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낯선 단어가 있다. 이 낯선 단어는 쉽사리 뜻을 유추할 수 없다는 데에서 자신의 성질을 드러낸다. ‘리에종(Liaison)’. 불어로는 ‘연결, 관련, 결합’이라는 뜻을, 영어로는 ‘조직이나 부서간의 정보 교환을 돕는 연락망’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최근,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요리에서는 풍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대학 도서관에서는 학업을 도와 그 효과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통역의 영역에서는 VIP로 하여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리에종한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도와 그것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은 낯선 ‘리에종’이라는 단어와 함께 대중문화로 걸음을 옮겨볼까 한다. 대중문화는 문화 예술의 영역에서 가장 빠르게 우리 현실의 이슈와 트렌드를 반영하는 분야다. 사람들의 최근 관심사는 무엇인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대중문화는 변화한다. 대중문화에서 유행이 생겨나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우리와 동떨어진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대중문화 안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단면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결국 대중문화를 살펴본다는 것은 곧 어떤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것과도 같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중문화에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리에종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사회-정치-문화적 이슈들은 때때로 작가나 감독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어 대중문화의 ‘풍미’를 업그레이드 시킨다. 그렇다면 ‘요즘의 대중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리에종 되고 있을까’를 질문하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묻는 것과 같을지 모른다. 그래서 시작해보려 한다. 리에종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여정을.

1. 정치 : 탄핵, 그리고 대선
2. 사회 : 혐오를 혐오하라/ 수많은 삶의 방식들
3. 문화 : 블랙리스트가 드리운 검은 그림자

정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라는 영역으로 나누었지만 이들은 하나의 궤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런 이슈들은 대중문화에 어떻게 리에종 되어 있을까? 지금부터 찾아 나서려고 하는 것들은 어쩌면 흔적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리에종은 어떠한 원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리에종을 리에종하는 것. 말장난 같은 이 동어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프로듀스101> 시즌2 ⒸCJ E&M

탄핵, 그리고 대선 :
“우리 손으로 만든다!” <프로듀스101>

2017년을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선이다. 탄핵부터 장미대선까지. 우리 손으로 뽑고 우리가 세우는 것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대두된 한 해였다. 이는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2016년 시즌1 방송 이후 큰 인기를 끈 <프로듀스 101>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시기적으로도 대선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던 <프로듀스 101>은 이른바 ‘시청자 주권’을 부르짖는 프로그램이다. 그간 단순히 소비자로만 여겨졌던 시청자가 말 그대로 프로듀서가 되는 형태인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정치와 문화를 넘나드는 주권의 영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시즌1 이후 수많은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의 인기와 영향력은 쉬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는 프로그램의 문제점과 한계점 외에 또 다른 시사점을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또 아이오아이와 워너원의 상승세를 통해서 아이돌 문화의 진화 가능성과 그 방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훈, <택시운전사>

블랙리스트가 드리운 검은 그림자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택시운전사>, <아이 캔 스피크>

2017년, 영화를 이야기할 때 <택시운전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광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영화가 실로 오랜만에 개봉했다. 영화의 소재에 송강호의 연기력이 더해져 순식간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택시운전사>는 대중문화가 단순히 콘텐츠로만 소비되는 것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 <변호인> 이후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배우 송강호의 소신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아이 캔 스피크> 역시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진 작품이다. 너무나 중요한 만큼 민감한 소재인 위안부 문제를 잘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해지지 않는’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예술인에게 있어 창작의 자유를 빼앗고 나아가 생계까지 위협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말할 수 있는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나눈 것이다.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처럼 문화 예술계에 짙게 드리웠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기를 기대해도 좋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을-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박훈정, <V.I.P>

혐오의 역사 : “혐오를 혐오하라”
<V.I.P>와 <청년경찰>, 그리고 <알쓸신잡>까지

최근 우리 사회는 점점 더 혐오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은 지금 이 시점에 혐오는 단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여성혐오, 소수자혐오, 장애인혐오를 비롯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혐오의 문제들은 단순히 차별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혐오라고 함께 묶어 부르는 이 문제들은 각각 개별적인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들은 어떤 존재를 배척하고 존재의 사실 자체를 감추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영화 <V.I.P>와 <청년경찰>, 그리고 예능프로그램 <알쓸신잡>을 동일한 문제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유이다.
영화 <V.I.P>의 박훈정 감독은 2013년 큰 인기를 얻은 <신세계>의 영광을 잊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번 작품은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영화라는 점에서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깊은 성찰을 찾아볼 수 없는 잔혹 포르노 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여성들은 영화의 내용 안에서는 피해자로, 그것이 드러나는 표현방식에서는 하나의 전시물로 존재한다. 무엇을 위해 여성은 희생당해야 하는 걸까?
김주환 감독의 <청년경찰> 역시 비슷한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작품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청년들이 경찰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며 여성과 조선족을 희생시킨다. 내용 안에서는 여성이, 표현 형식에 있어서는 조선족이 철저하게 희생당하는 것이다. 앞서 <V.I.P>에게 던졌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서사 안과 밖에서 희생자는 무엇을 위해 희생당해야만 하는가?
두 영화와는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은 혐오의 역사, 즉 무엇을 배척하고 감추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쓸모없는’과 ‘잡학사전’이라는 가벼운 표현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간 이 프로그램은 사실 문화자본의 불균형을 전제한다. 쓸모없는 지식이란 삶에 꼭 필요하지는 않은 지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쓸모없는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시간과 자본을 더 많이 가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꼭 필요한 지식만을 가지기에도 벅찬 누군가에게 쓸 데 없고 신비한 잡학사전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존재들이다. 시간과 돈 그리고 지식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계급은 부지불식간에 나뉜다. 그러나 이 괴리감은 아재들의 수다라는 쉽고 편안한 방식을 통해 감춰진다.문화자본의 불균등도, 계급도, 괴리감도 마치 애초부터 없던 것처럼. 또 한 가지. 멤버들 중 어디에도 여성은 없다는 점은 그저 우연의 일치인 걸까?
우리가 한데 묶어 혐오라고 부르기 시작한 그 역사는 사실, 배척과 감추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그러니까 있는 존재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한다. “싫다”고 발언하는 것만이 혐오가 아님을 기억하자. 알아두면 쓸 데가 넘치는 지식, 우리 삶을 구성하는 지식을 위해.

<효리네 민박> ⒸJTBC

수많은 삶의 이야기 방식들 : “홀로, 솔로, 따로, 새로”
<동상이몽2>부터 <사랑의 온도>, 그리고 <구해줘>까지

마지막으로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 분야를 막론하고 다양한 영역에서 엿볼 수 있는 변화의 양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는 대중문화 안에서 변화하는 삶과 변화하는 이야기 양식들 각각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살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먼저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속속 등장하고있다. 올 여름 큰 인기를 끌었던 JTBC의 <효리네 민박>은 다양한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중 가족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춘다면, <효리네 민박>은 그간 우리가 당연시하며 고집해왔던 고전적인 가족의 형태에서 벗어난 대안적 가족을 보여준 프로그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아니라 부부와 반려동물, 그리고 민박집을 방문한 손님까지, 조금 다른 형태의 가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SBS의 <동상이몽 시즌2-너는 내 운명>의 경우 ‘추우커플(추자현-우효광)’을 통해서 국제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또 장신영과 강경준을 통해서는 비혼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적 가족관이 지배적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신영-강경준 커플의 결혼을 계속적으로 응원하다 못해 강요한다는 점이나 추-우 커플의 경우 우효광을 ‘잡혀 사는 남자’로, 추자현은 ‘기가 센 부인’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는 특히 두드러진다. 또, 여성 출연자가 요리를 하는 것이 “남편을 위해 내조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점 역시도 여전히 고전적 가족관을 통해 성역할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마는 어떨까? 2017년은 그야말로 드라마 풍년이었다. 지상파 3사 외에도 tvN과 JTBC가 드라마 제작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며 드라마 시장은 호황을 맞은 듯하다. 특히 <품위있는 그녀>와 <청춘시대>, <비밀의 숲> 등은 tvN과 JTBC의 입지를 굳히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채널인 OCN도 여기에 합류했는데, 2010년의 <나쁜녀석들>을 비롯해 <써클>, <듀얼> 등 영화에서 주로 다루어지던 소재를 다룬 이른바 장르 드라마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사이비 종교 문제를 다룬 <구해줘>가 큰 반응을 얻으며 드라마 채널로도 확실히 자리매김한 듯하다. 이러한 케이블 채널의 강세는 시청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케이블 채널에서는 장르 드라마 혹은 대안적 가족 형태를 다룬 드라마가 강세인 반면 지상파의 드라마들은 고전 서사의 복원이 두드러진다. 물론 SBS의 <조작>이나 최근 종영한 KBS의 <매드독> 등 장르 드라마에 해당하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연일 화제를 낳으며 성황리에 끝마친 SBS의 <사랑의 온도>는 정통 멜로를 내세우고 있고, KBS의 <황금빛 내 인생>은 다시 한 번 출생의 비밀, 친딸 찾기 등을 전면에 내세우며 승부수를 던졌다. 뿐만아니라 MBC의 <밥상 차리는 남자>나 KBS의 <아버지가 이상해>역시 각각 졸혼과 혼전동거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여전히 고전적인 가족 개념의 복귀를 꿈꾼다는 점에서 지상파 드라마가 우선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의 온도> ⒸSBS

2017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2016년에 비할 수야 없겠지만 정치-사회적으로 꽤나 많은 일이 있었던 해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 많은 일들이 올해 갑작스레 발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또 한번 우리 사회 속 리에종을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가 리에종 되어 있고, 현재는 다시 미래에 리에종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간략하고 부족하게나마 2017년 한 해의 이슈 및 트렌드가 대중문화에 어떻게 리에종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대중문화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그 사회를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해 리에종의 흔적을 더듬어간 이 글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함께하는 글임을 밝힌다. 여전히 리에종은 계속 될 테니까!

글 | 전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