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나에게 있어 창극에서의 ‘새로움’이란 전혀 새롭지 않음으로 다가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현재 창극의 큰 틀이 되었다 말할 수 있는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신창극, 새로운 형식의 창극이라는 말이 꾸준히 사용되고 있으니 사실 창극에서의 새로움은 다시 그 역사를 쓸 수 있을 만큼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더딘 새로움의 역사 속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을 때 즈음, 또 한 번 새로움을 입은 창극이 눈에 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창극의 만남, 그리고 박지혜 연출가.

양손프로젝트의 작품으로 적지 않은 매니아 층을 거느리며 미니멀한 무대를 특유의 모던한 감각과 배우들의 움직임, 섬세한 연출력으로 채워나가며 연극분야에서 입지를 공고히 한 박지혜 연출가. 그가 해석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그것들로 가득 채워진 창극이라면, 반복되던 새로움에 한번 더, 기대를 걸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국립극장

최초의 창극
창극 ‹시›의 형식은 기대했던 것과 같이 확실히 기존 창극의 틀을 벗어난 최초의 시도였다. 지금까지의 창극이 비교적 서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창극 ‹시›는 과감히 서사를 거둬내고 있었다. ‹시› 안에서의 배우들은 촘촘히 짜여진 이야기를 들고 관객을 마주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리와 움직임에 집중하여 꾸며지지 않은 개인들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주려 의도한 느낌을 주었다. 범주를 정하기에도 방대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라는 큰 틀은 관객들에게 서사보다는 작품에서 뱉어내는 언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각 배우들은 이 안에서 조금씩 보여지는 삶의 단상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물론 파티가 끝난 공간, 어떤 과거의 회상, 인생 속 순간에 대한 기록과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서사의 구성은 초반 공연의 몰입을 어렵게 하기도 하였다. 정확히 어떠한 시간이 지나간 자리인지에 대한 언급도 극의 전사(前史)도 일체 제공되지 않는 구성은 일부 관객들에게 당혹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창극 ‹시›의 첫 시작은 이렇듯 조금 당황스럽기도 거칠기도 하지만 ‘시가 나를 찾아왔어’라고 말하는 담담한 고백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소리로서, 움직임으로서 혹은 담담한 독백으로서 내뱉는 시의 언어 하나하나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다.

©국립극장

배우가 아닌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시›의 무대는 네루다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과 같이 충만함이 지나간 공허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 공허한 공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이를 시로 남겼던 네루다의 모습처럼 배우들의 등장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조명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그림자로, 또는 자신의 흔적을 찾듯 무대의 한 부분을 찾아 각자의 언어를 만들어 가는 배우의 움직임으로 채워졌다. 배우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따라 소리로써 시를 표현하거나 움직임과 함께 시를 낭독함으로써 극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담담히 뱉어내는 시어 안에는 배우 자신의 이야기 혹은 그들만의 감성이 담겨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어우러진 사이키델릭 사운드는 극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작품안의 언어와 창자의 소리에 몰입을 도와주었다.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시 속에 나의 삶 혹은 나만의 감각이 승화되기도 하였으며 한 부분의 시는 또 다른 나의 이야기로 환원되는 경험을 만들어주기도 하였다.

©국립극장

선을 넘어 또 다른 새로움으로
창극 ‹시›는 작품의 구성을 넘어서도 다양한 곳에서 이전과는 다른 형식을 가진 작품이었다. 먼저 창극에서의 기본적인 구성이라 볼 수 있으며 극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도창의 존재를 배제한 것이 눈에 띈다. 비워진 도창의 자리는 각 배우에게 거의 동일한 분량이 부여되는 것으로 변화하였으며 각자가 만들어낸 감각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창극에서 조금씩 존재하던 서사의 중심인 배우와 전반적인 극의 흐름을 이끄는 도창 사이의 간극을 완벽히 다른 구성으로 변형시켜보려 한 시도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전통적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창극 ‹시›의 모습을 창극이라는 단어로 포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들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대부분의 시각이 창극의 새로운 서사를 찾아야 한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을 때 형식의 선을 넘어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으며 이는 또 다른 새로움을, 그리고 창극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마저 들게 하였다. 또한 이번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아직까지 창극에서는 낯선 공동작업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그동안 양손프로젝트의 작업을 지켜본 관객들이라면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고 실험하며 만들어간 작품을 볼 수 있었겠지만 창극에서만큼은 이러한 작업이 매우 생소하면서도 반가운 변화 중 하나이다. 누군가가 작품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기본적인 형식이 아닌 배우와 연출가, 극 안에 소속된 모든 인물들이 함께 소통하며 수평적 구조에서 만들어간 작품은 작품에 반영된 배우들의 감각으로 발현되었다. 공동창작과정에서 오랜 시간 각자에게서 성숙된 시의 언어는 단어의 반복과 음절의 늘어트림, 정적, 호흡 등으로 나타나 각자의 이야기로 체화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관객들의 관심 속에서 창극 ‹시›가 막을 내렸다. 여운처럼 남은 감각만을 잔뜩 둔 채로. 창극 ‹시›가 남긴 나에게 남긴 메시지는 너무나도 많았다. 텍스트의 한계를 넘는다면 어떠한 텍스트도 창극이 될 수 있다는 것, 전통적인 악기 없이도 우리의 장단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 교훈이 없이도 이야기가 되는 것, 가끔은 삶 전체를 창극에 담아볼 수도 있다는 것. 다양한 감각들의 집합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또 다른 메시지를 만들어내기도, 새로운 감각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극의 시작처럼, 창극 ‹시›의 시간은 지나가고 잔상과 추억만이 남았다. 이제 이 빈 공간을 또 다른 새로움이 채워주지 않을까. 추상적인 심상들이 언어를 만나 형태를 갖추며 만들어지는 시와 같이.

글 신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