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늘 감각의 총체, 즉 풍경으로 다가온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영화제 관람은 영화관이라는 블랙박스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가 시청각적 감각을 극대화하는 행위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영화제는 동시대 영화 예술의 경향성을 가장 먼저 포착할 기회의 장이 된다. 영화는 감독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세상이고 풍경이요, 자성적 기억 작업이기에. 5월 3일부터 12일까지 총 열흘 동안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현실의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한 감독들의 작품이 대거 상영되었다.

풍경1
‹5월 14일›, ‹히스테리아›, ‹난류›
이번 한국 단평 경쟁 부문에는 특히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 관계와 소외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먼저 부은주 감독의 ‹5월 14일›은 주인공 민주와 여동생의 결혼식이 겹치게 된 5월 14일의 하루를 보여 주며 서른 즈음의 여성, 일과 가족, 그리고 연인과 부대끼며 겪는 소외감과 지친 감정을 표현해 냈다. 정만민 감독의 ‹히스테리아›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을 뿐 절대 섞이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이채석 감독의 ‹난류›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부고 소식과 주인공이 일하는 공장에서 평소 친하게 지냈던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생기는 심리적 갈등을 풀어놓는 데 도전한다.

풍경2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 ‹1520›
독특한 장치를 활용해 영화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리는 작품들도 인상 깊었다. 문병진 감독의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는 열여섯 생일날 죽을 것이라는 무당 할머니의 유언을 듣고 빛나는 물체를 따라가 사랑을 고백하려 하는 유라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치는 큰 탈을 쓴 마스코트다. 끝내 그 정체를 알려 주지 않는 마스코트를 통해 청소년의 미묘한 감정선들을 그려 낸 작품이었다. 송문경 감독의 ‹1520›은 회사원인 주인공이 서류를 전달하러 의문의 사무실로 들어가 그곳에 놓인 자신의 개인정보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얼핏 이 장면은 사무실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그려 낸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를 연상하게 한다.

풍경3
‹병훈의 하루›, ‹선화의 근황›
감독이 연출과 연기를 동시에 한 작품들도 있었다. 이희준 감독의 ‹병훈의 하루›와 김소형 감독의 ‹선화의 근황›이 그렇다. ‹병훈의 하루›는 오염 강박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병훈이 담당 의사에게 과제를 받아 사람 많은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따라간다. 첫 연출작에 감독의 빛나는 연기가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낸 작품이었다. ‹선화의 근황›은 주인공 선화가 힘겹게 입사한 제빵회사에서 우연히 중학교 동창 진경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다. 선화는 진경이가 조직 내에서 차별과 폭력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런 진경을 보며 내적 갈등에 빠진다. 청년, 그중에서도 여성 청년 빈곤층의 노동환경과 그 안에서 맞닥뜨리는 부조리를 담아내지만,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현실을 타개할 수 없는 무력감과 죄책감의 감정들을 처지가 비슷한 두 여성의 오가는 눈빛 속에 촘촘하게 엮어 낸 작품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4프레임›

사람의 마음이 비추어 내는 형상,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4프레임›

이란의 영화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 ‹24프레임›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에서 상영되었다. “회화 작가는 단일 프레임 안에 이야기를 담지만, 영화 작가는 24프레임의 무빙 이미지를 열망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4분 30초짜리 옴니버스 영상 24개로 이루어져 있다.

감독은 각각의 영상을 ‘프레임’으로 이름 붙였다. 총 24개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영화인 것이다. 카메라는 늘 고정되어 있고 화면 안으로는 동식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총성 소리, 음악 소리, 방문을 여닫는 소리는 이미지의 빈 공간을 채워 준다. 관객의 감각을 2차원 화면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3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의도였을까. 각각의 4분 30초 동안 관객들은 화면 속 현장의 미묘한 운동성 안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모든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비추어 내는 형상이다.” 압바스 카이로스타미가 생전에 했던 말이다. 영화 상영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작품은 감독의 손을 떠난다. 영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속에서 의미와 관념을 부여하는 것도, 심지어 화면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상상하는 것도 전부 관객의 몫이다. 말하자면 모두가 각자의 풍경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영화제만큼 다양한 세계를 훔쳐볼 수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그 기억은 또다시 각자의 풍경을 가꾸는 토양이 된다. 당신의 풍경에 영향을 미친 영화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낼 풍경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24프레임› 마지막 장면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창문 너머를 배경 삼아 어두운 방 안 모니터에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는 남녀가 나온다. 스톱 모션처럼 프레임 단위로 움직이면서. 때론 이 세상이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험하고 짓궂을 때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분명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순간을 포착하는 영화도 함께 있을 것임을 조용히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기어이 발견해 내는 감독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의 풍경과 당신의 풍경이 합쳐져 세상이 더욱 알록달록해지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글 박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