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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세종문화회관과 두산아트센터에서 김은성 극작가의 신작 두 편이 동시에 무대에 올랐다. 두산에서 공연된 <썬샤인의 전사들>은 배우가 아닌 작가의 얼굴이 들어간 메인 포스터를 쓰기도 했다. 쏟아지는 기대가 부담스럽지 않은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안 속아요”였다. “그래도 10년 했잖아요. 그런 것도 경험인데, 처음에는 속았죠. 이렇게 붕 떴었어요. 이제는 안 속아요.”




글. 김윤영




연극원 연출과를 졸업하고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동라사>로 데뷔한 김은성 작가는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이했다. <연변엄마>, <달나라 연속극>, <목란언니> 등 한국 사회의 그늘과 약자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주목받았으며 2011년 창단한 극단 달나라 동백꽃에서 부새롬 연출과 공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달나라 동백꽃은 심각하지 않고 거창한 걸 추구 안 하는 게 유지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주로 만나서 놀고요. 처음에 극단 만들고 이름을 알려야 되니까 시작한 것이 희곡 읽어주는 팟캐스트였어요. 극단 조연출이 ‘우리 극단은 약간 <무한도전> 느낌’이라고 했었죠. 또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우리 극단 주최로 독백쓰기 백일장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60~70명 정도 참여했어요. 대전에서 온 고등학생부터 60대 할머니까지. 시제를 주고 독백을 쓰고 간단하게 시상식까지 했는데 그 과정도 현장 녹음해서 팟캐스트로 방송했어요. 참가자들 본인이 쓴 글을 본인이 낭독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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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신작: 이번 신작 중 하나인 <함익>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원작의 플롯과 인물구도를 과감하게 버리고 21세기의 여성 햄릿, ‘함익’의 고독하고 분열된 심리에 집중했다. 한편 <썬샤인의 전사들>은 80년에 걸쳐 반복되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소설가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작품이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고증을 바탕으로 현대사의 비극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낸 작가의 시선이 돋보인다. 두 작품은 쓰여진 방식과 그 결이 많이 다르지만 고전작품, 역사적 사건 등 과거에서 온 이야기가 현재와 만나게 되는 지점을 계속 탐구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본을 이런 방식으로 써본 것은 <함익>이 처음이었어요. 플롯과 중심질문을 확실히 세워두고 보편적인 극작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다음 장면도 모른 채 함익의 심리에만 집중해서 썼어요. 불안하죠.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하지만 한편으론 짜놓은 것 없이 마구마구 함부로 썼던 것이 주는 좋은 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반면에 <썬샤인의 전사들>은 시간이 정말 오래 걸렸고, 자료 조사가 쉽지 않았어요. 조선족 중공군과 미군의 카투사 소년병이 장진호에서 만나는 장면을 역사적으로도 고증하고 싶었어요. 미군의 경로를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극중 인물 호룡이 속한 중공군 부대에 대한 자료를 찾는 게 만만치 않았어요. <썬샤인의 전사들>은 굉장히 길고 설명해야 할 부분이 많은, 장황한 면이 있는 대본이었고 또 <함익>은 다소 거칠고 많이 비어있는 대본이었는데 그 단점들을 연출분들과 배우분들이 잘 메꿔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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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샤인의 전사들> ⓒ두산아트센터




" 연우
          사느냐 죽느냐는 햄릿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거예요.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어떻게 살아
          있느냐, 그것이 중요했을 거예요.

          - <함익>에서






지금 여기서 비극이 공연되어야 하는 이유
결국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죠. 비극의 주인공 입장에 한 번 서볼 수 있는 기회. 우리가 현실에서 진짜 비극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비극을 목격하고 간접 경험하는 과정을 겪고 나면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보게 되고 좀 긍정적인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참 희한하게도.

<햄릿>은 아직도 셰익스피어 작품 중 제일 어려워요. <맥베스>나 <리어왕>에 비해서 주제도 모호하고요. 잘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에 매료됐던 것 같아요. 많이 읽을 수밖에 없었고, 뭔가 하나 찾으면 커다란 비밀 발견한 것처럼 좋아했죠. 연극원 다닐 때 지금은 없어진 구본관 옥상에서 실제로 밤에 횃불 켜놓고 <햄릿> 1막 1장 장면발표를 했었어요. 그때 공부했던 게 이번 대본에 많이 반영됐죠.


세월호 이후, 작가로서 글 쓰는 일에 관하여
<썬샤인의 전사들>은 처음에 영국군 병사와 중국군 병사가 한국전쟁 때 한반도에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였어요. 그러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쓰던 얘기가 배부른 소리로 느껴졌죠. 이런 와중에 연극계 검열 사태가 좌르륵 터졌잖아요. ‘검열을 거부하는 극작가들’이라는 모임을 주도해서 만들었어요. 거대한 일은 아니고 선언서 같이 만들어서 낭독하는 그런 일을 했죠. 그 과정에서 제가 그 일을 썩 잘해내지 못했어요.

이를 테면 선생님급 작가들에게 연락해서 참여하게 하는 것도 자꾸만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과정 같았거든요. 확실하게 적이 만들어져야 했고, 그런데 이쪽 전선은 되게 아득하게 모아지지 않고. 또 한 목소리를 내야 된다는 것 자체가 폭력적으로 느껴졌고요.

힘들어서 몸도 아프기 시작했어요. 많이 걸어야 해서 계속 산에 갔는데 그러면서 쓴다는 일이 저한테 다시 각별하게 다가왔어요. “써서 뭐하나. 쓴다는 게 어떤 힘이 있느냐”라고도 할 수 있지만, 거창하게 누굴 위해서나 어떤 메시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뭐라도 쓰지 않으면 너무 견디기가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책상 앞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행복했어요. 쓸 수 있다는 일이. 그리고 뭔가 써진다는 것이.





" 미연
          용서를 안 한다는 말은 미워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용서를 안 하겠다는 말은 용서를
          안 하겠다는 말이에요.

          - <썬샤인의 전사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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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샤인의 전사들> ⓒ두산아트센터




작가와 거울: <썬샤인의 전사들>에 등장하는 동명의 애니메이션에서 썬샤인의 전사들은 악당 블랙드락에게 거울을 보여줘서 그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사들도 블랙드락의 얼굴을 닮아가기 시작하는데, 주인공 승우가 찾아낸 해결책은 거울을 보며 스스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다.
무엇과 싸워나간다는 건 진짜 싸우는 거예요.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고 해도 무기도 들고 주먹도 쥐어야 되는데 그게 상처받는 일이지 사랑받는 일은 아니죠. 그러니까 늘 조심하고 거울을 자주 봐야 해요. 무엇과 싸워나가기 위해서 어떤 순간엔 내가 폭력적이 되고, 내부의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고, 그 지점이 무서운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도 항상 그런 트라우마와 후유증이 있었죠. 어떤 역사적인 큰 진전들이 있었다면 그걸 이뤄낸 이면에는 그늘도 분명히 있었어요. 좀 거친 얘기지만, 6월 항쟁의 주요 세대였던 386들을 보면 그들의 학생운동권 내부에는 또 굉장히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있었잖아요.

<썬샤인의 전사들>의 원래 제목은 <작가들>이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의미는 글을 쓰는 몇몇 인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 시대를 살아낸 하나하나의 인물들, 또 이것을 지켜보는 관객들 역시 작가로서 호명된다.
뭔가 쓴다는 것은 계속해서 보겠다는 의미이고 기억하겠다는 의미에요. 사회적 사건들 때문에 낙담해 있는 분들이 자신이 애쓰고 있는 작은 것 하나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좋겠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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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 ⓒ서울시극단





" 시춘
          니 작가 만들라꼬 그런 일들이 있었던 기다.
          쓰라고. 니보고 쓰라고.

          - <썬샤인의 전사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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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익> ⓒ서울시극단




연 출전공에서 극작가로
중학생 시절부터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 소설, 단막극 같은 것도 써봤어요. 그런데 글 쓰는 걸 전공한 큰누나가 제가 문창과나 국문과에 가는 걸 결사반대했죠. 그래서 연출과에 왔는데 결과적으로 작가로서는 아주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연출이라는 게 텍스트를 현실로 옮기면서 수많은 현실과 싸워야 되는 일이거든요.

연극원 다닐 때, 선생님마다 애제자가 있는데 저는 항상 거기에 못 끼는 열등생이었어요. 연극도 늦은 나이에 보기 시작해서 따라가기 바쁜데, 성격도 연출이랑 안 맞고요. 3학년부터 희곡 쓰는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으로 윤영선 선생님께 칭찬도 받아보고 그랬어요. 거의 유일하게 저를 예뻐해 주셨다고 할까요. 처음 쓴 단막극 <죽도록 죽도록>을 연극원에서 야합플레이로 공연을 했었는데 이상우 선생님이 보고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삼합이다, 삼합. 미숙한 대본, 미숙한 연출, 미숙한 연기.” 그때가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돌이켜보면 이브에 그 작은 공연을 보러 와주신 거죠. 정말 좋은 선생님들이셨어요. 또 저한테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다른 곳에선 은성이 희곡 잘 쓴다고 말씀하셨대요. 선생님들이 아주 커보였고, 칭찬 한 번 받으면 너무 신났었죠.

무명無名
일단 제가 무명이고요. 연극하는 이 무리 안에서 알아준다고 그게 유명한 건 아니죠. 저 집에 가면 아직도 부모님께 걱정 받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못해서  연극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본인이 포기만 안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썬샤인의 전사들> 3막 쓸 때 그랬어요. 2막 제주소년 끝내놓고 3막 중공군 넘어가는 게 6개월 걸렸거든요. 막판에 너무 지치는 거예요. ‘근데 한 번만 더 가보자, 한 번만.’ 그때 찾아졌어요. 학교 다닐 때 윤영선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저기 산을 보고 저길 어떻게 갈까 그러면 못 간다고. 그런데 가다보면, 가게 된다고. 작가들은 참 행복한 존재들인 것 같아요.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뛰어다녀야 하고 땀 흘려야 되고 뭘 부숴야 되고 이런 온갖 일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앉아서 쓰는 일이라는 건 되게 복된 직업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책임이 있는 거죠. 앉아서 뭔가 쓴다, 써야 된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 같아요. 이유가 있겠죠.

너는 앉아서 써라, 한 데에는.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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