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로 이 글을 시작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해본다. 2019라는 숫자가 적힌 달력을 넘긴 게 얼마 전 같은데 계절은 내가 이 낯선 숫자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먼저 앞서가는 것 같다. 매번 시간이 빠르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인간은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새삼스레 숫자를 세어볼까? 하나, 둘, 셋, 넷……아홉, 열. 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다가 도착한 지점은 열이다. 10이라는 무언가 완성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숫자 바로 앞에는 우리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숫자가 있다. 아홉. 구라고 불러도 좋은 이 숫자. 그저 10의 앞에 있다는 것 외에 별달리 이야기할 게 있을까 싶은 이 숫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특별한 지점이 있는 것도 같다. 열이 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홉이니까. 다시 말해 아홉을 넘어야만 열은 오는 것이다.

아홉을 넘어야만 오는 열의 의미는 열아홉에서 더욱 강력해진다. 미성년 그리고 청소년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스무 살 전의 열아홉을 떠올려보자. 12월 31일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자정이 지나면 모두 가능해지는 마법, 그 마법은 바로 스물과 열아홉 사이의 선을 넘는 순간 벌어지게 된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도 되는 것 사이, 그 철옹성 같았던 벽이 실은 머리카락보다도 가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아홉을 넘어 열을 밟게 된다. 그 선, 그러니까 금(禁)을 넘은 스물이 마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홉과 열아홉을 지나 이번에는 금이다. 19라는 타이틀의 매거진을 받아 든 누군가는 19금(禁)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시작해보려고 한다. 영화 ‹말모이›의 금(禁)에 대해.

역사적 금(禁)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엄유나 감독의 ‹말모이›는 한 번 더 주목할 만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학회가 고군분투하며, 제목 그대로 말을 모은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서사적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말모이›에 담긴 첫 번째 금(禁)은 단연 조선어가 금지되어 있는 당대의 사회 현실 그 자체이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고 그 중 하나가 조선어 금지 정책이었다. 창씨개명은 물론이거니와 학교와 사회에서 조선어 사용은 일체 금지되었다. 이는 조선어를 말살시키고 일본어를 강제하면서 조선인이 주체적인 사상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말에는 정신이 깃든다”는 영화 속 인물들의 말을 증명하듯 일제의 감시는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조선인이 조선말을 쓰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라 금지된 일이었다. 극 중 글을 모르는 김판수가 류정환에게 글을 배워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 김판수의 아들 김덕진이 “아버지 글을 배우시려면 차라리 일본어를 배우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덕진이의 같은 반 친구가 벌을 받던 도중 자신도 모르게 “엄마야!”라는 말을 뱉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에게 체벌을 넘어선 구타를 당하는 장면은 이런 사회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영화 연출-서사적 금(禁)
역사적인 현실의 금기를 넘어 조금 더 영화 안으로 들어가보자. ‹말모이›에는 연출적이고 서사적 측면에서의 금기 역시 존재한다. 영화에는 이른바 ‘나쁜 것들’이 금지되어 있다. 금지라기보다는 부재라고 말해야 좋을까? 영화에는 최근의 한국 영화들이 너나할 것 없이 뽐내온 음모, 암투, 살인, 배신, 불륜과 같은 은밀한 금기요소들이 금기된다. 물론 중간에 조선어학회 회원 중 한명인 민우철의 배신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배신은 아내를 살리기 위한 선택으로 비춰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배신이 일제에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이용당하는 모습을 통해 측은함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의 흐름에 반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인지 호평과 동시에 촌스럽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영화 외부, 관객의 금(禁)
촌스럽다는 혹평은 어디에 기인하고 있을까? 물론 ‹말모이›가 다소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련된 서사적 반전이나 연출도 없을 뿐더러 서로를 오해하고 있던 인물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동지’가 된다는 흐름, 인과 관계가 충분치 않은 몇몇 장면들은 작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말모이›는 착한 영화 혹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들의 틀 밖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한 영화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존재해야만 하는 분명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착하게 살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라고들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뺏어야 한다고들 한다. 이에 응답하듯 언젠가부터 대중문화에서 권선징악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선함의 가치가 퇴색되어 갈수록 사람들은 더 이상 악의 대척점에 서있는 선을 원하지 않게 되었고 최악과 차악의 대결이 스크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는 더 이상 영화 홍보의 카피멘트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을 단순히 반영한다는 차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대체 언제부터 정의로운 영화를 촌스럽다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되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말모이›는 영화 어법에서 금기되었던 다소 아둔해 보이는 순수함을 다시금 그러모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이를 통해 낡고 고리타분해 보였던 선의 힘이 여전히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면 “말에 정신이 깃든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이 더 값지다”는 노골적인 대사와 메시지들이 촌스럽다고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우리들의 비뚤어진 세련됨은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결국 영화를 판단하는 우리의 기준에도 암묵적인 금기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말이다.

말하자면 ‹말모이›는 금(禁)을 이야기하기 위해 금지된 방법으로 이야기하는 영화다. 이 영화를 추동하는 힘은 분명 금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의 차례가 아닐까? 금기의 힘으로 추동해온 이 작품을 통해 지금껏 터부시 되어왔던 낡은 가치를 돌아보는 것. 그간의 금(禁)을 깨고 새로운 금(金)을 만들어내는 건 영화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글 전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