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ㆍ시인 황지우

여전히 그는 노래하리라

한해의 끝을 향해 빠르게 시간이 달려가고 있는 11월의 어느 하루,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시인 황지우를 만났다. 그는 무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예종에서 학생들과 함께 소통해온 교육자이기도 하다. 인터뷰 내내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쉼 없이 늘어놓던 시와 예술, 그리고 학교와 학생들을 향한 애정에는 사그라들 기색이 전연 없는 그의 열정이 스며 있었다. 그러한 그는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을 때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는’ <11월의 나무>와도 같아 보였다.

시인의 눈으로 198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을 포착하고, 전통을 탈피한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를 노래한 황지우는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위적인 시인이다. 기존의 시 형식과 내용을 파괴한 근대적인 스타일로 한국사회의 근대성을 표현해낸 그는 그 누구보다도 ‘근대성’ 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마치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는 20세기 말미, 1999년에 마지막 시집을 발표한 이후로 시인이 아닌 교육자로서 행보를 이어왔다. 그렇게 그가 교육인으로서 행보를 이어가는 동안, 그의 시는 이제 국내를 넘어 국외에까지 날아가 전 세계인들에게 근대성을 노래하였다.

시(詩), 여행을 떠나다

주요 언어권으로는 시들이 번역되었습니다. 번역된 시집을 들고 그 나라에 가서 낭독 투어를 하는데, 멕시코 우남대학에서 시를 낭송하고 학생들하고 토론한 게 기억에 남아요.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스페인어로 읽어주니까 학생들이 너무너무 좋아하는 거야. 사실 시는 모국어를 절대어로 만들어버리거든요. 번역은 원래 시의 30% 정도만 겨우 건네주는 건데 그것으로도 통했다는 것을 확인해서 놀라웠죠. 또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대학에서는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낭송을 듣던 비교문학 교수가 막 손뼉을 치면서 웃어. 자기 남편이 하는 짓하고 똑같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내 시 안에 근대성, 역설적으로 말하면 ‘글로벌 컨디션’이 들어있구나 느꼈죠. 한국의 문학들이 세계적으로 나아가려면 우선은 각국에 한국학이 커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한국문학에 반하게 된 원어민이, 즉 불어는 프랑스인이 영어는 영국인이 번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번역한 문학으로 외국에 출판을 지원하면 그걸로 끝나버려요. 유통이 되지 않거든요.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시

책으로 출간된 마지막 시집이 1999년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예요. 그때가 한예종 선생이 된 지 2년 뒤였는데, 그 이후로는 극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며 희곡을 주로 썼지요. 문학의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요.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기 이전에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등 제가 쓴 시 자체를 연극으로 공연한 적이 있었어요. 이상우, 김석만 연출가들이 젊은 시절에 제 시가 연극적이라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를 가지고 전시를 진행한 화가도 있었어요. 이건용 작곡가는 제 시로 음악을 여러 곡 작곡했는데, 20년이 지난 요즘에도 가끔 리사이틀 하는 것을 보게 돼요. 요컨대 제 시가 좀 잡다하고 복잡하고 너저분해서 여러 장르를 만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시 속에 연극성, 회화성, 음악성 이런 것들이 중첩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한예종을 추억하다

이어령 장관님과 이강숙 초대 총장님 두 분에 의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세워질 당시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 세계에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예술적 식민주의가 퍼져있었어요. 유학을 가지 않고도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나올 수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어 보자 했던 게 한예종의 설립 취지였어요. 제가 총장이었을 때는 그게 불과 20년도 되기 전이었는데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파리 롱-티보 콩쿠르 우승, 무용원 학생들의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석권 등 믿기지 않는 교육적 성과가 나타났죠. 저는 이러한 결과가 전적으로 이강숙 초대 총장님이 치켜든 깃발에 우리나라 예술 각 장르의 이른바 선수라 할 수 있는 교수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들의 열정의 산물이라고요.

목수가 나무를 켜듯

내년 1학기가 마지막 학기로 정년을 앞두고 있는 시기입니다. 돌이켜보니까 인생의 20년이 한예종에 바쳐진 것이었어요. 어찌 회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가르치는데 열정을 가졌고, 열정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생을 연소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제 안에 어떤 교육자의 본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가르치는 게 재미있었죠. 똑똑하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웃음) 무엇보다도 정말 가망 없어 보였던 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어요. 놀라운 비약이 일어날 때가 내 창작의 희열 못지않게 기뻤어요. 그건 마치 목수에게 비유될 법한데 ‘아, 이 나무를 켜면 그 속에 무늬가 아름다운 원목이 있겠다’는 게 눈에 딱 보이니까 이 학생들을 들입다 대패로 가는 거죠. 걔들은 고통스러웠겠지.

무시무시한 <명작읽기>

한예종에서 악명 높은 9시간짜리 수업이 <명작읽기>예요. 다들 작품의 제목도 알고 저자도 알고 심지어 내용도 아는데, 그러나 결코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던 책 들. 저는 그것이 명작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불멸의 고전들을 책상에다 학생들하고 같이 놓고 같이 읽고 같이 공부한 거죠. 아이들이 생각을 스스로 부화시킬 수 있도록 때때로 질문이라는 부리로 쪼아주고 쪼아대고 품고 그랬어요. 심지어 거의 밤 11시까지 수업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 때 수업을 하기도 했어요.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도망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그 자리에 남아서 텍스트에 붙들려 있다는 것이 놀라웠죠.

영어・불어・독어로 번역된 시집들

기술과 예술의 리에종

제가 총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실천되어오고 있는 통섭 교육의 사례로 한예종과 과학기술에 특화된 포항공대(이하 포스텍) 간의 교류가 있어요. 한예종처럼 포스텍도 뭔가 결핍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러한 상호 간의 결핍이 한예종과 포스텍을 교육적으로 밀착시켰던 것 같아요. 일차적으로 한예종은 포스텍에서 <예술의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예술에 대한 전방위적인 맛보기 강의를 열게 했죠. 포스텍은 우리에게 <과학의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의 세계를 예술학교 학생들에게 눈 뜰 수 있게 하는 수업을 열었어요. 굉장히 기뻤던 것은, 세계 나노 과학자 5인에 드는 포스텍의 김기문 교수님 수업을 들은 우리 미술원 학생이 분자의 개념을 갖고 새로운 조각, 보철 조각을 하고 싶다고 한 것이에요. 또 이산 수학을 들은 영상원 학생은 그 개념을 가지고 새로운 SF를 만들고 싶다고 하기도 했죠. 이게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통섭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의 성과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발상을 달리했다는 것. 이런 발상들이 3~4년만 더 가면 거기서 무언가 나와요. 그걸 목표로 해서 달성이 되면 좋지만 달성 되지 않아도 또 다른 콘텐츠로 연결되는 예기치 않은 부산물, 새로운 콘텐츠의 출현이죠. 의도한 그대로 나오면 별로 창의적일 수 없거든요. 그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나왔다, 그것이 진정한 창의성이에요.

21세기 한예종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무렵에 한예종 교수들이 다함께 21세기 예술 교육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토론했어요. 한예종의 창립 취지는 콘서바토리처럼 무엇보다도 실기 중심의 교육이었어요. 콘서바토리는 전문적으로 예술을 교육하는 곳으로서 이미 있는 예술을 유지하는 장르인 셈인데, 그런 교육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연기나 연주에도 해석적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느낀 거죠. 이러한 방식은 궁극적으로 더 생산적인 것, 최초로 나온 것, 막 출현한 어떤 예술과 연결되고 그게 21세기 예술 세계의 지평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르 간 혹은 장르를 넘어서는, 통섭이라고 하는 통로를 우리 한예종 교육에 열어놓자고 결론을 내렸죠. 그것이 21세기 미래에 예술로 나갈 수 있는 출구를 학생들에게 열어주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이미 시대의 낌새를 학생들이 먼저 눈치 채고 있었어요. 예를들면 무용원과 연극원 학생들끼리 모여서 어떤 작업을 하는 것처럼 각 학생들이 6개원에 갇혀 있지 않고 원을 넘나들면서 제3의 어떤 길을 찾고자 하는 열망, 그런 갈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죠.

이제 내일로

21세기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술결정론 시대고, 이것을 우리는 피할 수 없어요. 더구나 예술이란 말을, 이거 강의가 되면 안 되는데.(웃음) 최초로 만들어낸 나라가 고대 그리스인데, 그리스어로 예술이 ‘테크네(techne)’예요. 그러니까 ‘테크네’는 기술과 예술 이걸 다 한꺼번에 아울렀던 말이죠.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기술이고 거기서 파생된 거죠. 근대 이후에 서로 상반된 길을 갔던 기술과 예술이 이제 21세기에 와서 다시 만나는 거야. 컴퓨터 기반 언어, 디지털 언어 그건 이미 여러분의 언어이고 도구예요. 선생님 세대는 그 언어가 너무 낯설어서 그걸로 작업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우리 제자들, 학생들은 이미 이걸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었죠. 그들의 언어로 새로운 예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학교가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싶었어요. 그래서 2007년 제가 총장으로 있던 당시에 4년 중기 사업으로 ‘U-AT(Ubiquitous Art-Technology) 통섭교육사업’을 시작했죠.‘마음의 피뢰침’을 내건 예술+테크놀로지 심포지움은 대단한 관심을 끌었지요. 1년 후에 U-AT 통섭교육사업이 와해되어버린 건 비단 한예종 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뼈아픈 상실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한국 테크놀로지도 임계점에 와 있어요. 돌파해야 해. U-AT 통섭교육사업은 그 당시에도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10년, 20년 뒤쳐진 것이었어요. 그들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새로운 영역이기 때문에 만약 그대로 갔으면 뭔가 돌파가 이루어졌을 거예요. U-AT 통섭교육사업을 회복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미래 채널을 열어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에요. 그 한(恨)만 안고 졸업하게 생겼어.

인터뷰가 끝나고 싸인을 요청하자, 황지우 교수는 숨을 고르듯 말없이 잠시 있더니 이윽고 ‘후적박발(厚積薄發)’이라는 말을 쓰며 우리에게 이 날의 마지막 교훈을 건네주었다. “두터울 후에 쌓을 적, 안에는 두텁게 쌓고, 박하다 할 때 박에 필 발, 적게 드러내라는 말이야. 그러니까 내면은 두텁게, 내뱉을 때는 삼십 프로만.”

글 | 유예빈
사진 | 김경수
영상 | 이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