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는 오직 나중에만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요구의 창조이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전시는 명확한 설정을 내세운다. ‘유어서치’는 새로 만들어진 맞춤형 검색 서비스이고, 우리가 찾은 두산갤러리에 펼쳐진 «유어서치: 내 손 안의 리서치 서비스»는 그것의 런칭쇼이다. 이런 맥락에서 관객은 잠재적 클라이언트나 바이어쯤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설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화이트큐브,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 공간, 회화와 조각들. 어딜 봐도 정형적인 전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가 제시하는 설정은 사람들이 이곳을 진짜 런칭쇼 현장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위한 것보다는 알면서도 속는 연극의 무대 장치 같은 픽션으로 작동한다.

전시의 큰 틀은 데이터 자본주의나 플랫폼 같은 생산수단 차원의 큰 맥락과 미술계의 문제를 엮어내는 것이다. 데이터 자본주의라는 조건에서 산업은 플랫폼화되고 있다. 소비자는 그를 통해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만,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자본에 내어주게 된다.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정보의 조각들은 교환가치를 가지지 못하지만, 거대 자본 플랫폼들은 그것을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는 빅데이터로 조직해내고 무상으로 독점한다. 그래서 어찌 보면 플랫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무임금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된다. 미디어 학자 마크 안드레예비치는 그것에 ‘사용자 생성 노동(user-generated labor)’이라고 이름 붙이며, 그 어느 때보다 까다롭고 능동적인 것으로 보이는 주체들이 오히려 플랫폼에 필요한 노동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착취당하는 구조를 이론화하기도 하였다.


©두산아트센터

전시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지점은 이렇게 이제 막 논의되고 있는 데이터 자본주의와 그것에서 파생된 플랫폼 산업 구조를 미술계를 둘러싼 문제들과 겹쳐놓고 데자뷔처럼 감각해내는 대목이다. 데이터 자본주의와 플랫폼들이 신자유주의 일반과 맞물리며 노동의 외주화는 계속 확대되고, 경쟁적으로 자신을 더 나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는 구조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미술 생태계의 작동 방식은 이러한 구조와 애초에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전시라는 플랫폼은 능동적 참여를 가장한 암묵적 경쟁과 자기 통제를 수반한다. 나아가 미술계는 유난히 낮은 임금이 쉽게 통용되는 곳이다. 독립적이고 자율성이 높은 프로젝트일수록 더 그렇다. 자조적으로 고백하건대 우리는 서로를 착취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인 재생산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 자본을 쌓아 올리거나 도래할 미래를 위하여. “사람이 미래다”라는 이곳 갤러리를 운영하는 두산의 캐치프레이즈가 떠오른다. 이렇게 미래라는 것이 자본에 전유 당해 거짓부렁 희망에나 쓰이는 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글로 풀어 보면 기획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비물질적인 데이터와 플랫폼 대한 주제를 왜 이토록 물질적이고, 고전적인 형식들로 다루어야 했을까.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2000년대 중반 이후 소위 ‘포스트 인터넷’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경향을 통해 비추어 볼 수 있다. 포스트 인터넷 작업들도 전혀 인터넷적이지 않은 물질적 형식으로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정리가 국내에서도 뒤늦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2016년 11월 월간 ‹아트인컬처›의 특집부터 시작해 2018년 가을에 나온 ‹계간 시청각›의 특집에서는 관련된 문제를 직접 다루기도 했다. ‹계간 시청각›에 실린 최종철의 텍스트는 포스트 인터넷 경향의 작업들이 다시 전시장의 조각과 회화라는 미디엄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로잘린드 크라우스를 경유하여 설명한다. 포스트 인터넷 작업은 인터넷 매체 환경을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일반적인 조건으로 상정한 이후의 작업들이고, 그에 따라 오히려 과거의 역사성을 가진 미디엄을 통해 그 안에서 시차를 구축하는 방식이 지금 여기에 파묻혀서는 결코 감각할 수 없는 변증법적 지대를 열어낸다는 것이다. 이런 지점은 “미디엄은 기억이다”라고 말하는 크라우스의 논의가 벤야민의 변증법적 역사관과 연결되는 곳이기도 하다.


©두산아트센터

«유어서치»의 작업들 역시 데이터를 매체로 쓰지도 않고, 작업의 주제나 대상으로 직접 삼지도 않는다. 이윤서의 회화부터 살펴보면, 여러 이미지가 중첩되어 걸려있는 그림들은 거친 색감의 추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빠르게 붓으로 포착하려는 흔적들의 다중노출이다. 회화는 데이터 자본 시대의 속도로 이미지를 생성하기에는 너무도 느린 매체이다. 심지어 전시장의 그림들은 전시 기간 중 몇 차례에 걸쳐 업데이트되는데, 온라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느린 물리적 택배를 활용한다. 이러한 회화의 속도와 물질성은 넘쳐나는 데이터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지금의 환경을 유비한다고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안쪽에 위치한 정유진의 ‹점쟁이 문어 파울의 부활›은 건축 재료인 샌드위치 패널과 그것에 새겨진 검은 문어의 자국으로 조형되어 있다. 예언자 문어와 그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흔적은 이미지와 존재의 문제에서 가장 근원적인 예수의 성포, 혹은 데스마스크를 연상시키며 가상과 실재, 존재와 부재, 지나간 것과 지금 그리고 도래할 것에 대한 복잡한 감각을 구축한다.

김대환의 조각들 ‹안녕 휴먼?›은 바닥재 등 건축적 요소를 활용하거나 손자국이 빼곡한 점토 조각 등으로 이루어져 전시장 전체에 흩어져 있다. 그것들은 다른 작업의 배치와 얽히며 개별 작업에서 나아가 전시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동하기도 한다. 곳곳에 붙어있는 거울과 렌즈 같은 광학 장치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스케일과 시점 자체를 표상함과 동시에 또 변주해나가며 제시된 공간 안에서 관객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다시 감각하게 한다. 이동근의 작업도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는데, 작가는 4차원의 변수(가로, 세로, 높이, 그리고 시간)의 좌표값으로 만든 3D 모델링을 조각으로 꺼내온다. 가상에서 실재로 꺼내온 그 단단한 물질은 작가의 시점과 그 입체를 다방면에서 살피게 되는 관객의 시점 자체를 문제 삼으며, 가상적 위상과 실제 물리적 공간에서의 위상의 관계를 의문에 붙인다. 김웅현은 가상의 여행 상품을 선보인다. 자동차 시트, 여행 가이드 책자, 관광을 다녀온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핸드폰과 그 안의 이미지들, 자동차 시뮬레이터 영상, 전기 모기채, 그리고 전자음 목소리가 혼란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에 관객들이 들어선다. 그 안에서 전자음 목소리가 들려주는 SF적 헛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질적인 사물들의 조합이 갑자기 이상한 개연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러한 픽션의 구축을 통해 열리는 다른 감각의 지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각 살펴보아도 개별 작업들은 데이터 자본 시대나 플랫폼 산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기획 속에 놓여있기에 유비할 수 있는 정도이다. 주제가 드러나는 곳은 픽션으로 작동하는 ‘유어서치’라는 유사-상품 설정을 통해 전시의 생산 자체를 메타한 방식으로 성찰하는 지점뿐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유물론적 토대와 그것에서 파생된 미디어 환경의 조건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직접적인 주제로 삼는 작업들보다 ‘포스트-’, 혹은 ‘-이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작업하는 것이 오히려 지금의 조건을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어떠한 정세에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너머를 상상하고, 픽션으로나마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는 것. 시차 속에서 변증법적 충돌을 만들어 현재의 별자리를 다시 그리는 것에 예술의 근원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글 권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