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가, 어떻게, 왜 기억하느냐에 따라 과거는 다르게 돌아온다. 시간과 장소, 정치적 맥락, 이데올로기적 짜임, 그리고 기억하는 자의 욕망이 모두 뒤엉켜 기억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과거의 전쟁을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지난 시간의 진실을 규명하는 문제를 넘어 지금의 전쟁이 된다. ‹기억의 전쟁›은 바로 그 전쟁을 그려내는, 나아가 그 전쟁을 수행하는 영화다.
이길보라 감독은 총을 든 용사들의 피 끓는 전우애로 기억되는 전쟁의 가장 반대편, 그러니까 학살에서 살아남은 민간인들의 말과 몸짓에서부터 전쟁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중에서도 이 작업의 주인공들은 베트남 전쟁 남한군 민간인 학살의 생존자이면서 동시에 여성과 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이다. 세 명의 주인공 응우옌 티 탄, 응우옌 럽, 그리고 딘 껌은 영화에서 자신이 직접 겪었던 일들을 증언해나간다. 여기에서 우리는 거대한 역사에 가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존재들을 본다. 그러나 소수자들의 증언을 담아낸다고 해서 쉽게 역사에 균열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를 통한 재현은 그들을 대상화하고, 피해자로서의 자리를 재확인하며 동정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길보라의 작업은 이러한 타자화의 역학 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을까.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고 첫 번째 씬, 칭얼거리던 아이가 카메라를 보고 배시시 웃는다.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 그 위로 어머니의 죽음과 과거에 마을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무덤을 회상하는 응우옌 티 탄의 말소리가 겹쳐진다. 마을 곳곳의 이미지와 함께 그의 베트남어 음성이 나지막이 흘러나오고, 한국 사람을 포함한 외국인 관객들은 자막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영화라는 체제에서 너무도 당연한 번역과 자막의 문제를 짚어내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딘 껌의 씬과 유의미한 대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응우옌 티 탄의 말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화면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한 위령비가 서 있는 장면을 담아낸다. 그러다 순간 말이 멈추고, 그 위령비 쇼트에서 바로 평평한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이어 붙는다. 응우옌 티 탄과 마찬가지로 증인이자 생존자인 딘 껌은 청각 장애인이다. 그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무언가 나타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의 몸짓에는 자막조차 붙지 않는다. 수어처럼 구조화된 몸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딘 껌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몸으로 재연한다. 그에게 기억과 증언이라는 행위는 그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행위와 겹쳐있다. 그의 몸짓은 과거를 표상하는 것을 넘어 지금의 움직임이 된다. 언어로 구조화되지 못하는 그의 몸짓은 현재의 성좌 속에서 그 자체로 현실을 만든다. 그것은 표현이나 재현이 아니라 현존이다. 그는 증언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몸짓으로 증명하며 증거가 되는 것이다.
딘 껌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까닭은 이길보라의 데뷔작 ‹반짝이는 박수 소리›와 연결된다. 그 작업은 청각 장애를 가진 부모와 그 밑에서 자란 감독 자신의 개인적인 가정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수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번역해 주곤 했다는 감독은 그 작업에서 시각과 청각을 오가는 감각을 유려하게 다루어냈다. 그는 움직임과 언어의 관계를 남다르게 포착한다. 언어가 되는 상징적 체계의 몸짓과 언어적으로 수렴되지 못하고 이미지의 영역으로 넘쳐흐르는 몸짓의 관계를 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딘 껌의 몸짓에는 자막이 붙을 때도 있고 붙지 않을 때도 있다. 간단한 연출이지만 그것을 통해 딘 껌의 몸짓은 말과 이미지, 그리고 퍼포먼스 사이를 진동한다.

이길보라, ‹기억의 전쟁› ©시네마달

한편, 총을 쏘는 남한군을 재연하는 딘 껌의 움직임에 또 다른 현재의 움직임들이 달라붙는다. 이번엔 진짜 총소리가 들린다. 관광지가 되어버린 베트남의 항쟁지에서 관광객들이 사격 체험을 하고 있다. 베트콩 항쟁지였을 땅굴은 이제 관광객들이 웃으며 기념 촬영을 하는 곳이 되었다. 전쟁 기념관으로 보이는 곳에는 관광지를 추천해주는 ‘트립어드바이저’의 점수표가 붙어있다. 또 다른 씬에서는 남한군의 참전을 기념하는 디오라마에서 총소리와 함께 전투의 승리를 재연하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베트남의 기념관과 남한의 기념관이 이상한 방식으로 뒤섞인다. 엉키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곳과 저곳의 위령비와 기념비, 참전 용사들의 기념식과 베트남에서의 위령제가 충돌하면서도 연결되어 이 세계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들의 적대(antagonism)가 은근히 내비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의 참전용사들은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여기에서 그들은 대부분 군복을 차려입은, 익명에 머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감독은 그들을 악마화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하지만 카메라는 결코 객관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사실 객관적인 위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들은 양민 학살을 전면 부인하는 모습으로만 비추어진다.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었다거나 전쟁에 수반되는 어쩔 수 없는 피해였다는 전형적인 논변을 펼치고, 자료와 사진들을 내보이며 자신들의 말이 진실이라 외치기도 한다. 여기에서 다큐멘터리는 기꺼이 진실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밝히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할까? 진실은 애초에 권력의 문제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해 한쪽만을 승인하는 메커니즘으로 속류 정치가 작동하기도 한다.
‹기억의 전쟁›은 진실을 좇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처음과 끝을 이루는 ‘시민평화법정’에서 응우옌 티 탄은 직접 증언에 나서 이야기한다. 한국어 질문에 통역을 통해 베트남어로 말하는 그의 증언 장면에는 총소리, 개 짖는 소리, 종소리 등 말에서 그려지는 이미지에 따라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다큐멘터리답지 않은 픽션적 효과다. 그뿐만 아니라 이 다큐멘터리는 ‘시민평화법정’의 판결 장면을 결론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일정 부분 결론으로 제시될 수 있는 가상적 정의구현의 장면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과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수단으로 증언자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 대신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은 응우옌 티 탄이 ‘위안부’ 집회에 나가 연대하는 모습이나 그를 찾아온 남한의 중학생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전쟁으로부터 여러 세대를 건너뛰고, 피해국과 가해국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도약들이 눈에 들어온다. 피해자라는 정해진 자리에 머물지 않고, 언제든지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힘을 합칠 수 있는 주체라는 것이 그곳에서 드러난다. 응우옌 티 탄은 단순한 피사체의 자리에서 벗어나 그렇게 투쟁의 주체가 되어간다. 영화는 그가 대한민국 정부를 대상으로 국가 배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텍스트와 함께 끝이 난다.
영상은 항상 과거를 담아내지만 그 이미지가 뿜어내는 빛은 현재를 밝힌다. 그리고 이런 다큐멘터리는 진실을 기록하기보다는 현실의 사건을 만들어낸다. 스크린의 불빛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명료하게 빛나는 과거의 진실이나 카메라가 비추었던 피사체들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와 ‘라이따이한’ 문제를 교차하고, 퐁닛 퐁넛 마을의 학살과 노근리에서의 학살을 뒤섞이게 하는 응우옌 티 탄으로부터의 도약은 화면 바깥으로 더 확장되어 나간다. 나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의 역사로 기억해내는 연결들이 조금씩 포착된다. 이제야 그때 그들의 전쟁이 아닌, 지금 여기 나의 전쟁이 보인다.

글 권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