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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한범




이수빈은 선화예고에 진학하여 1학년을 잠깐 다니다가 17살에 한예종 무용원 실기과에 조기 입학했다. 소위 말하는 영재다. 그러나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평범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취미발레를 배우는 친구를 따라 집 주변의 문화센터에 별 생각없이 덜컥 등록했다. 6학년 때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에 합격한 것이 기회가 되어 비로소 전문적으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한국예술영재교육원(이하 영재교육원)에 들어갔다. 집안에 예술 전공자가 단 한명도 없었던지라 아버지는 발레를 반대했었다고 한다. 당연히 막막하셨을 거라며 적이 담담하게 헤아리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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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교육원에 다녔던 것에 대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분명한 혜택”이라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아 경험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무대라는 곳에 편안해졌고, 그 편안함 속에서 좀 더 큰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찍이 국내의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가 ‘이수빈’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2014년 불가리아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에 나가면서였다.

“수상에 대한 의지라기보다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출전했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이 대회에서 주니어 부문 그랑프리를 비롯해 에밀 드미트로프상1), 스페셜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그랑프리 수상자가 배출된 것은 1964년 콩쿠르 출범 첫해 블라디미르 바실리예프 볼쇼이발레단 前 예술감독 이후 50년 만이다. 유서 깊은 바르나 국제발레콩쿠르는 세계 수십여 나라에서 전문 무용수들이 대거 출전하는 대회로 스위스 로잔 콩쿠르, 미국 잭슨 콩쿠르, 러시아 모스크바 발레콩쿠르 등과 함께 세계 4대 대회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수빈은 여기서 <백조의 호수> 중 흑조 그랑파드되2), <라 바야데르> 중 니키아 독무 등을 선보이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alt◀ ⓒ VAGANOVA PRIX
▶ ⓒ Press service of the Primorsky Stage of the Mariinsky Theatre



당시 그가 격찬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대회 조직위원장인 디미타르 디미트로프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런 표현력과 연기를 펼칠 수 있는지 심사위원들이 놀라워했다”고 말할 정도로 풍부한 감정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지젤>이라고 선뜻 대답한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죽음을 겪고 유령이 되기까지 격동적인 감정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인물인 지젤을 좋아하는 만큼 그가 발레를 위한 무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이다. 과연 무대 위에서 표현해야 하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이수빈은 “고전발레의 주역은 무대 위에서 작품의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야하기 때문에, 그 스토리를 관객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 주된 목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감정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충분히 담아내기 위해서 그는 끊임없는 연습을 강조한다. 좀 더 몸을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었을 때 상상속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배우의 눈동자와 표정 등의 세세한 부분을 담아내는 스크린과 달리, 무대라는 곳은 전체적인 큰 그림으로만 보일 수 있기에 감정을 더 과장해서 몸으로 담아내야 하는데, 그 번역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연습이라는 것이다. 이수빈에게 그 연습은 플로어가 있는 연습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틈 날 때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간접적으로 이런저런 세계를 경험한다. 특히 즐겨 찾아보는 것은 바로 유튜브. 한번은 <지젤> 안의 ‘매드씬’에 연기에 참고하려고 “미친 연기”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다가 배우 류승범의 영상을 넋 놓고 봤다며 뒷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altⓒ Victor Victorov



그는 “실은 지젤과 진짜 자기 자신의 성격은 완전 반대”라고 한다. 지젤이 정말 사랑스럽고 순박하다면 본인은 평소에 꽤 덤덤한 편이라고. 전형적 이미지로 표상되는 고전발레의 여성 캐릭터를 연습하다보면 어떨 때는 오글거리기도 하는데, 그런 차이의 영역을 곱씹고 해석하다보면 오히려 지젤 속으로 들어가며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여겨진다고 한다. 작품과 인물을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차이를 더듬어보고 무엇을 더 드러내고 덜 드러낼지 상상한다. 캐릭터에 충실히 따르는 듯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풍부한 감정은 단지 무언가를 흉내 내거나 무언가의 표면적인 그럴듯함을 좇는 것과는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무대에서의 힘은 캐릭터라는 전형성이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수빈이라는 발레리나가 본인의 방식으로 섬세하게 파악한 하나의 상象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은 언제나 그 ‘미묘하게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아닐까.

“정해진 틀 안에서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움직여야 하는 발레와 달리 틀이 없는 현대무용은 자유롭고 역동적이어서 더 섬세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는 현대무용도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부전공으로 현대무용을 배우며 서사나 주어진 캐릭터의 안내 없이 “내가 가진 몸으로만 표현”해야 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몸을 사용하는 것. “몸에 대한 완전히 다른 감각”이 너무 어색하지만 그 감각이 재미있다고 한다. 이수빈은 여전히, 무용수로서의 자신의 몸을 새롭게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의 몸은 이제 어디로 향하게 될까?




altⓒ Press service of the Primorsky Stage of the Mariinsky Theatre



영재, 그리고 그랑프리 수상자라는 ‘왕관의 무게’의 책임감에 대해 진중하게 말하지만 여차저차해도 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열아홉이다. 큰 미소를 머금고 영재교육원 시절부터 함께 발레를 했던 친구에 대해 얘기하고, 자신을 기꺼이 도와주는 동료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말에서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마음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의욕이 생기 넘치게 이리저리 튀고 있었다. 발레 말고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꽤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연극도 해보고 싶고, 잡지사에서 글도 써보고 싶고, 일반 대학생들처럼 학교 다니면서 연애도 해보고 싶고… 발레는 그런 것들 중에 하나다. 그게 어떻게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자리 잡은 발레에 힘을 쏟고 있는 거다.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인 것.” 멀리 있는 미래를 고민하기보다는 눈앞에 주어진 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는 성격이라 자기도 앞으로 무엇을 할지, 어디로 튈지 한 치 앞도 모르겠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정말로 그를 연극 극장에서, 잡지에서, 무대가 아닌 아주 평범한 곳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그것은 또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래도 아직은, 이수빈의 바로 앞에는 조명이 드리워진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그의 마음에 발레가 묵직하게 자리 잡은 한, 아직은 무대가 이수빈의 몸이 서 있을 장소인 것 같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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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르나 콩쿠르 창시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촉망받는 차세대 무용수 한 명에게 수여하는 상
2) 고전발레에서 주역인 발레리나와 그 상대역이 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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