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수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용어인 ‘디지털 아트’. 그는 미디어 아트, 컴퓨터 아트와 같은 용어를 국내에 처음 공급했던 초기 세대 미디어 아티스트다. 예술은 때론 새로운 용어를 정의하고 장르화하는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 감각을 세우고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미디어 아티스트의 숙명 같다고 말하는 조충연 교수. 수업 첫 시간에 씨앗과 화분을 나눠주었다는 무성한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연구실엔 식물에게 최적의 파장을 손수 설치한 조명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가 가꿔 온 디지털 정원 속으로 들어가 본다.

미디어 아트와의 인연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왔는데, 입시를 준비하고 있을 당시 최민 영상원 초대 원장님이 신문에 기고하신 글이 제 삶을 바꿔놨어요. ‘영화학교가 생긴다. 젊은이들이여 오라.’ 이상하게 그걸 보는 순간 여기에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하게도 그렇게 영상원과 인연이 되어 미디어 아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피츠버그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나다
영상원 졸업 후 석사 과정으로 들어간 카네기멜론대학교는 대다수 예술대학과 달리 종합대학이라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이 있었고, 학제 간 연구가 장려되고 있었어요. 선생님들은 작품이 성공지향적이거나 트렌드를 따라가려 하는 것을 보면 “네가 진짜로 봐야 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봐라”는 식이었죠.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 지역에 어떠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자리매김하는지를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커뮤니티 협력 프로젝트로 흑인 아이들에게 곡을 쓰고, 랩으로 학교 가는 길을 설명하게 하는 작업을 한 적도 있어요. 카네기 멜론 출신인 앤디 워홀은 자기 스튜디오를 ‘팩토리’라고 칭했잖아요. 피츠버그에 있는 공장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바탕으로 예술을 하는 것과 자기가 자랐던 환경을 연결 짓고 확장해가는 것이었죠. 미국에서의 시간은 그 도시, 커뮤니티의 분위기와 연관해서 제 예술 혹은 디자인 방식들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게 됐던 계기가 되었어요.

가상현실 기반의 첨단융복합 교육 프로젝트 제작 장면

초기 미디어 작업 : 일상적인 것들의 반란
귀국 후 텍티컬(tactical) 미디어라는 예술적 접근 방식을 가지고 ‘파라사이트’라는 3인 그룹으로 활동했어요. 이미 다 노출되어 있는 소재를 활용해서 익숙한 것들을 전복시키는 작업을 했지요. 그 중 개인전 «Afourium»에서 ‹Utterance›는 A4 종이를 가지고 하는 작업인데 80년대에 시위 현장에서 제게 각인처럼 남아 있는 장면에서 시작됐어요. 학생들이 고층 건물에서 종이 뭉치를 밖으로 던지는데 멀리서 보면 폭죽처럼 퍼지는 것 같은 이미지가 인상적이었어요. ‘A4’는 정보의 기본 단위로서 통용되는 용어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하나의 매체 단위이기도 하니까 그런 것들을 연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트센터 나비에서 워크숍을 할 당시에는 보안이 허술해서 대기업 건물 옆에는 미처 폐기되지 않은 이면지들이 있곤 했어요. 그것들을 가져와서 직원들 앞에서 읽고 다시 포장해서 나눠줬어요. 당황하더군요. 그 다음부터 기업에서 이면지를 못 쓰게 사칙을 바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핵티비즘(Hecktivism)1적으로 일상에 개입하고, 정보의 기본 단위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지만 미디어적 접근이 아니라 메타적인 이해 방식을 고민했어요.

영상원 1기 졸업생, 학교로 돌아오다
영상원이 아닌 미술원 파운데이션 수업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게 오히려 다양한 실험의 토대가 된 것 같아요. 교육에 대해 더 확장된 생각을 가질 수 있던 숙련 기간이었지요. 영상원은 특히나 위계가 없고 독립적이어서 저를 특별히 아우라를 가지고 봐주는 것 같지는 않아요. 선배라기보다는 독립작가, 서로 독립자로서 만나고 있어요. 그럼에도 과의 흐름이나 방향성을 봐왔기 때문에 한국의 컴퓨터 그래픽, 미디어 아트 역사와 연관 지어 그 궤적에 대해서는 얘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SK Planet 브랜드스페이스를 위한 로봇가든 ‹더팜›

‹융합창의창작워크샵›: 수상한 강의 계획서
보통 융합이라 하면 4차 산업과 연관을 짓다보니까 아두이노2를 가지고 센서를 연결하는 것들을 기본으로 많이 생각하는데, 저는 이미 갖고 있는 도구를 활용해서 쉽게 융합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방식을 학생들과 고민하고 싶었어요. 첫 강의 계획서에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는 사람들과의 운명적 만남을 기대한다.’라고 적었죠. 가장 쉬운 도구인 몸을 사용하는 즉흥 움직임 수업이나 생명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특정한 결과를 상정하지 않고 크리틱하지 않는 것이 룰이에요. 칭찬을 통한 지지, 수평적 관계성을 계속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대개의 작품 제작은 기획안을 쓰고, 컨펌 받고 제작하여 최종적으로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과정 속에서 결과물의 형태는 계속 바뀌기에 오히려 빨리 순환시키는 방식으로 하자고 해요. 최종 컨펌 때 잠적하거나 초췌한 얼굴로 나타나는 학생들의 감정은 굉장히 복합적인 것이거든요. 프로세스에 휩쓸려 뭘 해야 할지 모르거나 실패에 대한 부담을 갖고 두려움이 커진 거죠. 차라리 그럴 바에는 후다닥 만들고, 계속 변화하는 가능성을 확인해서 그 자체를 작업으로 남겨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융합의 재정의: 나눔이 만들어내는 시너지
융합을 단순히 장르 간의 협업으로 지칭하는 것은 이미 20년 전의 방식이에요. 융합은 근본적으로 셰어링하는 것에서 출발해요. 공유 경제 얘기가 나오듯 미디어 생태계도 그런 방향으로 흐를 거예요. 그래서 일대일 교환이 아니라 전면적 오픈을 통한 협업 관계 안에서의 우연이나 우발성, 무작위성이 창발적인 모티브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고요. 학교에서도 장르 간의 통합이나 협업 정도가 아니라 시스템적으로도 자원들을 공유할 수 있는 포털이나 클라우드를 구축해야 할 것 같아요. 적어도 교육적인 목적 안에서는 공개 저작권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저는 실제로 수업 시간에 작가의 시도들을 설명한 후 60% 정도 공개된 작업 템플릿을 줘요. 그런데도 저마다 다른 작업물이 나와요. 그렇게 만들어진 파일은 또 공유하게 하죠. 혼자 제작하는 것보다 여러 명이 동시에 다양한 접근을 해보는 것이 보다 효율적으로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크리스티안 폴, ‹디지털 아트›, 조충연 역

미디어 아티스트가 꾸리는 정원
왜 학생들과 식물을 키우냐고요? 마음대로 안 되니까요. 제 수업의 빅 픽쳐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거예요. 쇼핑백에 넣을 수 있는 크기에 한정되는 과제나 모니터 속 영상만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자기를 넘어서는 엄청난 크기의 작업을 해보라는 것, 그리고 식물을 키워보라는 것이 제가 강조하는 두 가지예요. 저는 코딩을 하고 프로그래밍하는 혁신적인 제너레이티브 디자인을 하는데, 식물을 키우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제너레이티브라고 생각해요. 어떤 알고리즘을 갖고 있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죠. 예상한 대로 합성하고 그래픽을 만드는 것과 달리 우리는 식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요. 그게 바로 아트 메이킹 같은 거죠.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한 고민
학과 내에서도 정체성에 관한 고민과 어려움이 있어요. 미디어는 계속 확장해 가거든요.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 가르쳐야 하는가, 다른 플랫폼에서 보이는 저것도 영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제가 부임해서 전공수업에서 첫 해 가르쳤던 툴과 지금의 툴은 또 달라요. 그 때문에 진로 고민을 하는 학생들도 있거든요. 뭘 하고 있는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보면, 오히려 관심사를 많이 갖고 선택지를 스스로 늘렸던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늘날 미디어 또한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고요. 하나의 전공이나 영역만 고집하지 않고, 계속 그 안에서 자신의 관심사와 다양성을 계속 점검하면서 여러 작업을 해나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과가 그런 자양분을 줄 수 있는 환경이고 우리가 그러한 역동을 갖기 때문에 융합에도 접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새로운 진로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Utterance›

최근의 작업과 앞으로의 목표
고려대 병원과 함께 정신건강을 위한 가상현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트라우마가 있는 일반인 대상군에게 가상현실을 통해 뇌의 인지 작용에 개입하는 거죠.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이미지를 가져와 인지하는 단계는 굉장히 불완전한데, 이것을 보완하는 게 뇌의 인지작용이라고 해요. 인지 행동 치료에 영화적 내러티브를 활용하는 방식을 연구해서 신경정신과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몰입 환경에서 새로운 개입으로 노출되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끔 하고자 해요.

또한 융합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하고 있는 교수님들과 지금까지 했던 것을 올해 정리해서 백서를 만들어 보고자 해요. 그 안에서 나눈 담론들이 있으니 일단 한 번 정리해보고 싶어요. 우리 스스로 그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는 것이 2019년의 목표죠.

마지막으로 우리 학생들이 우수한 동료들 안에서 경쟁하다보니 좌절감에 자주 당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눅 들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작가의 작업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발견이 돼야 아는 거잖아요. 움츠린 상태로 집이나 작업실에 박혀 있으면 발견될 수 없겠죠. 자신을 노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가능성을 확인하길 바란다는 말을 학생들에게 하고 싶어요.

그에게 ‘당신만의 가든’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의 가든은 학교죠.” 학과의 전문사과정을 활성화시키는 과정에서 오픈 스튜디오를 꾸리고 있는 그는 지난해 학생들과 함께 웹 사이트를 새로 개설했다. 그들은 ‘4차 산업을 위한 역군을 만든다’는 표어 대신 ‘We Will Rock You’를 대문에 걸었다. 미디어 환경에서 스스로 원하는 것을 탐색하고 꾸물꾸물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요즘 만나는 가든 같다는 조충연 교수. 그의 바람처럼 ‘새로운 가든’이 머지않아 세계를 뒤흔들길 기대해본다.

글 전보름 | 사진 김경수 | 영상 김건희
1 기존의 컴퓨터 해킹(Hacking)과 정치행동주의(Activism)의 합성어로, 정치·사회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해킹을 시도하거나 서버를 무력화하는 기술을 만드는 주의.
2 마이크로프로세서와 입력, 출력 기능을 갖춰 어떤 기능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작은 컴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