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빙’이라는 말이 한껏 대두되던 적이 있다. 새로운 창작만큼이나 기존의 것을 잘 보존하고 찾는 일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 그에 따라 보여지는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기획자의 강한 주관보다는 다소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것들을 늘어놓는 경향이 한동안 지속되던 것이다. 일단 모아진 것만으로 신선하고 신기했기에 그것을 모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전시를 갈무리하곤 했다. 요즘에는 잘 안 들리는 낱말 같기도 하지만, 그 까닭인즉 아카이빙 개념이 이미 안착하여 당연한 전제가 되어 버린 탓일 테다.

그래도 얼마 전 이뤄졌던 두 개 전시에서는 이 개념이 중요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진행했던 ‹픽션‐툴›은 미술과 관련한 책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고 있었고, 세실극장에서 진행했던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작가를 아카이빙 방식으로 섭외해 초대 큐레이터들에게 그 전시를 되 맡겼다. 두 전시 기획자 모두 ‘모으는 일’을 우선으로 한 것이다. 이제 와서 ‘모으는 일’이란 그들에게 어떤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아카이빙하는 대상물에 있어 차별점이 엿보였다. 소위 미술이라 일컫는 분야에서 두 전시가 아카이빙한 대상은 극단적인 지점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전시가 이뤄진 다음 그것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책만을 모으는 방식이나 전시를 만들기에 앞서 가장 우선적으로 주체인 작가와 작품을 모으는 방식은 그 자체만으로 낯설었다. 전자는 서적을 모아둔 서점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책들이 모인 호응점을 질문케 했고, 후자는 작가를 소모품처럼 여기게 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처했다.

두 전시 기획자가 ‘아카이빙’이라는 말을 언급하는 방식은 상반되었다. ‹픽션‐툴›은 부제로 ‘능동적 아카이빙’을 덧붙이고 있던 것에 반해,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마치 그 용어를 숨기는 듯 은근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또한 큐레이션을 전시물로 내세우고 있으나 동시에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대우해야 하는지를 일러 주고 있었다. 아카이빙이라는 안착된 개념이 사용되는 양상이 돋보였다.

아무래도 현대미술이 줄곧 겪는 오해에 맞선 전략일 수도 있을 테다. 미술이 담론과 개념을 위해 소모되고 있다는 오해. 큐레이터의 기획력이 중요해진 지금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고 있는 이 사실 앞에서 아카이빙이라는 중립적인 무언가를 제안하는 기획자는 이에 대처해야 했다. 담론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기획에 따라 작가들이 이용되는 상황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픽션‐툴› 전시는 ‘출판물’이라는 미술을 담론화, 개념화하는 부차적인 도구를 전시의 구성물로 삼았으며,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미술에서 가장 우선적인 주체였던 작가와 작품을 아카이빙 할 수 있는 소품으로 섭외한 전시였다.

©세실극장

그 와중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은 큐레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강하게 하는 전시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큐레이션의 위계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처럼도 보였다. 작품이 큐레이터에게 소모된다는 논의에서 나아가 큐레이션을 다시 큐레이션 하는 데에까지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과 기획 간의 관계를 쉽게 도식화할 일은 아니었다. ‘큐레이션’이 전시물로 등장하는 건 그에 따라 이 관계 자체를 재고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기획의 말대로 각자 큐레이터가 만든 또 다른 전시들은 다른 전시에 대응하거나 대항하는 “전시와 비전시, 그리고 반전시의 영역이 중첩”된 모습을 띠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제목을 읽는 방식 또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소유격이 강조되는 제목이지만 한 방향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의’라는 의미가 실타래처럼 연거푸 바뀌는 방식으로 읽는 게 적절해 보인다. ‘전시의, 전시의, 전시’라는 반복과 강조는 막연하게 얘기되어 온 오해를 소거시키고, 유동적인 괄호 치기를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작품 자체가 이미 독자적인 전시로 기능했던 경우나 기획이 작품이 되는 경우 등 미술이 존재하는 여러 범주를 고려하게끔 한다. 그렇지만 모든 단정과 오해에서 벗어나 완전무결한 담론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할 터. 간혹 지나치게 자유로운 탓에, 모든 말을 하지만 아무 말도 아니게 되는 일을 우리는 여러 차례 겪어 온 바 있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중요하게 돋보이는 건 전시를 이루고 있는 조건인지 모른다. 하나의 전시를 만들기 위해 한정하고 있는 조건을 따지다 보면, 역으로 이를 통해 동시대 미술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무엇을 점쳐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를 중성적이고 중립적으로 꾸리려는 노력은 작품군을 구축하는 노력에서 엿보인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아카이빙인데, 기획자는 이 아카이빙 풀에 회화나 조각처럼 오랜 역사 동안 개념적 선입견이 씌어진 장르 대신 새 시대의 장르인 무빙 이미지만을 섭외해 두었다. 소위 무빙 이미지라고 통칭하지만 그 안에서는 관점에 따라 뉴미디어를 비롯한 다양한 구분으로 다시 세분되는 작품들은 참여 큐레이터들의 개인적인 큐레이션을 통해 또 다른 전시담론, 작품담론을 창출한다. 선입견이 사라진 장소에서 판정이 필요한 작품을 관람하게 하는 컨디션은 ‘전시의 전시의 전시’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이 전시를 이루는 조건이 전시가 펼쳐지는 장에 관해서만 있었더라면 오로지 개념에서만 머물렀을 테지만, 이처럼 작품군을 아카이빙한 조건과 그에 대한 큐레이션은 전시가 목표하는 이야기의 지평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글 이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