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뮤지컬 ‹리지›를 올리고 숨 가쁘게 다음 공연인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을 준비 중인 연출가 김태형을 만났다. 국내에서는 드문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고 거침없는 여성 중심적 서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등 도전적인 선택을 고수하는 연출가. 연출가는 대중을 향한 이야기꾼이라고 정의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조금 다른 짓
저는 과학고에서 자연스럽게 카이스트로 진학한 케이스인데, 공부가 재미없었어요. 업으로 평생 할 일이라면 재밌어야 할 텐데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저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죠. 반면 고등학생 때부터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연극은 너무 재밌었어요. 처음으로 동아리에서 연극을 연출을 했는데 제가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공연을 보고 재밌다고 말했을 때의 짜릿함에 ‘이거다’ 했고, 결국 카이스트를 중퇴하고 한예종에 들어갔죠. 또 지식인으로서 나도 모르게 느끼는 사회적 책임감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열망, 자본주의 사회를 탈피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픈 욕망이 있었어요. 연극에서 이전에 비슷한 시도를 했던 사람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제가 그 발자취를 따라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진정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졸업 이후의 어려움
중간에 전공을 바꾸며 다시 1학년이 되고, 병역 관련해서 회사를 다녀오는 등 학생으로서의 시간이 매우 길었어요. 어렸을 때 서른 살이면 뭔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서른 살이 되자 그냥 졸업생일 뿐이었죠. 당장 어디서 힘을 쓰고 노력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누군가가 저에게 ‘연출과 졸업했으니까 이제 연출해’라며 불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큰 어려움은 아니었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거죠. 졸업한 해 겨울부터 봄까지 굉장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집에 칩거할 때 도움을 받았던 것은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였어요. 이때 한번은 술자리에서 박상현 교수님께서 “10년은 해봐야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결정된다.”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교수님의 답변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정말 10년이 지나야 알 수 있더라고요. 특히 공연예술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단번에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워요. 이 욕심을 버리고 바닥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무대와 관련된 일을 하자고 결심했고 무대 설치, 디자인, 조명, 목수 일까지 하면서 극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한 것은 소용없고 사회에서 부딪히는 것이 진짜다”라는 말을 흔히들 쓰는데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해요. 기술적인 것은 졸업 이후 현장에서 배웠지만 공연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는 모두 학교에서 배웠어요. 일해 보니 연출이 하는 일의 80%는 ‘말하는 것’이에요. 배우에게, 스태프에게 제 판단과 의견을 전달하는 거죠. 이때 제가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이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배웠던 것이더라고요.

젠더프리 캐스팅과 여성 캐릭터
제 작품이 국내 최초의 젠더프리 캐스팅 사례는 아닐 거에요. 기록되지 않았다 해도 이전에 이러한 시도들이 분명 있었겠죠. 다만 수입을 목표로 하는 공연에서는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한 명의 배우가 열 개가 넘는 배역을 혼자 소화해내는 극인데 여러 배역 안에는 남성, 여성, 노인, 아이, 동물까지 다양한 롤이 있어요. 이 때문에 배우의 성별에 더 자유로울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공연에서 어떻게 그려지는가에 대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제 대표작인 연극 ‹모범생들›도 그렇고 여자가 한 명도 없이 남자 캐릭터만 나오는 극본이 많았거든요. 어느 시점부터 “왜 여성 캐릭터는 이렇게밖에 그려지지 않지?”라는 순수한 의문이 들었어요. 여자 배우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캐릭터의 깊이 있는 지점에서 하는 이야기는 캐릭터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더군요. 여성 캐릭터는 극 중에서 사람이 아니라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여성 캐릭터를 욕망과 꿈, 장점과 단점, 잘하는 일과 실수가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리고 싶어서 고민을 많이 했죠. “남자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하는 말이라면 굳이 남자가 할 필요는 없다.
남자가 인간의 대표는 아니니까”는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 몇 년간 연출로서 오디션을 봐온 입장으로 말하자면 이제 막 활동하는 젊은 배우 중에서는 여성 배우들이 단연 월등한 연기를 보여요. 남성 배우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성 배우들이 관객과 캐릭터에 대한 탐구가 더 뛰어나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30대가 되면 그런 차이들은 없어지고 남성 배우들이 더 많이 생존해있죠. 연극계에 남성 배역이 훨씬 많고, 프로로서 한 편이라도 더 공연에 참여하는 경험은 예술가의 성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여성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확연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백인 남성들이 주인공인 ‹오펀스›에서도 젠더프리 캐스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죠. 물론 이 선택이 더 힘들 때도 있어요. 배우들이 힘들어할 때 “이것을 해내야 더 많은 여성 배우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힘들지만 닥치고 해내자”라는 말을 많이 해요.

‹모범생들›
‹오펀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리지›

폭력을 수반한 여성의 해방, 뮤지컬 ‹리지›
현재 공연 중인 ‹리지›를 연출할 때 가장 많이 고민한 지점은 ‘가족을 살해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캐릭터인데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을까?’였어요. 그런데 연습을 해보자 지지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뮤지컬에서 살인의 원인이 다년간에 걸친 성폭행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내가 여전히 남성적이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봤나라는 생각도 들었죠. 연출로서 볼 때는 아쉬움이 있는 극본이에요. 그러나 여기에 배우의 퍼포먼스가 붙으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노래하고, 실컷 욕하고, 화내고, 욕망을 드러내는 캐릭터의 발산 자체가 드라마의 텍스트가 되더군요. 이 공연의 플롯은 노래의 에너지로 완성되는 거죠. “저렇게 나쁜 짓을 하는데 왜 이렇게 신나지?”라고 느끼셨다면 연출 의도에 딱 맞았던 겁니다. 저는 이 공연을 통해서 ‘그래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여성 캐릭터들이 무대 위에서 욕하고, 욕망하고, 죽일 놈들 죽여도 된다고요.

집단지성을 가진 관객의 등장
“연극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관객이야말로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현재 관객들의 요구는 매우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되고 있고,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가 다음 작업에 굉장히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관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서 장사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관객들의 사회적 욕구와 불만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이 결국 예술가가 사회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상업 예술가로서 상업적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고, 돈을 주고 기꺼이 볼 만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결국 관객들이 공연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제가 속해 있는 상업성을 가진 공연판은 관객들의 생각이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편이에요. 늘 감사해하고 무서워하면서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관객들이 원하지 않는 차별과 혐오를 전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요. 관객들이 동시대 공연이 어때야 하는가를 끌고 나간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공연예술
연극은 디지털 매체에서 다루는 콘텐츠와 절대 같을 수 없어요. 복제를 통해 한계 없이 배급되기 때문에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영상매체와 달리 극장 공간의 한계는 곧 관객의 한계이고, 자연히 수익성에도 한계가 생겨요. 지금은 소파에서 리모컨만 만져도 더 재밌고 더 새롭고 더 사실적인 것을 겪을 수 있는 시대죠. 이런 상황에서 “왜 굳이 공연을 보러 오는가?”라는 의문은 자연스러워요. 어찌 보면 영상매체의 발전은 기회 비용적으로 당연한 일이고, 이 규모의 발전은 연극과 뮤지컬의 발전 규모가 따라갈 수 없어요. 저는 이 일을 하는 전문가로서 ‘공연예술이 앞으로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인가? 당장 영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연극은 디지털 복제 시대에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가진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공연도 물론 영상으로 접할 수 있지만, 공연은 몇 가지 예외를 제한다면 실제로 보는 것이 영상보다 훨씬 재밌어요. 인간이 시각과 청각만 가진 동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장의 온도, 습도, 냄새, 필요한 소리만이 아닌 주변의 소리, 극장에 가는 길, 누군가와의 만남 등 총체적인 체험 안에서 공연을 보는 일도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고, 이 체험 자체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산책할 필요가 없어도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결국 공연장은 이 체험을 제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에만 있었던 소수의 관객만 접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훨씬 더 깊이 있고, 훨씬 더 철학적이고, 훨씬 더 못되거나 야한 이야기를 제공해야 해요. 그 공연장에 있었던 나만이 한 경험, 이것이 연극의 미래입니다. 해외에서 관객 참여형 공연(Immersive theater)이 많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거고요.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공연들이 생기고 있고 저도 앞으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도전을 앞둔 후배들에게
연극은 웬만하면 하지 마세요. 본인이 가진 재능으로 이 4차 산업 시대에 할 수 있는 새롭고 가치 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연극이 시대의 어젠다이던 세상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정말 몇 안 되는 소수에게만 작용하는 작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가치 있다면 하세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변화하거나 삶의 기쁨과 위안을 얻어가는 것이 즐겁다면요. 그리고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인데, 너무 일만 하지 말고 행복을 찾으세요. 모든 예술가가 행복하게 작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들이 삶을 영위하는 것과 행복을 찾는 것이 양립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열정적이고 명쾌한,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그만의 언어를 들으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수 세기 전부터 존재해왔고,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이 예술에 더 많은 관심과 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탁월한 이야기꾼의 다음, 그리고 그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시점이다.

글 김수림 | 사진 김경수 | 영상 전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