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박귀섭

몸짓 그리고 이미지

사진을 찍고 영상을 만들며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있는 작가 박귀섭을 만났다. 이제는 자기 몸이 아닌 사진기를 주 도구로 삼게 되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몸을 향하고 몸에 둘러싸여 있다. 박귀섭은 같이 작업하는 이들, 또 작업을 보는 이들과 늘 소통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작업하며 이야기 나누고 서로 배려하는 중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는 박귀섭. 그는 계속 사람과 몸, 몸짓을 사랑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일을 사랑한다.

무용수에서 사진가로

예전부터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해보는 성격이었어요. 무용을 시작하기 전엔 미술을 했고, 무용수로 활동 중에는 쇼핑몰을 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어요. 국립발레단 활동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빚을 진 상황이 된 것이죠. 그때 마침 일본 에이전시 쪽에서 제 사진 작업을 보고 연락이 왔고, 그 기회를 잡게 되었어요. 그렇게 사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사진작가, 균형을 잡다

나란 사람을 되짚어 봤을 때 저에게 맞는 생활 패턴이 있더라고요. 발레를 조각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아주 섬세하게 깎아 내려가는 작업이에요. 궁극의 결정체, 최고의 아름다움을 위해 깎아 내리는 일이고 또 매일 성실히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저는 그 생활이 맞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삼일 몰두해 밤을 새우고 하루 쉬는 식이 더 맞는 사람인데, 매일 출근해서 똑같이 그 수련을 반복하는 것에 적합하지 못했던 거죠. 지금은 균형을 잘 잡고 있어요. 사진 작업할 때는 혼자 몰두하는 시간이 많지만, 인물 작업을 많이 하니 사람들과 스케줄을 맞추게 돼요. 메이크업, 의상 관계자, 무용수 등이 함께 팀을 이루죠. 덕분에 제가 너무 분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게 돼요. 사람들이 나를 믿고 신뢰해 줄 때 그것에 보답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사람들 간의 약속이니까. 저의 사진 작업은 제 생활에 압박과 자유로움 사이의 중간을 잘 잡아주고 있어요.

<VISION>,color Ⓒ박귀섭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신체와 몸짓

아무래도 제가 무용수 출신이다 보니 무용수들을 피사체로 할 때 모델들이 사진 작업을 더 편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어요. 단지 다리를 찢는 자세가 중요한 게 아니고 무용수 시선에 보이는 손끝, 발끝의 세세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거든요. 같은 동작의 사진이라 하더라도 무용수가 봤을 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너무나 많을 수 있는데 저는 무용수들의 신체와 몸짓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거죠. 그런 부분을 다른 사진작가들에 비해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통이 잘 되고 속도도 빨라지고 작업량도 많아졌어요.

이토록 예민하게 사진을 대하며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들이 있어요. 첫째로 동작이요. 저도 무용수였기 때문에 무용수가 싫어하는 선이나 느낌의 동작이라면 아무리 다른 요소들이 좋다 할지라도 피해요. 둘째로는 색감이요. 색감이 다른 사진을 10가지 이상 뽑아서 쫙 펼쳐 놓고 고르는 작업을 해요. 사진은 원본에서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가장 어울리는 분위기를 사람들과 상의해서 고를 수 있죠. 끝으로 종이의 재질. 인화 면에서는 또래 작가들에 비해서 작품비를 많이 쓴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종이 재질에 예민할 때가 많아요. 사진 작업을 늦게 시작해서인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스스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죠. 제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일부러 얘기하려 하지 않아요. 그 이유로 흠을 잡히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해요. 더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싶고요.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주다

<쉐도우> 시리즈 등 개인 작업을 꾸준히 하는 이유는 제 생각을 100% 표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작업 과정들이 너무 좋아요. 물론 여럿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진행하기 때문에 막혀서 끙끙대는 과정들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린 스케치와 무용수들이 주는 피드백이 조율되는 과정이 즐거워요. 또 제 작업엔 리터치 작업이 많이 필요해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기 위해서죠. 리터치는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에요. 피부의 결까지 신경을 쓰니까요. 발레는 섬세하게 조각품을 깎아 내려가는 것이었다면, 저에게 사진은 그 조각품을 뒤엎고 다시 세우는 것이에요. 무언가를 덧붙이든 조각을 실로 꿰매든, 기존의 것을 깨부수고 다시 세우는 것. 물론 다시 세우는 그 순간은 매우 섬세해야 하지만요.

대중들에게 ‘박귀섭’으로 다가가다

인터뷰를 기피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발레리노에서 사진가, 이런 타이틀에 갇히는 것 같아 콤플렉스를 갖기도 했죠. 하지만 모든 관심이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했어요. 보건복지부 금연 캠페인 공익 광고 감독님도 예전에 제가 인터뷰에 나오는 것을 보고 기억해 두셨다고 해요. 그리고 이 광고의 시안이 들어왔을 때 바로 연락을 주셨죠. 저는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쉐도우> 작업을 진행할 때 이미 퍼포먼스까지 이어지는 영상작업을 구상하고 있었거든요. <쉐도우>와 닮은 콘셉트의 광고였어요. 덕분에 제가 포스터 뿐만 아니라 연출, 안무까지 맡을 수 있게 되었죠. 말도안 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제작 쪽에서도 많은 지원을 받으며 업무를 맡을 수 있었고요. 이 광고로 등장하자마자 상을 받고 대중적으로 알려졌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를 알게 되었고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에 참 감사하죠.

클래식과 모던 사이의 균형, 그리고 누드

공익 광고 작업에 대해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등장하는 무용수들이 현대무용가들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클래식 발레 전공자들이었죠. 여전히 발레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전형적인 튀튀 의상에 타이츠와 같은 이미지들. 저는 그 틀을 깨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결국 발레를 하는 사람들도 몸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몸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는 것이죠. 달리 말하면 추함과 고통도 모두 추상적인 아름다움이고 몸의 표현이에요. 발레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것이 현대적이라고 한다면, 발레는 고전을 지키는 한편 현대적인 것을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우리 국립발레단이 지향하고 이뤄낸 지점이기도 하구요.

기이하고 뒤틀린 형상들, 몸의 미-추에 대해서

누드 작업을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 누드의 첫 번째 작업은 저와 가족이 모델이 되었어요.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누드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죠. 여러 부분에서 누드 표현의 조율점을 찾고있는 중이에요. 신체로 사진 작업을 하시는 분들 중에 누드 작업이 엄청 많잖아요. 그래서인지 왜 누드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어요. 한편, 저는 왜 누드작업을 고수해야 하는지 오히려 의문을 가졌어요. 저의 작업은 섹슈얼한 표현이 아니고 몸 자체의 표현에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용수로서 모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그러던 중에 <표현>이라는 작품에 함께한 친구들이 누드를 제안한 것이죠. 작품 안에서 몸이 아닌 다른 선, 가령 피부색 언더웨어가 눈에 걸린다는 것 같은 이유 때문이었어요. 이렇게 특정 작품 안에서 누드가 더 적합한 경우를 고민해요. 웅크린 동작과 순수한 느낌, 선을 강조하기 위한 작업들의 경우에 누드를 택하고요. 그렇게 모델과 타협점을 찾고 더 좋은 지점을 향해 가죠.

<SHAdOW#2>,black Ⓒ박귀섭

무용수도 사진가도 아닌, 작가라는 이름

포지션이 애매해요. 저는 안무가가 아니에요. 영상을 찍는 사람도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다루는 것은 사진이죠. 그런데 제가 사진가인가 하면 그도 아니에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동원하는 디지털아트를 하고 있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포지션을 갖는 것이 아니었어요. 어제는 이 일을 하고 싶었다면, 오늘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요. 사실 처음에는 욕도 많이 먹었어요. 분야를 넘나드는 것이 배신 혹은 변절이라고 여겨지던 때도 있었으니까요. 저는 다만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거지, 딱히 규정을 두지 않으려 해요. 예전에 저는 단어의 무게 때문에 ‘작가’라는 말을 기피하곤 했어요. 그런데 결국 제가 찾으려던 이름은 작가더라고요. 작가란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이니까. 사진, 연출, 무용, 안무가. 무엇이 되었든 갖고 있는 능력을 표현하는 거죠, 조금씩.

표현 그리고 소통

제 개인전에는 항상 빨간 우체통이 있어요. 제가 전시장에 매일 나가서 관객을 만나면 좋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저를 대변하는 우체통이 거기 있고, 사람들이 엽서를 넣어서 저랑 소통하는 거죠. 사람들이 제 작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거든요. 그게 저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생각해요.

작가 박귀섭, 표현가 박귀섭은 인터뷰를 마치며 자신이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들인 그는, 자신과 똑같이 누군가의 어떤 사람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똑같이 평범한 만큼 그 이상으로 저마다 다른 색깔과 몸짓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박귀섭은 이것을 담는다. 그러면서 너무나 섬세한 비율과 근육을 가진 몸들이 하나의 프레임을 가진 그림 안으로 스며드는 때를 찾아낸다.

글 | 허호정
사진 | 김경수
영상 | 박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