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수

꽤 짧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춤 잘 추는 학생, 앞으로 기대되는 친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단 단장의 모습까지. 그동안을 가만히 되짚어 보면 크고 작은 공연부터 대회에 이르기까지 ‘정민근’의 이름을 참 찾기 쉬웠던 시간이었다.

어느 곳이든 무용을 할 수 있다면 늘 함께였던 그에게, 습관적으로 짧은 시간이었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실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적막한 연습실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으며 재미 삼아 외쳤던 야망이라는 단어처럼, 그의 이상은 높았고 또 그곳에 닿기 위한 움직임은 부단하다. 6월에 공연되는 ‹어느 무동의 이야기›처럼 크고 작은 소재들로 가득했던 한 무용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신예 무용가부터 정민근무용단 예술감독까지의 시간
정민근무용단1이 만들어진 지 2년 정도 되었는데 정말 바쁘게 움직였던 것 같아요. 좋은 기회로 광주무용제에 참여하게 되어 광주에서도 활동을 했었고, 무용제가 끝나서 다들 “이제 좀 쉬어 가자” 했는데 이전에 공모 냈던 것들이 좀 잘되어서 요즘은 작품 만드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쓰고 있습니다. 무용수로도 활발히 활동해왔지만 예술감독으로서의 시간도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네요.

‹한명숙류 살풀이› ⓒ정민근무용단

새로운 무용단을 만들다
솔직히 처음 무용단을 만들 때는 제가 하고 싶은 공연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많이 반영됐어요. 그런데 무용단을 운영하는 주체가 저의 동문들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이 쌓이다 보니 이게 하나의 커뮤니티가 되더라고요. 작품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서로 다른 춤들의 느낌을 맞춰 보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지금의 정민근무용단은 나를 벗어나서 우리가 하는 춤에 대한 열정을 풀어낼 수 있는 곳 같아요. 저희는 대부분 전통무용을 하니까 그 안에서 하지 못했던 창작이나 새로운 시도들을 해볼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죠.

저희가 전통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미 전승되어 오는 궁중무용이나 민속춤과 같은 것을 활용하고, 또 조금씩 변형을 준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그 부분에 있어 많이 고민하기도 했는데 우리가 배운 것이니 좀 더 용기를 가지고 작품 안에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술감독이라는 이름의 무게
무용단을 처음 만들 때, 이름에 대해 고민을 했어요. 정확히는 팀명이죠. 그래서 주변 선생님들께 조언을 많이 구했는데, 선생님들께서 “너의 이름을 걸고 해 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로서는 부담스러웠지만 ‘네 이름만큼 자신에게 책임감을 주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직도 남들은 조금 웃기도 하지만, 그 말씀을 따라 제 이름을 걸고 만들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라기보다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기 위한 것이었죠.

예술감독이 되고 나니 솔직히 현실적인 부분에서 책임감이 제일 많이 들어요. 저희 팀이 아직은 프로젝트성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라, 팀원들에게 현실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줄 수 없으니까 제가 원하는 만큼의 몰입을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이제 저희 무용단이 전통팀 10명, 현대팀 10명 정도의 규모로 커졌는데, 팀원들이 많아진 만큼 현실적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감탄사, 언어의 관절› ⓒ정민근무용단

무용수와 감독 사이
무용수로서 실연할 때는 “제 자신이 안무가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에 반해 예술감독은 “내가 이 무용수들에게 원하는 감정이나 표현을 끌어내야 한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공연 초반에는 저도 무용수였던 기간이 길어서인지 작품 안에서 나를 표현하는 것에 굉장히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팀원들 간의 의견 충돌도 많이 생기고 어려운 점들도 있었죠. 지금도 사실 그 부분에 있어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둘 사이를 잘 조율하려 노력하죠.

인형, 그 오브제에 대해
처음 인형을 사용한 건 3월쯤 공연된 ‹감탄사, 언어의 관절›이었는데 인형 사용이 독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기존 전통예술에서는 워낙 인형을 활용한 작품들이 많으니까, 저한테는 좀 익숙했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색달랐다고 말씀을 해 주셔서 오히려 신기했어요.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이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니 이런 시도를 계속 발전시켜 보고 싶은 욕심도 좀 생기고요. 당시 공연에서는 인형을 절반 정도 걸쳐 입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두 개의 자아를 보여줄 수 있었는데 이런 형식을 사용하면 좋은 오브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새로운 형식으로 계속 발전시키다 보면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창작이 계속되면 그게 전통이 될 수도 있으니까.

춤의 모티브
모티브는 거의 음악에서 얻어요. 제가 국악을 정말 좋아하는데 기존 국악 외에도 새로 나오는 국악 음반까지 다 듣는 편이에요. 아이돌 음악은 몰라도 국악 장르의 신곡은 바로 알 만큼. 대부분 가사가 없는 음악들을 들으며 약간의 공백을 채워 가는 것을 좋아해요. 예를 들자면 음악이 약간 고조되는 순간이 있으면 이렇게 춤을 몰아가야겠다 같은 생각을 많이 해요.

‹어느 무동의 이야기› ⓒ정민근무용단

‹어느 무동의 이야기›
역사적으로 고증을 한 작품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 마지막 무동이셨던 심소 김천흥 선생님을 모티브로 ‘선생님이 옛날이야기를 해 주셨다면 어떨까?’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공연이에요. 수업을 듣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이 항상 옛날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나중에 이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작품을 구상했어요. 또 작품 안에서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궁중무용과 민속춤을 모두 보여 줄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일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천흥 선생님으로 연결이 된 것 같아요. 창작이다 보니 명확히 김천흥 선생님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생님이 지나오셨을 것 같은 삶과 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에요.

무용을 한다는 것
무용도 결국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중에서도 저는 저의 경험을 담아내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제가 하는 한국무용에서도 저만의 스토리를 담아내려고 노력하죠. 그냥 ‘슬픈 감정이다.’ 이런 것은 너무 만들어진 것이잖아요. 춤 안에 나만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을 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
지금 무용 쪽에서 전통무용이 많이 소외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좀 더 과거의 춤을 연구해 보고 싶어요. 지금 공연되는 작품뿐만 아니라 과거 문헌에 나오는 춤을 공부하면 또 다른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또 서양의 즉흥 음악과 민속무용을 접목하는 작업도 해 보고 싶고요. 팀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단원들과 이야기하고 구상하며 다른 팀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어요. 정민근무용단은 저를 위한 팀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를 위한 팀을 만들고 싶어요.

정민근무용단의 공연 모습 ⓒ정민근무용단

무용가, 정민근의 꿈
다들 웃으실 수 있는데, 제 꿈은 무형문화재가 되는 거예요.(웃음) 어머니께서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인지 힘든 일이 있어도 제가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우선 개인적으로는 저만의 춤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지금은 후배들이나 동기들, 혹은 무용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하는 게 너무 좋아요. 그냥 밥을 먹다가도, 수다를 떨다가도 우리의 춤, 무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즐거워요. 그것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지금의 정민근무용단이에요. 무용단 일을 하다가 개인적인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되기도 하지만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서는 “너는 공부는 할 수 없겠다” 하셨어요.(웃음)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해서 드라마에서 나오는 춤을 한 번 보고 외우고, 상모 돌리는 것을 너무 해 보고 싶어서 모자에 테이프를 붙여 나무젓가락에 리본을 달아 놀기도 하고 그랬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제 춤의 일부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계속 움직여야 하고 삶이 춤인 것 같아요. 춤이 어떤 존재라고 하기에는 그냥 생활이에요. 꿈에서도 춤을 추는 제 모습이 나올 만큼 그냥 좋아요.

‘그냥, 좋다.’ 귀에 스치는 이 문장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스스로 그냥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 본다. 춤이 그냥 좋아서 추고, 좋아서 공연을 만드는 안무가에게 앞으로의 작업은 얼마나 큰 기쁨으로 다가오게 될까. 지금까지 지나온 그의 무대보다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무대가 더욱 기대되는 시간이다.

글 신혜주

사진 김경수

영상 박소현
1 정민근 예술감독과 함께 한예종 전통예술원 학생 및 동문들로 구성된 무용단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자 하는 젊은 무용가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통해 우리 춤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