은 쇼트를 구성하는 데에 미숙하다. <레인보우>에서도 그랬지만 신수원은 카메라를 어디에 놓고, 어느 정도 오래 찍어야 하며, 편집점은 어디여야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이 애착하는 비유, ‘삶으로서의 자연’에 집중한 나머지 모든 이야기들과 미적 구성들은 뒤로 밀린다. 나는 신수원이 주제의식을 강조하느라 영화적 만듦새를 버리기보다는 주제의식에 부합하는 미적 형식을 찾았으면 한다. 6년 전 그의 시작점을 목격했던 사람으로서 신수원이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를 바란다.

글 | 강덕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