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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윤지




연습이 늦게 끝나 막차가 끊겼을 때 더럽고 해진 소파 위에 웅크려 냄새나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고는 했다. 선후배들끼리 모여 앉아 학교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토로하며 밤새워 과제를 하고, 서툴게 기타 치며 노래 불렀다. 동기들과 야심한 밤에 모여 과자를 안주 삼아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모두가 여기에서 멈춰갈 때 우리는 교차하며 공공의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은 한예종에서 다양하게 불린다. 과방, 작업실, 연습실… 학생들은 학교 곳곳에서 분주하다. 반면 캠퍼스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하다. 그래서 매거진이 학생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서식하는 과방을 탐험하러. 이 글은 과방 기습취재를 바탕으로 한 한예종 탐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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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미디어영상과 과방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때부터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작업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과방에 들어서자 각자 컴퓨터를 한 대씩 앞에 놓고 학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던 4학년 신혜수 학생이 말했다. “담요도 있고, 사물함이 부족한 문제도 개인 책상이 있으니까 해결되고… 내방처럼 쓰고 있어요.” 사운드나 그래픽 수업은 과방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애니메이션과 또한 개인 작업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검은색 패널로 큰 공간을 쪼개어 조금 더 사적인 공간을 확보했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애니메이션 작화 혹은 동화 작업을 하며 서로의 작업에 대해 피드백한다. 남는 시간에는 야식도 먹는다. 1학년 황교범 학생에게 과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기숙사보다, 집보다 조용해서 자주 들락날락해요. 제일 편하게 생각하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작업하다가 힘들거나 피곤하면 바로 누워 잘 수 있어서 과방을 좋아합니다.” 과방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저녁 7시부터 새벽까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이들은 과방의 불을 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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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과 과방의 기타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맞은편에 푹신해 보이는 낡은 소파와 그 위를 굴러다니는 이불이 보였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선 기타가 눈에 띄었다. 과방에서 주로 무엇을 하느냐는 질문에 4학년 이철용 학생이 답했다. “학우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최근에는 누군가 보드 게임도 사와서 즐기고 있습니다. 같이 과방에서 술도 마시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요. 기타를 두고 가끔 치러 오는데 들어줄 누군가가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없으면 쓸쓸하고요.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과방을 대하는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그가 기타를 쳐주었다. 서툰 솜씨가 살갑게 느껴졌다. 연습실에서 따로 연습하기 때문인지 많은 학생 수에 비교했을 때 연기과 과방은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가 눈에 띄었고, 학생 두 명이 작은 소파에 나란히 널브러져 있었다. 3학년 신재휘 학생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대본을 들고 와서 연습하는 친구도 많고 가창 수업 듣는 친구들은 와서 노래를 하고요. 보통은 여기에서 쉬죠. 열린 공간이에요.”
반면 연극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무대미술과 과방에는 온갖 공구와 재료가 널브러져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벽을 따라 개인 책상이 줄을 지어 있었다. 밤샘 작업을 많이 하는 무대미술과 학생들은 과방에서 과제를 하고 전공수업을 들을 뿐 아니라 살림을 하다시피 먹고 씻고 잔다.
1학년 김도빈 학생에게 과방은 어떤 곳인지 물었다. “아늑한 곳인데 그만큼 가장 피곤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죠. 아무래도 과제가 많은 날에는 되게 초라한 곳이 되기도 하니까요.”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모형과 작업들이 제 주인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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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예술과의 공유된 공간은 개인의 영역을 담아낸다. 과방이 따로 없고 커다란 작업실을 나눠 개인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작업복에 온통 물감을 묻히고 복도를 지나치던 3학년 문나린 학생을 붙잡았다. “복도의 방들을 굳이 말하면 과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원래는 큰 방에 책상이랑 의자만 놔둔 걸 학생들이 개인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서 파티션을 둔 거거든요. 본인들이 쓰레기 같은 걸 주워 와서 커튼을 치고 개인 공간처럼 꾸민 거예요.” 개인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개미집 같다며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도 밤에 친구들이랑 작업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는 힘이 되고, 서로 진행되는 과정도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요.” 건축과의 과방은 설계실이 대신한다. 학생들은 보통 설계실 혹은 캐드실에서 주로 서식하는데, 경비가 엄중하여 설계실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2학년 유도영 학생의 말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었다. “각자 책상이 있어서 1, 2, 3학년의 공간과 4, 5학년의 공간이 나눠져 있어요. 주로 제도판으로 드로잉을 하거나 모델을 만들어요. 설계 수업이 건축과 전공 수업 중에 가장 메인인데, 건축 프로젝트를 1년 동안 이어가는 수업이에요. 그 수업 전날 새벽에 사람이 제일 많고요.” 먹고 자는 모든 것을 집 대신 설계실에서 한다고 했다. “애증의 공간이에요. 쉬는 공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곳이기도 해서.”
본관의 지하로 연결된 커다란 야외계단을 내려가 문에 들어서자 커다란 광장 같은 곳이 나왔다. 디자인과 학생들은 한 곳에 모여 짜장면을 시켜먹고, 옆에서는 전시를 앞두고 회의를 하고, 다른 곳에서는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디자인과 과방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1학년 임수현 학생이 답했다. “새벽에도 사람이 있는 것. 고등학교 때처럼 놀아요. 애들끼리. 1학기 파운데이션 수업에서 나무젓가락으로 패턴 만드는 과제가 오래 걸려서 거의 10명 정도가 매일매일 바닥에서 널브러져서 자고 그랬어요.” 휴학 중인 남동훈 학생은 과방에 오게 되는 이유에 대해 같이 작업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3년 동안 계속 여기 있으니까 애착이 가서 계속 오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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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예술원은 모든 곳이 연습실이다. 신명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염치 불구하고 교실 문을 열자 국악기를 든 학생들이 있었다. 이란 곡 이름을 짓고 졸업 연주를 준비하는 이들이었다. 국악기로 재즈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제목이라고 대금 전공 4학년 조병주 학생은 말했다.
24시간 개방되는 밤샘 연습실이 일상이 연습인 음악과 학생들에게 쉼터이자 과방이자 작업실이라고 했다. “선배들과 공연하게 되면 전날 밤새서 연습하고, 레슨 받을 때 혼나지 않기 위해 새벽까지 연습하다 집에 가고, 가끔씩 낮잠도 자요.” 연습실을 사랑한다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연습실은 저에게 발판인 것 같아요. 좋은 연주자가 되기 위한 발판이요. 후배들도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면서 음악적인 고민을 하겠죠. 사회에 나가서도 이 공간을 계속해서 생각할 테니까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한편 커다란 연희과 연습실 역시 졸업발표 준비가 한창이었다. 무속 연희 실기에 나오는 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준비 중인 4학년 홍예린 학생이 말했다. “연희과는 특성상 단체로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큰 연습실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저희는 밥을 시켜 먹고 휴식도 하고 회의도 해요.”
연희과의 성향이 어우러짐 자체이기에 함께 참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집에서는 잠만 자기 때문에 하루 일과 중에 연습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편하게 다가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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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과의 토슈즈는 이곳에서 꿰매어진다. “과방이 뭐에요?” 1학년 이상민 학생이 되물었다. 서초동 캠퍼스 107호 연습실이었다. 홀에 들어서자 수많은 가방이 한구석에 쌓여 있었고, 연습복을 입은 발레전공 학생들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이쪽을 향했다. 지난 10월 러시아에서 열린 바가노바 국제발레콩쿠르 1위를 차지한 이상민 학생과 이수빈 학생도 있었다. 이상민 학생이 수줍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무용을 하는 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연습하는 데도 도움이 많이 돼요. 파드되 같은 파트너링이 잘 안 될 때 선배들한테 물어볼 수 있고요.” 발레과 학생들에게 107호는 가장 소중한 공간이라고도 했다. 매일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수많은 무용수들의 땀과 결실이 시작되고 만들어지는 바로 이곳. 107호 연습실이 가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고자 무용원 김용걸 교수는 올 11월 <R, 107>을 안무하기도 했다. 107호 연습실에서 묵묵히 토슈즈를 꿰매고 있는 여학생의 내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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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전공 과방의 음악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커다란 첼로를 등에 매고 있던 기악과 첼로전공 3학년 송민제 학생을 만났다. 알고 보니 제24회 성정전국음악콩쿠르 대상을 수상한 인물이었다. 과연 어디에서 연습하는지 궁금했다. “아침에 과방에 들어가서 밤에 나오고,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싸와가지고 연습하고 그랬어요. 같은 곡을 다 같이 연습할 때도 있고, 서로 반주를 넣어줄 때도 있고요. 첼로 앙상블은 큰 공간이 필요한데 그런 공간이 없을 때는 과방에서 다 같이 연습하고 그럴 때도 있어요.” 그는 누가 오거나 말거나 과방에서 편히 지내는 편이라고 말했다. “연습실을 예약하려면 대기도 해야 되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과방에 있는 게 훨씬 편해요. 여러 사람이 있다 보니 자기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듣기 힘들고 집중하기도 힘든 편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다들 그렇게 연습하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음악은 고독에서 꽃핀다고. 하지만 혼자 연습하다 보면 지치고 기대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집에 있으면 기댈 곳이 침대밖에 없거든요.” 기악과 기타전공 4학년 신승수 학생의 말이다. 지하 연습실 복도 깊숙이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가보니 조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연습 중이던 그에게 이곳 과방에서 주로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기타를 치거나 듀엣곡을 뽑아서 초견 상태에서 한번 연주해보기도 하고, 음악 들을 때도 있고, 사람이 많으면 그냥 다들 앉아 있어요.” 공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결합이 될 수 있으니까요. 군대 다녀온 고학번들이랑 과방에서 부대끼면서 많이 친해지고, 동생들이, 후배들이 기타치고 있으면 선배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조언도 해주고요. 두 번째는 우리만의 공간에서 여러 가지 제약에서 벗어나서 쉴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지요.”


그에게 과방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4년여 동안 제가 성장한 공간이에요. 1, 2학년 때는 과방에서 살았었거든요. 대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가 과방에 다 묻어있어요. 모든 것에 다 추억이 있어요. 친하던 형이 두고 간 곰돌이 인형 같은 것. 저의 또 다른 기억인 것 같아요. 이곳이.” 학생들 개개인은 학교라는 공간과 관계, 학업이 매개하는 그물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방 혹은 연습실, 작업실인 그곳에서 각자 자유로운 영역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석관동과 서초동, 6개원을 탐사한 이 글은 짧게 끝나지만 학생이라 불리는 어린 예술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영역을 확장해 나갈 준비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뒤돌아보며 추억할 것이다. 가장 치기 어리고 열정 넘쳤던 한 시기를. 모두와 함께한 그 공간을, 그 모두를.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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