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준비가 한창이었던 어느 여름, 한 친구가 에어컨을 켜다가 갑자기 울어버린 일이 있었다. 친구가 나중에 말해주기를, 리모컨의 ‘희망 온도’에서 ‘희망’이라는 글씨를 보고 감정이 북받쳤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웃다가도, 입시 결과가 인생의 모든 희망과 절망을 좌우할 것만 같았던 그때가 떠올라 웃음에 씁쓸함이 조금 섞인다. 내 친구의 이 여름 일화는 이상하게도 에어컨을 쓸 일이 없는 겨울에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마 입시철을 맞아 캠퍼스 이곳저곳에 나붙은 안내문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과 이름이 수놓아진 검정 ‘돕바’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희망에 찬 새로운 얼굴들 때문일지도. 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입시생들의 뜨거운 열정이 만나 기묘한 온도를 만들어내는 한예종의 겨울. 그 입시 현장의 온도를 몇몇 숫자들과 함께 가늠해보고자 한다.

1에서 6, 98에서 558. 이 네 숫자 사이에 어떤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냐 묻는다면 한예종 입시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91년 설치령이 제정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1993년 음악원을 시작으로 98명의 신입생과 함께 학교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개교 25주년을 맞는 2017년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는 6개원 558명의 2018년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25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하고 바뀌어 온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에서 단 하나 바뀌지 않은 것을 꼽자면, 입시를 대하는 입시생과 교수진의 진지하면서도 창조적인 자세가 아닐까 한다. 37, 이 숫자는 또 무엇인가. 수치로만 보았을 때 올해 입시에서 가장 치열했던 숫자라고 할 수 있겠다. 37명, 다름 아닌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서 모집하는 신입생의 인원이다. 지난 10월에 치러진 연기과 1차 시험에는 총 5,448명이 지원했다. 10월 11일부터 23일까지 2주간 연기과 입시가 진행되었던 석관동 캠퍼스 곳곳에서는 상기된 입시생들의 얼굴을 쉽게 많이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입시생들 못지않게 긴장을 놓지 않고 있던 이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은 바로 입시 진행을 돕는 학생 진행 요원들이었다.
올해 연기과 입시에서 진행을 도왔던 연기과 16학번 김승찬 학우는 입시 현장을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말에 “서로의 선후배가 되기 위한 간절함의 만남”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저 또한 입시를 오래 준비했고, 한예종에 너무나 오고 싶었기 때문에 시험장에서 굉장히 긴장했던 기억이 있어요. 이번에 입시생들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그리고 입시생들이 가지고 있는 간절함이 느껴지면서 저또한 그분들께 많이 배우고 에너지를 받아가는 기분도 들었어요.”
김승찬 학우와 함께 이번 입시에서 진행요원을 맡았던 연기과 13학번 이정주 학우 역시 인터뷰를 통해 입시의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입시생들을 보면, 무엇보다 예전에 제가 입시를 준비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때만큼 무언가를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시절이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항상 설레고 재미있었습니다.”
두 학우의 말에서 ‘간절함’이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남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에 과거의 간절함을 곱씹어 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매년 치러지는 입시는 재학생들에게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입시 시절의 초심-입학을 무엇보다 열망했던 첫 마음-을 떠올려 볼 수 있다면 잠시나마 학업의 피로를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빅데이터 분석 사이트 구글 트렌드에서 2017년 11월 20일 기준 ‘입시’ 검색 시 ‘한예 종 입시’가 관련 검색어 순위에서 5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예술종합학교 에 대한 관심과 인기가 높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 입시를 치렀던 입장 에서는그런객관적사실보다도컴퓨터앞에앉아설레는마음으로입시정보를검 색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13,052명, 예상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올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에 지원한 입시생을 모두 합한 수이다. 이 수치 앞에서 굳이 경쟁률 같은 이름을 붙여가며 몇 명이 떨어져야 한 명이 붙는지 따위의 계산은 하고 싶지 않다. 입시는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시험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수업이기 때문이다. ‘입시가 최초의 수업이다.’라는 말이 있다. 입학 후에 수강신청을 거쳐 듣는 수업만이 수업인 것이 아니라 목표하는 학교와 과를 정하고 자신의 능력을 다해 준비하는 모든 과정이 곧 하나의 수업이라는 뜻일 것이다. 모든 수업에는 그 결과가 어떠하든 배우는 것이 있다. 13,052명의 학생이 모두 그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 원고를 위해 몇몇 재학생과 졸업생을 인터뷰하면서 공통으로 들었던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합격하지 못했어도 좌절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게, 나답게 입시를 즐기라는 것. 한 익명의 학우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합격하지 못했다고 좌절하지 말기를. 모든 대학들은 다 장단점이 있으니까. 그리고 한예종에 들어오면 마법처럼 내가 엄청난 예술가로 변해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고, 졸업하면 또 마법처럼 내가 엄청난 예술가로 변해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다. 한예종에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그냥 나는 나다. 들어온다고 대단한 일 없으니 다들 그냥 오늘 하루하루 열심히 작업하시라.”
언뜻 다소 시니컬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과거 입시를 겪었던 사람으로서, 졸업을 앞둔 사람으로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물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무조건 헛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오래오래 좋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렸던 내 친구처럼 입시라는 사건은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아주 희망적이거나 절망적인 분기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예술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입시의 과정을 경쟁이나 시험으로 보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다듬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수업이라고 생각하며 노력한다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수능 연기로 인해 11월 입시 일정이 한 주씩 뒤로 미루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입시 기간 캠퍼스를 감싸는 기묘한 온도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유지될 듯하다. 입시 안내문 사이로 ‘정숙’이라 써 붙여진 종이가 나부끼는 캠퍼스를 여느 때보다도 조용히 걸으며 생각한다.
모두가 첫 수업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됐으면 좋겠다.

글 | 박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