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구성하는 가치는 여러 종류다. 어떤 면에서는 올바른 삶을 살아도, 다른 가치 기준에서는 최악일 수 있다. 예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윤리와의 문제다. 일반 기준과 대치하는 예술 특성상 많은 경우 예술은 윤리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윤리를 주제로 하면서 실제 작업 과정은 비윤리적이라거나 작품 속 부도덕이 실제 창작자의 이야기와 연관된 사례가 잦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강사이기도 했던 한 실험영화감독이 무려 은행을 털었을 때마저 예술은 법이라는 최소한의 윤리와 토론을 벌였다. 예술에게는 또 다른 가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은 윤리와 별개의 영역에서 사회를 자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사건들은 예술이 과연 윤리와 다른 영역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미투운동을 통한 폭로 중에는 예술이 남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 고발이 상당수 포함돼있기 때문이다. 소위 예술가라는 이들은 예술이 사회 윤리와 다를 수 있다는 전제를 악용해 용서되지 않는 범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술과 윤리가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계속해서 고집할 수 있을까? 이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그러한 주장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로 여겨질 따름이다. 예술은 일련의 악질 행위를 부추긴 도구이자 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몇 해 전 어떤 감독의 영화에 불쾌감을 느낀다는 관객에게 한 평론가는 “그 영화에서 선정적인 것만 포착하는 당신이 문제”라고 항변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지금, 작품성을 변호하는 그의 말은 하릴없어졌다. 감독이 작품을 핑계로 온갖 비도덕적 행위를 일삼아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작품성을 논하던 그의 영화들은 지위를 이용한 폭력의 도구이자 알리바이로 전락했다. 창작 활동이 자신의 실체를 속이는 용도로 여겨지게 된 경우도 있다. 국가를 대표해 노벨문학상 추천 작가로 번번이 언급되던 원로 시인의 추행 또한 낱낱이 밝혀진 것이다. 문단 원로로서 그가 문단에서 한 일들은 성범죄에 악용되는 위계 축조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한때 시인에게서 아름다운 시를 떠올리던 이들은 그 감상을 후회하며 번복했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어렴풋이 추측해온 이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정말이지 역방향에서, 작가의 비행으로 인해 여태 봐온 작품에 대한 판단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결국 끊이지 않는 사건 속에서 한낱 예술은 개인의 범죄와 동일시되어 갔다. 불매와 관람 거부가 당연한 의제가 됐고, 나아가 기존 작품을 폐기하자는 주장이 일어났다.

무언가를 강제하기 위해선 많은 고려가 요구된다. 지금껏 가해자들의 작품이 피해자들에게 어떻게 가닿았을지,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지금 이후 그들 작품이 우리에게 4어떻게 와닿을지는 짐작만으로도 비극이지만 어떤 결정이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 관건인 이상 어떤 맥락에서도 왜곡되거나 오용되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문제가 예술과 윤리 등이 잘못 뒤섞여 버린 범주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지금 이뤄지는 심판은 이다음 예술 내에서의 문제 혹은 윤리 내에서의 문제에까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윤리를 이유로 작품과 작가 간의 관계를 일단락하고 나면 예술 해석의 가능성은 총체적으로 단순화되고 마는 식이다. 당장 지금이야 예술이 윤리의 소도구로 이용됐을 경우를 전제하고 있지만, 다른 경우라면 이 전제는 예술에 폭력적으로 작용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일 년여 전 모 큐레이터가 기관 직위의 권력을 빌어 성추행한 사건이 공론화됐을 때, 그와 관련된 창작물 전체를 폐기한 것에 대해 논박이 오갔다. 단지 문제 된 인물이 관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관여한 비중과 방식과 같은 기초적인 연관성에 대한 고려 없이 후처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해당 작업물들이 그가 악용한 위계에 일조하기는 했으나, 악용한 사용자에 대한 처벌과는 별개로 작업물이 지니는 기본적인 중립성은 고려돼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전자의 추행이 지나치게 충격적이어서였는지 이런저런 작업물의 성격, 그와 관련된 다른 협업자들의 위상은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채 꼬리 자르기 같은 결론을 맞고 말았다. 작품에 대한 지나치게 빠른 사망 선고는 작품 자체의 위상을 격하시킨다는 문제로도 이어진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말이 많은데, 정작 작품은 이렇다 할 변명도 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작업물의 사람과의 관계성은 과연 떼려야 뗄 수 없는 걸까?

그러나 이를 수긍하고 전제한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작품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는 방식 자체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된 백색 건축의 거장 리처드 마이어의 죄를 물을 때, 그의 건축물 또한 파괴하자는 주장도 손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냐는 물음이 가능하다. 제거 방식이 간소한 분야에서는 순식간에 가능했지만 건축의 경우에서는 제거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작품을 작가와 연동시켜 작가의 죄를 작품에 묻는다 하여도 이러한 처리 방식은 각 분야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건축 분야처럼 실소유주가 존재하는 경우는 작가의 추악이 작품을 넘어 제삼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나쁜 작가가 만든 게 나쁜 창작물이라는 일방적인 전제에서 나아가 거기에 계속 살아가는 사람 또한 나쁘냐는 물음의 문제다.

분명 작가와 작품을 떼어 놓고 바라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밝혀지듯 많은 사람들이 작품의 이름을 빌려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러왔다. 수많은 절망 앞에서, 어쩌면 극단적인 패악 앞에서 우리는 예술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본적인 사회 윤리라도 지켜내 보자며 지정한 규칙들은 결국 앞과 같은 이유에서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 무언가를 폐기하고 몰아세우는 극단적인 결정이 전부인 것 같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어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아쉽고 안타깝고 허무하지만 극단적일수록 또 다른 극단에 대비하기 위하여 여전히 인내하고 숙고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든 윤리든 그 밖에 어떤 가치이든,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당연히 주장되고 해결되어야 마땅한 가치 옆에서, 끊임없이 예술에 주어진 자리를 상기하려고 한다. 사욕에 이용된 예술의 지위는 처참하고 우습기 그지없지만, 거기에 눈을 돌리면 이곳 예술의 자리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없어야 마땅했던 것처럼 말이다. 터무니없는 이상주의 같지만, 꼭 모두가 바로 세워지는 날을 떠올려 본다. 예술과 윤리는 결코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기 위해 존재하는 세상의 구성 요소다. 언젠가 작금의 비참한 현실 역시도 예술을 통해 다시 얘기될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술가는 사회의 상처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영원히 소금을 발라대는 존재다.”

글 이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