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파트너› 의 장면

연습이 한창이던 어느 금요일, 한 시에 시작하는 연습에 앞서 열두 시쯤 세정(전문사 연기과 15)과 먼저 만나서 작품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 그와 나는 2018년 여름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에서 작가와 배우로 만났다. 지난 여름에 이어 다시 인큐베이터 워크숍에 참여했다는 그가, 어떤 작품으로 이 겨울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전날 그가 보내온 ‹파트너›의 대본을 읽었다. 1월 25일, 연습 3주차 즈음이라는 그 날까지 정리된 것만도 50장에 가까운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야기, 이 6이라는 숫자는 ‹파트너›의 무대에 오르는 배우의 숫자 여섯 명과도 일치했다. 처음 만났지만, 어딘가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대본에 쓰인 여섯 개의 배우 이름에는 아는 이도, 전혀 모르는 이도 있었다. 이름의 주인들이 어떻게 이 이야기를 그려낼지 헤아리는 동안, 나는 짧게 웃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려 목을 가다듬기도 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자연스레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여섯 개의 이야기들은 그들이 다루는 소재와 내용이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파트너라는 배역이 등장함과 동시에 하나로 묶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런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 쯤, 지난 여름 공연에서 파트너였던 세정이 카페로 들어왔다.


돌곶이 인큐베이터 워크숍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연극원 학생들이 통칭 ‘인큐’, ‘야합’이라고 부르는 공연이 올라간다. 두 프로그램 모두 연극원 학생들이 학과 수업에서 벗어나 직접 창작하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공연을 준비한다. 소정의 제작비와 무대를 지원받고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라면 후속 지원을 받는 혜택이 있지만 대본부터 시작해 스탭 구인, 무대, 소품까지 모든 것을 학생들 스스로 해내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나의 경우에만도, 1학기 종강 후 한 달 반은 인큐 준비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여름이 지독하게 더웠는지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날만큼 바쁜 한 달이었다.

세정은 연극원 재학 중 총 세 번의 인큐 공연에 참여했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인큐의 첫 번째 장점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큐 선정작은 대부분 순수 창작물이거나 기존의 작품을 재구성한 것이다. 초연의 일원으로서 작품 개발에 참여하며, 작품을 만드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 그것은 오랜 기간 작업을 해온 세정에게도 늘 흥미로운 일이다. 공연을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새로운 배움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서 나 역시 연극원에서 배운 바이기에 크게 공감했다.

힘든 점이라면 응당 적은 제작비이지만, 인큐 자체가 작품 개발과 발굴에 성격을 두고 있으니 공연보다는 개발 전 단계라 여기면 그 또한 납득할 만하다. 그럼에도 60만원이라는 제작비에 맞추기 위해 공연을 빈 무대에서 올릴 수는 없으니, 무대나 소품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지원이 주어지면 한결 나을 것이다. 이전 학기 공연의 소품들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목록화되어 있다면 혹은 제작사의 구 세트들을 지원받아 이를 바탕으로 준비하는 공연이라면 어떨까? 무언가를 구체화하고 키워낸다는 ‘incubate’, 기술과 아이디어를 실험해보는 장인 ‘workshop’의 이름을 따르는 데에는 조금 더 보완되어야 하는 지점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유지될 프로그램이라면 짧은 준비기간 작업 진행이 더뎌지지 않도록 이를 도와주는 기술적인 풀이 갖춰져야 한다는 데에는 아마 모든 연극원 학생들이 동의할 것이다.



협업자, 동기, 친구, 파트너…
전문사 연기과 15학번 네 명, 전문사 연기과 17학번 한 명, 예술사 연기과 09학번 한 명 으로 이뤄진 ‹파트너›의 배우진들. 오십여 장의 대본이 무색하게, 세정이 처음 꺼낸 말은 처음부터 ‹파트너›를 공동창작으로 진행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함께 연극원 과정을 수료한 동기이자 오랜 친구들이 마지막 방학에 무얼 하든지 함께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세정이 섭외한 극단 작은 방의 신재윤 연출은, 그들에게 공동창작을 제안했다. 문제는 ‘무엇’을 창작할 것이냐는 지점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한창 고민이 이어지던 중 던져진 화두는 ‘관계’였다. 그렇게 ‘파트너’라는 이름이 그들의 화두로 던져졌다.

그들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그렇게 각자에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중요한 관계, 항상 생각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파트너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준비해온 자신만의 에피소드들이 이야기로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극 중에 등장하는 ‘파트너’라는 배역은 탈을 쓰고 등장한다. 원래는 ‘바야바’와 같은 다소 의미심장한 이름이 있었지만 이내 그 의미를 배우들이 관객의 손에 직접 쥐어주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버렸다. 그저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개개인의 삶에 꼭 하나씩은 존재하는 이들로 다가가기를. 관객에게도 그 탈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파트너가 보이기를 원했다.

오히려 작업 초반에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정리되었던 것 같은데, 진행되면서 점점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워졌다. 이는 ‹파트너›의 이야기가 더 풍성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끌어내주는
또는 나에게 이야기를 심어준 이들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극작의 기본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일단 ‘써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세정은 기본적인 극작에 대해 한계와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가장 솔직한 말을 하자니 무대 위에서 너무 유치하게 느껴질까봐 부끄러웠고, 계속해서 바꾸어도 충분히 정제되지 않고 터져나간 말들이 눈에 밟혔다. 세정은 ‹아버지의 기억 훈련›이라는 대본을 썼는데, 이는 그가 가장 하기 싫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세정의 안에는 아버지가 심어준 관계성에 대한 화두가 있었다. 자기 얘기를 하자니 자의식이 개입하고, 무대 위에서 청승을 떠는 것처럼 보일까봐 도저히 못하겠다고 여러 번 말했다.

내 이야기를 하니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것 또한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세정에게, 신재윤 연출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정은 해냈다. 이를 해내기까지 3주동안 그들은 줄기차게 ‘대화’를 했다. 이는 세정 외의 다른 다섯 명의 배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 과거에서부터 무대로 이야기를 완전히 빼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세정 또한 그들과의 대화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서로에게 느끼는 편안함 덕분에 이를 진심으로 들어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이야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세정에게는 파트너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내 것을 나눠주는 일’이라 답했다. 이런 답을 알려준 것은 삶에서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경험들이었다. 물질적인 것을, 혹은 마음을 준다거나, 홀로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거나 하는 일들. 온전한 나의 것이라 치부되던 나의 몸과 나의 시간을 할애해 상대방에게 쏟는 일. 그런 일을 하고 나면 세정은 그의, 그리고 그 역시 세정의 ‘파트너’가 되었다.


무대 위에서,
기꺼이 서로의 파트너가 된다는 것

연극 작업 안에서 ‘파트너’라는 개념은 어떨까? 세정은 작업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국 ‘피치 못한 희생’이라고 여태 생각해왔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의 노력과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맞지 않는 사람이어도 맞춰가야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이 흘러가더라도 여전히 마음을 쏟아야 한다. 작업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자기가 원하는 100퍼센트를 실현할 수 없다. 결국 개개인이 조금씩 희생한 것들이 모여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한편 요즘 들어서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목 언저리에 한 번씩은 걸린다. 우리가 꼭 ‘희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지금 이 단어를 꺼내며 나 또는 내 옆 사람의 감정이 불가피하게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절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마음을 맞춰보려는 노력, 서로의 욕심을 조금씩만 내려놓고 조율해가는 일이 대단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희생이 수평적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닐까, 하는 나의 말에 세정은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작품을 할 때면 항상 느끼는 바가 있다고 했다. 연극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실제 삶 또한 이 정도로 살아내지 못했을 것 같다고. 작품이 잘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곱씹고 반성할 수 있었고, 작품이 잘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신감이 차올랐다가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맨땅에 헤딩’식으로 시작했는데, 우려한 것보다 굉장히 잘 나온 것 같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배운다’는 것이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일까.

‘잘 될 거예요, 여름에도 어쨌든 공연은 잘 올라갔잖아요.’ 하는 나의 말에 그는 웃으며 핀잔을 준다. ‘에이, 여름 인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니까 좋았지.’ 여름에도 우리는 똑같이 ‘맨땅에 헤딩’이었던 것 같은데. 금세 잊고 웃는 세정을 보며 그는 다른 이에게 참 좋은 파트너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 그의 말처럼 ‘피치 못한 희생’을 담보로 한다면, 좋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 한 계절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글 신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