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은 지옥이다’ 말하면서도 ‘외롭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는 사회에서 감염병의 확산은 그 아이러니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안전을 위해 타인과의 거리 두기가 몇 달 째 지속되는 한편,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고 싶어한다. 취소된 회의와 수업은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공연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방송되며, 어떤 이들은 발코니에 나와 노래하면서 이웃들과 마음을 나누기도 한다.
기술의 발달과 세계화로 인해 이미 만나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시대이지만, 인류가 지금처럼 ‘비대면 현존감’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경험한 적은 없는 듯하다.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무언가 공유하려는 갈망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고 이에 감응해야 하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되는 사례 중 하나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기술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콘텐츠원캠퍼스 구축운영’ 사업 수행팀(지도교수 이승무, 조충연)의 ‹레인 프루츠›와 ‹허수아비›는 그 가능성을 구현해낸 작품들이다. 지난 1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허수아비›가 ‘가장 강렬했던 경험’이라는 호평을 받은 데 이어 ‹레인 프루츠›는 2020 제19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360시네마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다. 송영윤 감독의 ‹레인 프루츠›는 미얀마에서 엔지니어를 꿈꾸며 한국으로 왔으나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이주노동자 뚜라의 이야기를 시적으로 담아냈다. 관객과 뚜라의 거리는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그의 관점에서 목격하는 차갑고 건조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국의 흔한 공간들 - 공장, 목욕탕, 고시원 - 에 덩그러니 낯선 존재로 놓여있던 뚜라는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되찾는다. 송영윤 감독은 “이야기의 시적 표현들이 VR이 표현해낼 수 있는 시각, 청각 이미지와 맞닿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담백하고 서정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독백 형식의 내레이션과 함께 사물과 인물의 3D 공간값을 포함하여 스캔해내는 볼류매트릭(Volumetric) 기술 덕분에 뚜라의 경험은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뚜라의 얼굴 없는 흰 육체와 한국인 사장의 선명한 얼굴은 대비를 이루며 그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나타낸다. 또한 뚜라가 머무는 고시원은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직육면체로 표현되는데, 이는 그에게 허락된 2평 남짓한 공간이 얼마나 좁고 외로운 공간인지 가늠해보도록 만든다.

정지현, ‹허수아비›

작품을 통해 관객은 이주노동자가 느끼는 이질감과 공허함이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종류의 경험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임을 체감한다. “서울이라는 공간이 주인공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생경한 공간으로 다가오고, 우리가 평소 스쳐지나가는 타인의 부피, 존재감과 자신의 무게를 체험을 통해 몸으로 느끼기를” 바랐다는 이승무 교수(콘텐츠원캠퍼스팀 크리에이터)의 말처럼 ‹레인 프루츠›는 인간이 놓인 공간에 따른 존재감의 상실과 회복을 그려내는데 첨단미디어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한편, 예술가들의 죽어버린 세계를 그린 정지현 감독의 ‹허수아비›는 홀로 살아있는 허수아비를 만나 세계를 구하는 모험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영화 초반 들판에는 한 허수아비가 서 있는데, 다른 허수아비들과 달리 심장이 간헐적으로 뛴다. 이를 발견하고 그의 심장을 건드리면 허수아비가 깨어나 몸짓으로 말을 건다. 그는 손을 맞대려 하기도 하고, 그림을 함께 그리거나 림보 게임을 하자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렇게 점차 스토리의 주체로 참여함으로써 관객은 허수아비와 유대 관계를 쌓게 된다. 이후 허수아비는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는데, 자연스럽게 관객은 그를 돕기 위해 움직이고 세계를 살리는 데까지 이른다.

송영윤, ‹레인 프루츠›

주인공과 관객의 교감은 작품에 접목된 버추얼 이머시브 시어터(Virtual Immersive Theater)기술을 통해 가능하다. 정지현 감독에 따르면 “소설은 텍스트로, 전통적 영화는 시각과 청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VR영화는 촉감과 후각 등의 공감각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더불어 이머시브 시어터는 연극과 같은 실시간성을 띄고 있어 더욱 실감나는 체험이 가능하다.” 감각과 세계의 확장, 그리고 대상과의 밀접한 상호작용이 색다른 희열과 감동을 전달하고, 가상현실에서도 누군가와 연대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레인 프루츠›는 영화의 화자와 같은 시공간에 머물며 제3자로 지켜보게 하는 데 비해 ‹허수아비›는 관객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두 작품에 담긴 고민은 같다. ‘VR영화가 기존의 매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현재 VR영화들은 시선을 어디에 고정해야하는지도 정해져있지 않고, 재현해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기술적, 미학적 한계가 있다. 이승무 교수는 아직 이 장르가 “어떠한 형태가 될 수 있을지, 이전의 영화와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찾아가는 과정 위에 놓여있다” 말한다. 그럼에도 VR이 회화, 사진, 프레임으로 구성된 전통적 영화와 구별되는 측면은 인간을 “분절되지 않은 시공간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 있다. 창작자의 시선, 의도, 방향성은 존재하지만 훨씬 축소되어 있기 때문에 관객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상의 시공간에서 무엇을 볼지, 무엇을 느낄지 선택해야 한다. 창작자와 향유자의 일방적인 발신과 수신의 관계는 깨질 수밖에 없다. 관객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핵심 주체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시공간 또한 분절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VR은 도피할 가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오히려 ‘순간을 살아내게’ 하고, ‘눈앞에 주어진 현실에 감응하는 감각’을 일깨운다.
이러한 속성은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보이지 않았던 현실’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체로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감각하지 못했던 타인의 세상을 예민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가상세계 안에서 직접적으로 타인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즉물성으로 인해 VR기술은 대체로 재미를 추구하는 게임 산업을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레인 프루츠›와 ‹허수아비›가 그랬듯, ‘교감’과 ‘감동’을 중심으로 VR영화만의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나가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글 황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