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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정선



‘뛰어난 예술가의 등장에는 천부적인 재능과 운이라는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무명의 예술가 지망생에게,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고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수많은 수사들은 일상적인 고민이 되어 돌아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민을 했죠. 세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에서 요즘은 뭘 하냐고 물을 때마다 어쩐지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 같기만 하고. 나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 같을 때 가장 힘들어요.” 무명 연출가, 28세

내가 가진 것이 사실 천부적인 재능이 아니라, 납과 구리 같은 재능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 나에게는 사실 남다른 상상력이나 치밀한 시대적 감각이 아니라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을 그럴싸하게 모방하는 재주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재주를 재능으로,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쩌지? ‘진정한 예술가라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던 간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1)지만, 내가 애초에 진정한 예술가가 될 자질을 갖춘 것이 아니라면, 애벌레가 아니라 나방의 유충이었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타고난 재능이 주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면 이제는,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는 나의 운에 희망을 걸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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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나는 운이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기를 쓴다고만 다 되는 건 아니야. 운이 있어야지.’ 2)

그렇다. 운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운이야말로‘ 내 작품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탐탁지 않은 느낌이 든다. 어느 예술가 지망생이 오직 찰나적인 해프닝에 불과한 운에 자신의 땀과 고뇌가 서린 작품을 인정받고 싶을까? ‘내가 이긴 건 순전히 운이우, 운.’3)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손’, 다시 말해 노력과 정신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기회로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주변에서 넌 참 운이 좋다는 말을 듣게 되면 기분이 나빠요. 내가 하는 것은 겸손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으니 괜찮다지만 왠지 ‘네 작품은 별로였지만 네 운은 좋았지’라고 하는 것 같잖아요? 운도 노력이라는 말도 있는데” 무명 화가, 29세

다시 그러나 (약간의 운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므로) 만약 내 운이 좋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운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4)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운은 좋아도 문제, 나빠도 문제라는 말인데…. 진퇴양난이다.

앞으로 나갈 길이 없으니 뒷걸음칠 곳도 없고 좌우도 없는 생각들을 늘어놓고 있다 보면 천재와 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유명한 예술가에 대한 또 다른 유명한 수사가 떠오른다.‘한 명의 천재 예술가가 나오기 위해서 수많은 무명 예술가들이 그의 발밑에 묻혀야 한다.’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 중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 것 같을 때 가장 회의감이 들죠. 물론 영향을 받고 고무되고 뭐 그런 것들도 당연히 있지만… 내가 봐도 내 작품보다 저 친구의 작품이 확연히 낫다, 차원이 다르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만둬야 하나 싶어져요.” 무명 예술가, 26세

한편에서는 이렇게 천재 예술가가 갖춘 덕목과 그의 대단함을 드높이기 위해 무명 예술인들을 동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을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술만을 위해 견디는’ 순교자적인 인물로 신비화시키기도 한다.




altKevin Tancharoen, <Fame>, 스틸컷




후배의 옥탑방에 얹혀살며 하루에 겨우 한 끼만을 먹고 버텼다는 한 연기파 배우, 패스트푸드 체인점 배달원부터 편의점 야간 알바까지 가리지 않고 일하며 꿈을 펼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젊은 배우, 다년간의 무명생활 끝에 마침내 복층원룸을 구입했다는 아이돌 가수…. 이들의 이야기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그 무명으로 보낸 기간 동안의 고충이 현재의 성공을 더욱 화려하고 돋보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살아생전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예술가들에 대한 신화까지 덧대어진다면…. 고흐가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되는 데에 그의 불운이 기여한 것이 아예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무명 예술가에 대한 신화는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 무명들을 배제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는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를 고민하는 무명인들에게 그 ‘유명’의 신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도 현실 속 어려움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명 예술가들 중에는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어, 이제 곧 OO살인데 말이야.”와 같은 나이에 대한 걱정이나 “날 믿고 지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어요.”와 같이 주변인들을 염려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 역시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사회적 시선, 그에 따른 자존감의 저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작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구했다가 안정적인 생계유지를 위해 창작에서 손을 놓게 되는 경우가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이 문장에서 ‘위해’가 몇 차례나 들어가야 했는지 세어보면 예술은, 고대 철학자들의 말처럼 오직 ‘자유인’에게만 가능한 행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명이 겪어야 하는 일상이라는 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듯 그 자체로 곤란한 일이다. 출구를 찾는답시고 자칫 무명은 유명으로 향하는 과정이나 고난을 통해 얻은 것이 진정 값진 것이라는 등의 정신승리로 다시 한 번 무명을 신비화하고, 현실 속 우리 무명들을 괴리시키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명 예술가들에 대한 현실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우선되지 않고서야 이 진퇴양난을 벗어날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명 예술가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이들이 이름은 가지고 있을지언정 실은 무명이며, 우리의 작품이 이 무명들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유명’에 반대되는 ‘무명’으로 규정짓기를 거부하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보잘것없는 이름 없음의 상태를 다른 무명들을 위해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유명하지 못한 무명‘이 아니라 자발적이며 의지적인 무명이 된다. 이 무명은 ’유명‘을 두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화려하고 뛰어나지 않은 이면, 어두움, 불행과 고난, 바로 무명과 무명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altKevin Tancharoen, <Fame>, 스틸컷




자신이 써야만 하는 이유를 ‘하나의 예술적 욕구가 아니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한 카프카에 대하여 모리스 블랑쇼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남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자신이 사라지는 소름끼치는 붕괴 상태, 그곳에서 분명 글쓰기 요구의 무게 중심을 확인하였던 것 같다. 자신이 바닥까지 파괴되었다고 느끼는 그곳에서 파괴를 가장 고귀한 창작의 가능성으로 대신하는 깊이가 생겨난다. 놀라운 전복, 극도의 절망에 언제나 버금가는 희망,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그는 기어코 의혹을 두지 않을 믿음의 움직임을 이끌어낸다.’5) 예술작품이 가능해지는 지대는 어쩌면 카프카와 블량쇼의 말처럼, 불안과 절망이 기거하는 바로 그곳,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유명해지지 못한, 유명을 기다리는 중이라서, 또는 예술가의 덕목이 가난과 불행이기 때문에, 등등의 조건이 주어진 무명이 아니라 예술 자체가 그와 같은 무명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글을 적는 도중 만났던, 무명과 유명의 중간 단계에 있는 음악가의 말로 어지러운 글을 맺으려 한다. 그의 말이 무명이라는 ‘난’을 극복하게 해줄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인정이건 갈구하다 보면 작품도 이상해지거니와, 무엇보다 이런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려고 유명해지려고 이걸 시작했던 것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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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효, <무제>, 캔버스 천에 아크릴 등 혼합재료, 21x28cm, 2016



1) “A real artist must never be afraid of what other people are gonna say about him.” 영화 Fame>(1980) 중에서.
2) 최인훈, <회색인>
3) 조해일, <왕십리>
4) 박경리, <토지> 5)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 각주 2, 3, 4번의 인용문은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운’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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