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도록, 우리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모든 예술에는 저마다의 아우라가 있다고. 제7의 예술이라 부르는 영화가 등장했을 때 연극과 영화 사이 그 엄청난 간극을 말하기 위해 아우라라는 개념이 도입된 이래로 쭈욱. 배우의 땀방울과 숨소리, 흔들리는 호흡,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공기 같은 것들은 그 공연을 단 한 번의 순간으로 만들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분자들의 화학적인 결합마저도 하나의 공연을 만드는 요소였다. 같은 내용의 공연이 여러 회차 진행된다 해도 그날, 그 순간의 공연은 오로지 단 하나의 공연인 셈이었다. 말하자면 예술이란 그 순간 동안 나의 세계가 끝없이 팽창하는 총체적 경험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복제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진이나 영화마저도 사실은 관객의 기분, 머무는 장소, 그 공간의 향기와 온도 같은 것들이 모두 모여 하나의 경험적 순간으로서의 예술이 완성된다는 점은 같다.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이야말로 현장성과 경험에 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음악회를 보러 가고, 무용을 관람하고, 연극과 뮤지컬을 즐기며 영화관과 미술관에서의 모든 순간을 예술이라 불러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기본 값에 문제가 생겼다. 2020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마치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창궐해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마땅한 이름조차 없던 그것, 태어나서 처음 본 ‘그것’에게는 코로나19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숨을 쉬는 것. 실제적인 삶의 기초가 위협받고 있었다. 생과 사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문화나 예술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어갔다. 우리가 흔히 여가(餘暇)라고 부르는 영역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나중으로, 다음으로 미뤄두어야 했다. 예술을 둘러싼 모든 순간이 수축에 수축을 거듭하며 마침내 0에 수렴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 나중의 영역에 걸고 있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은 한없이 납작해져만 갔다. 현장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워서 이 파급력은 예상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관객을 직접 마주하는 공연예술 분야는 직격타를 맞았다. 진행 중인 공연들은 물론이고 준비 중인 공연들 역시 언제 재개될지 알 수 없는 채로 일시 정지되었다. 사회적으로 위기감이 높아지고 극장 감염 사례가 보도되기도 하면서 극장가 역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간이 필요한 예술 분야뿐만이 아니었다. 청중 앞에서 녹화를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들이나 직접 현장으로 나가는 프로그램들 역시 앞으로의 상황을 장담할 수 없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 예술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어둠이 걷히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났는지도 알 수 없고 앞으로를 예측할 수도 없다는 ‘그것’은 이제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그 존재와 공생하기 위해 세상은 변했다. 변해야만 했다. 예술도 마찬가지였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모든 예술인은 햄릿이 되었다.

SNS에는 이른바 #슬기로운_집콕생활 붐이 불고 있었다. 집 밖에 나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콕라이프’를 꾸려나갔고 이것은 사회적인 흐름이 되었다. “거리는 멀게 마음은 가깝게”라는 슬로건을 내건 만큼 물리적인 거리는 벌리되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변화에 가장 민감한 대중문화 콘텐츠는 이 흐름에 빠르게 탑승했다. 직접 만나고 소통할 수는 없지만 화면으로나마 순간순간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예컨대, MBC의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는 ‘방구석 콘서트’ 편이 방영되었다. 프로그램 이름과 방구석 콘서트라는 콘셉트가 잘 어우러졌고 SNS상에서 유행하는 요소들을 잘 배치해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은 지난 시즌 방영된 ‹미스트롯›처럼 경연자들이 관객을 초청해 펼치는 콘서트 대신 노래 배달 서비스 ‘사랑의 콜센터’를 택했다. ‹미스터트롯-사랑의 콜센터› 편은 시청자들의 사연을 받고 원하는 노래를 들려주면서, 많은 관중을 수용해 현장감 넘치는 공연 실황을 중계하는 것보다 더 시청자와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케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선택, 변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이 기존에 고정되어 있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영역들에 새로움을 불러일으킨 이 상황은 말하자면 또 다른 가능성의 확장이었다.
모든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만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적은 대중문화와는 달리 순수예술의 경우 어려움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취소된 공연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거나 미술 전시에 미리 한정된 수의 관객들을 정해 예약을 받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 노력들이 뚜렷한 대안이 되기는 어려웠다. 입체적인 사운드 구현을 위해 전용 공간이 마련되어있는 오케스트라나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는 전시의 경우 화면을 통한 관람 자체에 만족도가 덜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역시 시청각적으로 입체적인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아직 순수예술은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거대한 대재앙은 우리에게 물었다. 같이 살 것인가, 같이 죽을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세계가 변화했다. 일상이, 내가, 삶이 변했고 예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위기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사실 변화가 두려워 나날이 권태로워지는 그 나태함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살아남기 위해 강제적으로 선택한 이 변화 너머에 있다. 이제 우리의 예술은 새로운 방식으로의 확장을 시도했다. 떠밀리듯 발을 내디딘 새로운 곳에 서 있는 예술은 지금까지 그려왔던 원의 궤도를 벗어난 새로운 점에서부터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글 전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