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교양서, 대중서, 혹은 입문서라 불리는 책들은 모두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어떤 분야이건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깊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기에 전문 용어를 남발할 수 없다. 모두가 아는 말을 사용하여 전문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물론 그것이 또 바로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편으로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교양서를 본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군데군데 보일 것이다.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들에게는 수박 겉핥기로 보일 수 있고, 수많은 견해가 중첩되어 있는 임시적인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적은 분량에 풀어내는 것을 보면 아쉬운 구석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문서와 교양서는 넘쳐난다. 이 넘쳐나는 공급에는 그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분야의 지식을 쌓을 수 없고, 더더욱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 데에는 물리적, 시간적 한계가 있다. 또한 그리 전문적으로 알고 싶지는 않지만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읽기도 한다. 때로는 그저 알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책을 찾고는 한다.

그렇기에 입문서의 역할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누군가를 한 분야로 이끌어내는 문을 열어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을 완전히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일반화의 오류를 조금 범하자면 입문서들은 이 분야가 딱딱하고 고루한, 네가 상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에 힘쓰고는 한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대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다. 함께 즐겁자는데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의 의문이 언제나 있다. 과연 그 즐거움을 읽는 독자인 내가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이다. 물론 잘 써진 글로 어떤 분야의 매력과 즐거움, 에피소드를 듣는 것은 흥미롭겠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인슈타인의 어릴 적 일화를 듣고 웃었다 해서 내가 물리학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입문서라는 것은 사실 가벼운 책은 아니다. 꽤나 무거운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책이다. 심지어 가벼워 보이기까지 해야 하는 의무마저 지니고 있다. 청각적 요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음악을 언어로 이야기하고 풀어내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감정적인 언어에 얽매이기도 쉽고, 지식 위주의 글이 되면 음악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스럽기 때문이다. 서양예술음악, 소위 말하는 클래식 역시 예외는 아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 현재와는 동떨어진 느낌부터 어딘가 차려 입고 가야할 것 같은 연주회장, 그리고 어렵고 길고 어려운 수많은 외국어로 된 용어들. 심지어 그 용어들은 영어도 아니다. 그러니까 클래식을 듣고 싶어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감조차 잡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용어들의 난관을 극복했다 하더라도 대체 이 음악들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역시 큰 난관이 될 것이다.

나 역시 음악 전공생으로 클래식에 관한 이야기와 질문들을 받아 왔다. 어딘가 있어 보인다는 것부터 시작해 너무 어려워 보이더라, 연주회장에서 잤다는 일화까지.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 클래식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꽤나 난감할 때가 많다. 그 수많은 곡들 중에서 과연 무엇을 골라야 좋을지와 더불어 도대체 무엇을 추천해야 이 사람이 클래식을 싫어하지 않을까 하는, 전공자의 사명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클래식은 어려운 음악이 맞다. 음악은 언어와도 흔히 비교되는데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음악들에 의해 일종의 음악적 모국어가 생겨나고, 어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쉽지 않듯이 새로운 음악을 듣는 것은 분명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기억이 생겨나던 시점부터 집에서 클래식이 계속 흘렀고, 어느 날부터 피아노를 치게 되어 음악학을 전공하게 되어버린 나는 사실 클래식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익숙해진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클래식에 입문하는 법을 모른다. 이는 다시 말해 내가 다음의 책들을 독자의 마음으로 읽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왠지 클래식한 사람›, ‹퇴근길 클래식› 이 두 권은 매우 닮아 있다. 출판된 시기도 비슷하고, 비슷한 마음을 지닌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펴낸 책이다. 김드리는 작곡을, 나웅준은 트럼펫을 전공했다. 두 사람 모두 클래식 전공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음악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자 클래식을 사랑하는 마음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두 권은 모두 클래식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클래식은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클래식의 세계로 이끌고자 한다. 둘의 접근 방식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먼저 김드리의 ‹왠지 클래식한 사람›은 ‘오래된 음악으로 오늘을 위로하는’이라는 소제목과도 어울리게 각각의 목차를 왠지 클래식한 기쁨, 즐거움부터 슬픔, 불안, 분노 등 15가지의 인간의 감정으로 정하여 각각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는 음악들을 소개한다. 김드리가 제안하는 클래식으로의 입문은 감정으로서의 입문인 셈이다. 각각의 감정 코너에서는 꽤나 다양한 음악들이 소개되고 각 작곡가들의 삶, 혹은 독특한 에피소드들이 함께 소개된다. 다만 특이한 것은 작가가 잡고 있는 클래식의 범주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모차르트, 베토벤 뿐만 아니라 서태지와 비틀즈까지 등장하며 클래식의 의미와 범위를 확장시킨다. 이것이 작가가 클래식이 가지고 있는 중의적 의미를 풀어낸 것인지 혹은 클래식이 이렇게 쉽다는 것을 의도한 것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말이다. ‹퇴근길 클래식›의 경우 조금 더 체계적으로 안내하고자 한다. 첫 장인 ‘일상속의 클래식’에서는 말 그대로 일상 속에서 접했던 클래식 명곡들에 대해 설명하며 거리감을 좁히고자 하고, 다음은 음악사의 큰 줄기를 서술한다. 저자는 거리감을 좁히는 방식으로 일종의 풀어쓰기를 시도한다. 오페라의 등장인물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거나 서양음악사의 인물들을 우리가 알 법한 유명인에 비유하는 등이다. 3장에서는 클래식 악기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 그리고 마지막 4장은 일상 속에서 클래식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안내한다. ‘사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는 하나 그 안내 방식에 있어서는 김드리의 방식과 아주 다르다 말하기는 어렵다. 일상 속에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클래식의 곡들과 연관 지어 소개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두 책 모두 방대한 양의 음악들을 소개하고 있고, 각자의 방식으로 체계를 부여하여 안내자를 자처한다. 이 책을 읽고 클래식으로 빠져들 것인지 아닌지는 아마 읽는 독자의 몫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저자들처럼 클래식과 사랑에 빠지게 될 수도 있고, 역시 자신과는 안 맞는다고 단언하게 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부디 전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두 책은 어느 날부터 이미 클래식 안에 있던 내게는 여러 질문을 던져주는 책들이기도 했다. 음악에 관한 오랜 질문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음악에서 무엇을 들을까, 가사조차 없는 음악에서는 무엇을 들을까, 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음악을 듣게 만드는가. 과연 우리는 그 음악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낭만주의적 천재 일화만을 듣는 것일까, 우리가 작곡가들의 가십거리를 아는 것이 음악에 대한 친근감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 말이다. 그 답은 누구도 쉽게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난 내가 음악에 처음 빠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린 시절 햇살과 함께 헨델의 하프 협주곡이 들려오던 순간 내가 기억하는 건 그곳에 헨델이 ‘음악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없었다.

두 권의 클래식 입문서는 정말로 입문서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큰 지식이 없어도 읽기 쉬운 언어로 되어 있고 많은 양의 음악을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 일종의 엑기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디 이 책을 읽게 되는 이들이 책에 담긴 음악을 들어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사실 음악은 들을 때, 가장 빛난다. 그저 ‘들을 때’ 좋은 것, 그것이 음악이 지닌 가장 큰 힘일 것이다.

글 윤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