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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예빈



고백
이 지면을 빌어 나는 무명無名에게 사과하려 한다. 그 동안 오해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예술과 어느 정도 친해지기 이전의 나는 은연중에 무명이 유명有名의 대립항이라고 생각해왔다. 보통 주변에서 유명해지기를 꿈꾸는 경우는 많아도 이른바 ‘무명해지기’를 바라는 건 딱히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유명해지기를 갈망했으며 그러한 갈망 속에서 무명은 늘 유명의 그림자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있어 무명은 그저 유명으로 향하는 길목이자 동시에 목적보다는 스쳐가는 시기, 궁극적으로는 극복되어야 하는 상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명이 내 삶 속 예술과 손을 잡더니 반박을 해왔다. 종종 유명으로 향하는 과정의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결코 자신이 유명의 그림자는 아니라고. 예술의 세계에서 무명은 자신이 과정이자 목적이 되는 -유명은 해낼 수 없는-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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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마, <앞의 하늘색>, Oil on Paper, Variable Size, 2014



내겐 너무 먼 무명 씨
무관심한 탓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무명은 사실 유명보다 더 대하기 어렵다. 최근에 참여했던 한 워크숍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내에서 전문적으로도 대중적으로도 아쉬운 인지도를 가진 다원예술 분야의 미래를 위해 비평담론을 형성하고자 한자리에 모였던 각계각층의 예술인들은 본격적인 진행에 앞서 논의의 대상을 어떻게 범주화 하면 좋을 것인가 고민하였다. 분명 실체는 있는데 뚜렷이 무엇이라고 할 수 없다 보니 비평담론을 형성하기는커녕 비평을 하는 것조차 실질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우리가 논하고자 했던 것은 그야말로 무명의 예술이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면서도 흥미진진한 건 무명은 항상 실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를 고민에 빠뜨린 무명의 예술이 그러했듯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그 존재를 규정짓는 이름이 없는 상태가 바로 무명인 것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서 불분명한 존재라는 이유로 어떠한 실체가 무명이라는 틀 안에서 규정되고 유명에 못 미치는 상태로 취급받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명은 무언가를 무명이라 부르는 이들의 한계를 드러낸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워크숍에서 우리는 다원예술을 범주화하려 하면 할수록 더더욱 무명에 가까워지는 무력함을 경험했다. 기존에 우리가 갖고 있던 미학적 지식만으로는 그 예술을 정의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없이 도도한 이 무명의 예술은 각자의 비평담론을 이미 확보한 세상의 수많은 예술과 닮아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것과도 온전히 같지는 않기에 새로운 이름값을 필요로 했다.

alt 김유진, <무제>, 캔버스에 유채, 53x72.7cm, 2016




예술과 무명의 공통분모
실은 모든 예술이 원체 좀 도도하다. 얼마 전 배우 송강호가 인터뷰1)에서 말했듯 “1 더하기 1도 3이 될 수 있고 10도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예술”인 만큼 예술은 잡히지 않는 예측불허의 매력을 지닌 소유자다. 모든 예술은 끊임없이 자신의 안팎에서 해석과 재해석을 거듭하며 관습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한다. 창조성과는 그다지 큰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전통문화의 계승에 있어서도 답습이 아닌 전통적 가치에 대한 지속적인 재해석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강조되지 않는가. 그러한 점에서 태생적으로 예술은 무명만큼이나 다수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방인이다.

한편 테두리 밖에 있는 탓에 쉽게 잡히지 않아도 어딘가에 분명 실체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은 무명과 닮아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예술이 동시대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처럼 예술이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추상성을 내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감각 경험 너머의 것을 선사한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음악을 좋아한다고 할 때 그저 음파가 고막에 전달하는 공기의 진동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청각적으로 분명하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예술의 실체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언제나 누구에게든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예술은 자기 본연의 테두리 밖으로 나오길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스로 권위자로서 저자著者도 총체un tout2)도 주장하지 않는 무명 상태의 텍스트와 같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는 지도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환상적인 55개의 도시들에 대해 쿠빌라이 칸에게 들려주는데, 그 모든 묘사는 사실 하나의 도시, 베니스를 가리킨다. 소설 속 베니스라는 도시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 이름 안에 다 담기지 않는 환상을 품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일일이 명명하기에는 너무나 무수한 이름을 품고 있어서 무명일 수밖에 없는 예술과 닮은꼴이다.




altⓒThe Book Haven of Stanford University




기꺼이 무명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 무명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와 같은 예술의 무명성은 때론 ‘융합예술’과 같이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예술은 여러 차원에서 관습을 뛰어넘어 학계·장르·문화 간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개인이었다가 집합이기를 거침없이 오가며 기존의 자신을 무명으로 기꺼이 몰아넣어왔다.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연주를 하는 태싯그룹3)의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을 박쥐라고 칭하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영화인인 천명관의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가수 밥 딜런에게 돌아간 올해의 노벨 문학상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문학이라는 이름을 무명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명 속에서 카멜레온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예술에 이름을 붙이려 하는 건 솔직하게 우리 때문이다. 편의상 수많은 무지개 빛깔에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일곱 가지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우리는 자꾸 우리가 잘 식별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무명의 예술을 명명하려 한다.

이전의 나처럼 예술의 무명성에 대해 오해를 했던 이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 함께 예술에게 정확한 이름4)을 떠올려주기 위해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 현존하는 수많은 이름들로는 자신을 다 설명할 수 없어서 스스로 무명이길 고집하는 예술 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도도한 이름을 다 함께 찾아주자는 것이다. input image




altⓒ태싯그룹




1) <매거진 M>, vol. 180에서 정성란 기자의 “커버스토리”
2) 롤랑 바르트, <S/Z>
3) 이진원(가재발)과 장재호로 구성된 미디어아티스트 그룹으로 디지털 테크놀러지에서 예술적 영감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멀티미디어 공연, 인터랙티브 설치,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의한 알고리즘 아트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다.
4)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착안한 표현으로,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한 방식으로서 그 대상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자는 취지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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