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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오후, 우리나라의 궁궐 중 휴식과 풍류를, 그리고 자연을 녹여낸 창덕궁을 마주 보면 또 다른 공간이 눈에 띈다. 섬세하게 만져진 한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정리된 푸른 잔디의 국악마당, 그 아래에는 자연음향으로 국악을 즐길 수 있는 전문 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는 서울돈화문국악당이 그곳이다. 마주본 창덕궁의 정신을 닮아 아정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그곳에서 초대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김정승 교수를 만났다.




글. 신혜주




돈화문과 마주 본 풍류
창덕궁의 얼굴인 돈화문의 이름을 딴 서울돈화문국악당은 전통문화 지역인 창덕궁 일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새롭게 탈바꿈한 국악전문 공연장입니다. 원래 이곳은 주유소가 있던 부지였어요.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 양식이 혼합된 공연장은 야외공연을 위한 국악마당과 실내 공연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실내 공연장은 물리적으로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어요. 확성을 쓰지 않는 자연음향을 활용하고 있고, 반半아레나2) 스타일로 되어있으면서 무대가 살짝 돌출되어있죠. 그래서 다른 공연장에 비해 객석과 무대의 거리가 굉장히 좁아서 실제로 공연을 보면 연주자가 숨 쉬는 소리가 들리고 손가락이 긴장해서 떨리는 게 보이고 그래요. 이런 측면에서 작지만 특성이 있는 공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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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돈화문국악당




좋은 것을 친숙하게
3월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두 열쇳말을 품격과 친숙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건 사실 주체적으로 공연을 제작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의 이상이죠. 저 역시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 것 아닐까, 이 말에 책임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사전에서 찾아보면 품品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사물의 태도나 됨됨이를 의미하고 격格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 걸맞은 것을 의미하죠.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품격 있는 공연이라는 것은 태도나 됨됨이가 훌륭한 콘텐츠를 상황에 적확하게 구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아티스트와 이곳 서울돈화문국악당에 맞게 잘 구현해내면 그게 곧 품격 있는 공연이 아닐까요. 품격이라는 말을 굉장히 고상한 것, 혹은 엘리티즘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으신데 제가 생각하는 품격은 이 공연장에 적합하고 좋은 양질의 공연을 가져와서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요소를 가미하겠다는 의미로 보시면 될 것 같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겠죠.




전통과 현대 사이에 서다
제가 국악을 시작하게 된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은 할아버지입니다. 조부님과 많은 명인분들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과 조우하며 평생 음악을 벗 삼아 살아가신 분들로 제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거든요. 저한테 국악은 어떤 음악적 실체이기도 하지만 명인분들께서 추구하던 정신적인 측면이 훨씬 강해요. 전통음악과 더불어 시대에 따라 나오는 새로운 음악이 있고, 이 시대의 한국음악이라는 것들이 대두되는 시간 속에서 그것을 뛰어 넘는 정신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현대음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어요. 1997년 국립국악원에 입단을 하고 바로 그다음 해 독일에서 한국의 현대음악들을 연주하는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좋았어요. 함께 연주했던 가야금 연주자 이지영 교수님과 현대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단체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이야기가 되어서 CMEK(한국현대음악앙상블)라고 하는 팀을 조직하게 되었고, 그 일이 계기가 돼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죠.




서로 닿아있는 맥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서로 다른 지점들이 많이 보였어요. 심지어 각 음악을 연주할 때 쓰는 근육이 다른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배음구조나 음향 등 넘어야 할 벽들이 정말 많았죠. 단순히 대금을 플루트처럼 연주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나의 악기가 가지고 있는 연주의 범위에 관한 궁금증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악기로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데 연주자가 연주로 커버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데이터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럽게 국악기, 특히 대금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두 음악이 너무 상이한 것 같지만 제 생각에 근본적인 부분이 상당히 닮아있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의 전통음악은 연주자들에게 상당히 열려있는 음악이거든요. 물론 그 자유는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연주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전통음악은 대체로 그런 자유로운 음악이고 현대음악도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음악이죠. 제가 연주했던 현대음악은 연주자가 배려 받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기량을 풀어낼 수 있는 지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런 맥락에서는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은 굉장히 맥이 닿아있고, 때문에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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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와 창조 사이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국악기로 현대음악을 연주했을 때 국악의 정체성을 흐린다는 비판, 많이 받았고 솔직히 저 역시 신경 쓰이죠. 그러나 정체성이란 것이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성질일까요. 지금까지 많이 변해왔기 때문에 하나의 성격만을 가진 것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어요. 국악의 정체성에 대해 물어본다면 누가 그걸 명확히 대답해줄 수 있을까요. ‘수제천이다’, ‘종묘제례악이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인의 피’와 같은 말은 너무 추상적인 지점이니까요. 구체화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모호한 논리로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나 창작을 너무 쉽게 재단하고 규정지으려는 것은 아닐까요. 국악의 정체성을 흐린다고 염려하시는 분들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 때문에 의미 있는 시도들이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연주자의 스펙트럼
음악적인 스펙트럼이 넓다는 이야기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예요. 연주자에게 연주를 잘한다는 것도 칭찬이지만 연주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도 스스로 원하는 평가 중 하나고 제가 노력했던 지점이거든요.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다 보면 한쪽으로 치중되는 경향이 많이 있어요. 저 역시 모든 장르를 균일하게 연주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장르를 놓치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장르 하나하나의 음악이 저한테는 굉장히 소중했거든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가져가는 연주자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고 노력해왔죠. 그래서 저는 특별히 바뀌는 것 없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할 것 같아요. 앞으로 내가 더 할 수 있고 해볼 만한 음악들은 어떤 것이 있을지 계속 열심히 찾아야겠죠. 그리고 여러 장르의 음악을 열심히 하면서 제자들과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현재로서는 그동안 제가 관심을 가져왔던 정악분야에서 합주론과 같은 부분에 학술적인 체계를 위한 서적을 구상하는 일이 단기 목표가 될 것 같아요.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예술 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사는 거 하루 이틀 일 아니죠. 저도 먹고 살기 위해 여러 공연도 하고 많은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자리 잡고 활동을 하면서 큰 불편함이 없는 상황이잖아요. 예술, 다 좋은데 젊은 제자들이 쉽지 않은 사회 구조 속에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저도 기성세대가 되어서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었는데 정작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것,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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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돈화문국악당 무대



인터뷰를 마치며 문득 국악계에서 김정승 교수를 하나의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악에서 현대음악까지, 예술가에서 교육자, 그리고 예술감독까지의 넓은 스펙트럼을 하나의 단어로 담아낼 수 있을까. 인터뷰 내내 나누었던 생각에는 그의 말과 같이 물리적인 것을 뛰어넘는 정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펼쳐진 개관축제 <별례악別例樂>은 ‘특례’의 옛말로서 특별한 예를 이르는 ‘별례別例’의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김정승 교수는 국악의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별례악’ 그 자체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례악>을 시작으로 진정한 풍류를 즐기는 김정승 교수의 손으로 만들어질 서울돈화문국악당의 모습이, 그리고 한 발자국 더 새로워질 그의 예술세계가 더욱 기대된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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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승 예술감독은 이찬해 작곡가의 <생의 한가운데>를 초연했다.

2) 고대 로마의 층계식 좌석이 있는 원형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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