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적로 - 이슬의 노래

낙엽이 지고 갑작스레 다가온 추위에 온몸이 떨린다. 가끔은 창가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며 겨울의 신호를 느낀다. 어느 때보다 짧았던 가을을 조용히 보내주고 겨울을 맞이하러 창덕궁을 지나던 중, 어디에선가 이별을 받아들이는 그윽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담은 전통 한옥일까 아니면 새로운 현재 속의 건물일까. 두 가지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정체 모를 곳으로 나도 모르게 내 몸이 그 소리에 이끌려 간다.
음악극 <적로-이슬의 노래>에서 ‘적로’는 방울져 떨어지는 이슬(適露), 예술가의 악기에 불어넣은 입김에 의해 생긴 물방울(笛露), 혹은 예술의 혼이 서린 악기 끝의 핏방울(赤露)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2017년 서울돈화문국악당의 첫 번째 브랜드공연으로 서울돈화문국악당 김정승 예술감독, 안무가로 유명한 정영두 연출가, 배삼식 극작가 등 뛰어난 창작진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전공 분야도 다르고 이제까지 해왔던 예술작업도 다르다. 이번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만남이자 교류다. 막이 오르기 전까지도 장르를 뛰어넘은 예술의 연결고리가 공연에 어떤 풍미를 더할지 너무나 기대됐다.

<적로>는 실존 인물이지만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예술인의 삶을 100분의 음악극으로 풀어냈다. 극의 주인공인 박종기 명인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대금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친숙한 진도 아리랑이 바로 박종기 명인의 작품이다. ‘대나무가 무성하다’는 의미인 죽농(竹濃) 김계선 명인은 궁중 악사였지만 민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예술인이었다. 당시 혼란스러운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본인만의 전통 음악의 맥을 이어왔다. 그는 “젓대(대금)의 속이 비어 있듯이, 사람도 자신을 비워야 남을 감동시킨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필멸의 소리로 불멸의 예술을 꿈꾼 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1941년 경성의 저녁, 박종기는 경성을 떠나 고향 진도로 내려가기 위해 그의 동료 김계선에 이별의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김계선이 박종기에게 떠나지 말라며 실랑이를 하던 중, 이들은 알 수 없는 인력거에 실려 간다. 인력거에 내려 정신을 차려보니 둘이 동시에 사랑했던 산월이가 예전 모습 그대로 앉아있다. 산월은 그들과 젊은시절 젓대 한 자락과 그 추억을 나누었던 권번의 기생이다. 이십 년 전 갑자기 사라졌던 산월의 모습을 꼭 빼닮은 동명의 여인 앞에서 박종기와 김계션은 옛 추억을 떠올린다. 사실 지금 여기에 있는 산월이는 옛날 산월의 딸로, 기생이 되면서 어머니의 이름을 받아 이었다. 산월은 두 명인의 대화를 들으며 일 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린다. 젓대 자락과 함께 흐르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가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마음속 혹은 젓대 위로 적로가 맺히기 위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아련하게 추억한다. 그렇게 산월이를 위한 제의(祭儀)가 흐르고 있었다.

<적로> ⓒ서울돈화문국악당

<적로>의 음악은 서양의 악기와 동양의 악기가 한 무대에 어우러진다. 최우정 음악감독은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기본 연주로 했다. 거기에 박종기의 고손자 박명규 연주자가 대금의 소리를 조용히 얹었다. 이외에도 아쟁 등 여러 전통악기뿐만 아니라 스윙재즈의 신시사이저, 드럼 등도 모두 라이브로 연주되었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조화가 감성을 매료시킨다. 거기에 올려진 산월이의 청명한 목소리는 주인공들의 삶을 더욱 애절하게 전달했다. 박종기, 김계선, 산월은 이미 떠나갔지만 우리는 그들의 젓대 한 자락과 구슬픈 목소리를 담은 음악을 듣고 있다.인간이라면 삶의 막바지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인생의 한(恨)과 공허함. 그리고 우리의 품을 떠나가는 존재를 보내야만 하는 슬픔이 있다. 공감 탓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저기서 눈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 없었던 산월과 박종기, 그래서 더 애달픈 젓대 한 자락.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맺혀있는 적로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각박한 사회에 지쳐가는 요즘, 목표도 목적도 없이 달려가곤 하는 우리는 이 두 명인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 같다. 맺혀 있는 적로를 평생 지켜보고 보낼 수 있도록.
음악극 <적로>는 분명 다양한 예술 교류의 도전이 이뤄낸 놀라운 결과다. 우리 마음 속에 맺혀있는 소중한 예술이 연결고리가 되었기에 100분의 짧은 시간 동안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 제목 속 ‘적로’의 의미대로 끝까지 고여 있는 이슬이라든지 물방울, 핏방울은 없다. 평생 고여 있는 예술도 없다. 급격히 변화하는 현시대에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예술만이 창덕궁 앞마당에 존재할 필요는 없다. 국악과 현대음악의 단순한 결합을 뛰어넘은 한국과 서양의 예술, 예술 간의 리에종.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우리만의 감성.이제 우리는 또 새롭게 흘러내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글 | 이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