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의 능선을 넘어 스물이 된 사람들을 ‘이룰 성(成)’ 자를 써서 성인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자연히 나이를 먹으며 성인이 되지만, 한국의 문청들에게는 작가로서 한 명의 ‘성인(成人)’이 되는 독특한 관문이 존재한다. 바로 신춘문예다.
아홉수 미신의 정확한 역사적 유래나 근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10진법 때문에 아홉수가 생겼다고 추측한다. 9는 10에서 1이 부족한 미완의 상태이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직전의 가장 긴장된 상태다. 그러나 미완의 숫자라 불길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9부 능선에 이르렀다는 말은 그토록 바라던 고지가 코앞이라는 긍정의 뜻으로 쓰인다.
2019년에도 하나의 능선을 온전히 넘어 문단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한 이들이 있다. 올해의 새로운 얼굴들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에게 건네고 있을까.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봄직한 계절, 봄이 어느새 다가왔다.
현실이 픽션보다 무참할 때
문학은 사회성이 짙은 활동이다. 신춘문예 역시 사회적 의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흔적이 있는 작품을 요구한다. 그래서 다양한 약자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신춘문예의 주요 소재일 수밖에 없다. 발표된 심사평들을 참고하면 올해 응모작들은 주로 이런 소재를 다루었다. 가난, 해고, 폭력, 자살, 가족, 청년실업, 성폭력, 동성애, 노인문제, 다문화가정, 코피노, 난민, 재건축, 참사 이후, 게임, 요리, 직장 왕따, 질환, 반려동물, 소외, 불안과 전락. 젊은 작가들의 눈이 향한 그곳에서 우린 동시대의 징후들을 발견한다.
그중 김혜지의 ‹꽃›(매일신문)은 가장 정면으로 사회고발을 시도한다. 소설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인 주인공이 라이터와 시너를 들고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후 대부분은 공권력, 제도, 기성세대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한 과정에 대한 ‘나’의 건조한 회상이다. 이 건조한 거리두기는 사람이 사람에게 던지고 행한 그 무참한 말과 행동들을, 날것의 잔인함을 우리가 더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현실고발 이상의 문학적 형상화가 다소 아쉽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를 정색하고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 이 작품만의 미덕이다.
장희원의 단편소설 ‹폐차›(동아일보)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근교에 머물며 폐차장에서 일하는 주인공과 그의 동생이 고물차를 처리하기 위해 한밤중에 폐차장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춥고 캄캄한 시골길 위에는 주인공과 동생, 고물차, 그 차에 치여 숨진 고라니, 거동이 불편한 노모, 줄에 묶인 채 컹컹 짖는 개들, 폐차장에 고물을 훔치러 온 어떤 부자(父子)까지, 변방으로 밀려난 외로운 존재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구체적인 사연들은 생략됐지만 오히려 생략되었기에 형제가 낯선 부자를 말없이 이해한 것처럼 우리도 이들을 이해한다. 서로 대단한 역할을 해주지 못해도 이들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은 미안함과 연민의 감정이다. 밤길을 운전해 도착한 폐차장에서 동이 터오는 마지막 장면은 이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기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정원채의 ‹암실›(경남신문)도 어두운 곳에 빛이 드는 장면으로 끝난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소녀처럼 역시 아프고 소외된 존재들을 등장시켰지만 이 이야기는 위로와 희망에 더 무게를 싣는다. ‘암실’이라는 공간이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을 붙잡을 수 있다는 역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의 형상이 떠오른다는 사실을 장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자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장미의 마음속 암실을 찾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엄습해 왔다. (…) 나는 서둘러 암실 문을 열었다. 암실 속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꽃›의 작가 김혜지는 작품을 쓰며 오래 품은 고민을 당선소감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실이 픽션보다 무참할 때, 픽션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얼른 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에, 세 작가의 저마다의 응답이 작품이 되어 우리에게 왔다.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유독 ‘청년실업’을 다룬 작품이 많았던 것도 눈여겨볼 만한 하나의 경향이다. 작품 속 청년들은 실업상태가 아니더라도 불안한 비정규직 일자리로 생활을 영위한다. 가난은 문학의 전통적인 주제이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가 자신들의 빈곤을 말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소설가 김원우와 구효서의 말을 빌리자면, “부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저항과 투쟁의 결기가 사라지고 체념 같기도 하고 달관 같기도 한 태도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1
류휘석의 시 ‹랜덤박스›(서울신문)에는 매일 부단한 실패와 상실을 경험하는 화자와 그의 분신 같은 가녀린 광대들이 있다.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로 시작하는 이 우울한 판타지는 미끄러짐의 반복인 일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서글프고 우스꽝스럽게 소화하려는 젊은 세대의 초상이다. 이들이 갇혀 있는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과 같고, 가진 것은 발목의 구멍과 빈 상자와 주머니뿐이다.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류휘석, ‹랜덤박스› 7~8연)
오선호의 단편소설 ‹버드워칭›(문화일보)은 가만히 응시하는 행위를 통해 불만과 상실을 해소하거나 넘어서려는 태도가 극대화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단계에 이른다. 심사위원들은 이를 당선작으로 밀어 올리며 “미래세대의 속내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싶어 무서워진다”고도 하였다. 주인공 기정은 번화가의 대형 신발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쉬는 날 혼자 새를 보러 다닌다. 주변 사람들이 왜 새를 보는지, 새를 보면서 무얼 하는지 묻지만 기정은 정말 싱거울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봐요, 새를.” 기정은 새를 보는 일이 인생을 보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방식을 택한 이유는 ‘무해하면서 무익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의 배경에는 자기 의지와도 무관하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기에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상실의 경험들이 있다. 기정은 자신이 밴드활동을 하던 시절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말은 말인데, 설명은 못 된다. 일단 내가 알아야 남에게 설명을 할 수 있는데,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버드워칭›은 허먼 멜빌의 바틀비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를 반복하며 모든 일을 거부하기 시작한 바틀비는, 그 미스터리한 면모 때문에 더 많은 질문과 해석을 불러온 묘한 인간형이다. ‹버드워칭›에서 기정의 말들은 싱겁고 아리송하지만 마치 바틀비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듯이 기정이라는 인물과 그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 여운처럼 머릿속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