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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송요     




미술원 신입생들은 1학년 1학기 파운데이션 수업 시간 동안 2주에 적어도 하나씩의 작업을 완성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최소 석 달 남짓의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다량의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고 발표하는 기술을 익히는 셈인데, 자신의 작업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의무로 주어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미술관’, ‘촉각 드로잉’, ‘충격과 모험’, ‘과장과 은폐’, ‘색채’ 같은 수업주제가 개개인의 개별 작품 제목을 대체했고, 일단 과제를 소화하고 나면 그 이후 내용에 충실해 보이는 이름을 붙일 자신이나 의지는 크게 감축되곤 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말, 글, 조형물, 음악, 장면, 영상, 춤의 운명이 그런 것이 아닐까. 토카타 쓰라는 줄 알고 새벽 세 시까지 쓰다가 푸가인 걸 알고 바꾼 작곡과 학생의 쓰다만 토카타… 우드락 두께 아크릴 재단 실패해서 짓다 말고 버린 건축과의 모델… 좋은 리뷰로 완성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결국 시간에 쫓겨 덜 읽은 책, 덜 본 영화에 상상력과 수사를 끼얹어 마무리한 페이퍼… 자그마하지만 소중한 미완과 폐허의 작업들은 매일매일 이름 없는 상태로 생산되고 기억의 뒤안길로 떠난다.

작명은 작업에 관심사와 선택과 개성과 의지가 선명히 반영되고 ‘자기 것’이 되는 시점부터 활약한다. 끝까지 만들어 끝끝내 이름을 붙인 것들은 혼자서도 돌아다닐 수 있는 생명력을 얻어서 수업이나 학기나 학교생활이 끝나도 계속 불리곤 한다.

그렇게 처음 불린 뒤부터 오랫동안 기억되는 이름들이 있다. 여행 로맨스의 고전이 된 <김종욱찾기>나 <빨래> 같은 뮤지컬 제목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제 극장 안팎으로 아주 익숙한 고유명사가 됐다. ‘대학로에 <빨래>가 돌아왔다’는 카피가 부연설명 없이도 납득되고, 베이징에서 찾는 왕서방보다 인도에서 찾는 김종욱이 더 즉각 와 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빌려온 이름이 거듭 불리며 단단히 제 것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연극원의 ‘알고보면 천재들’을 표방하는 극단 문의 올모스트 시리즈는 존 카리아니의 <올모스트 메인>에서 제목과 발상을 차용해 만든 <올모스트 석관>으로 시작됐다. 석관동에서 출발해 과천 문원동, 안산 단원구, 인천 문학동 등을 거치며 이어진 이 시리즈는 어느덧 극단 문이 극장 밖에 나가 지역을 만지고 걷고 냄새 맡은 커뮤니티 연극의 이름이 됐다.

함께 만드는 사람들, 팀의 이름을 지어 시작과 과정을 기억하기도 한다. 연극원을 졸업한 성기웅과 윤성호를 비롯 여러 작가와 배우, 연출가가 모인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는 한국어가 전 세계에서 12번째로 언중이 많은 언어라는 데서 착안해 이름 붙였다. 이름대로 언어에 섬세하게 반응하는 희곡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2010년 연극원 상자무대 공연을 시작으로 관객과 만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는 프세볼로트 메이어홀드의 필명이자 다른 자아인 ‘다페르튜토 박사’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태리어로 ‘어디서든’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관객이 연극성을 인지하고 연극의 능동적인 한 축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메이어홀드의 주장대로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역시 관객의, 관객과, 관객을, 관객으로부터, 관객에게를 중시한다.




alt 구연지, <Burning>, maker on paper, 24.3x27cm, 2015



무용원을 졸업한 이인수가 창단한 EDx2는 감정emotion의 E와 드라마drama의 D를 두 배로 강조한 이름이다. 기술적인 능숙함과 시청각적인 수려함 이상으로 감정표현과 스토리텔링을 중시하는 무용단의 성격과 지향점을 보여준다. 전통예술원 출신의 멤버 두 사람이 함께하는 밴드 타니모션은 가야금, 거문고 등의 국악 현악기를 연주한다는 뜻의 탄금彈琴과 감정emotion을 더해 이름을 지었다. 악기를 타듯 듣는 사람의 감정도 타고 놀겠다는 포부를 담은 흥 나는 이름이다.

창작과 기획, 그리고 기획으로서의 창작을 이어가는 팀도 있다. 미술원 건축과를 졸업한 멤버 둘을 비롯 디자인을 전공한 여러 구성원이 활동하고 있는 가찌는 공간의 이름이자 팀의 이름이기도 하다. 가찌라는 이름은 ‘같이’의 제주 사투리에서 따온 것이다. 입안에 소리 내어 머금었을 때 같이, 가치 같은 다정한 단어처럼 발음된다. 가찌는 서촌의 한옥을 전시, 공연, 식사, 숙박시설로 꾸리며 서로 다른 장르를, 장소와 공간을, 안과 밖을 같이 가치 있게 쓰고자 고민하고 탐험 중이다.

영화과 전문사를 기획 전공으로 졸업한 프로듀서 4인방이 만든 아토는 순우리말로 선물이란 뜻이다. 관객에게 다양한, 선물 같은 영화를 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올해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첫 장편 <우리들>은 아토의 김순모 PD가 기획해 많은 이들에게 선물 같은 위로를 주었다.

음악학과를 졸업한 이인한을 대표로 둔 공연 기획 단체 뮤직 컨시어지는 관리인 내지는 문지기라고 직역할 수 있는 컨시어지concierge라는 직관적 단어 선택만큼 지향하는 바도 명확하다. 관객과 퍼포머 모두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고착화된 형식의 음악 공연을 만드는 대신, 쌍방을 연결하고 재미를 전하는 관문의 관리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뮤직 컨시어지는 공연의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없는 젊은 연주자 및 성악가들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만드는 사람과 프로젝트가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기억되는 일도 생긴다. 지난해 조형예술과 졸업전시에서 시작해 여러 채널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미소녀핑크토끼전사와 글로리홀은 부러 예명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각자의 작업이 캐릭터 또는 메이커의 이름을 전면에 두고 있고, SNS에서의 활동량도 많아 프로젝트의 이름이 일종의 닉네임으로 불리게 됐다.




alt 구연지, <The Leftovers>, pencil on paper, 24.3x27cm, 2015



미소녀핑크토끼전사는 분홍색 머리에 오색찬란 장식을 달고 빔을 날리면서 미술원 중앙정원의 공식 입주자였던 오랜 친구들인 토끼 이야기를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영상과 퍼포먼스, 책 등의 매체가 활용된다. 계속 토끼전사와 토끼왕국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글로리홀은 조명을 발표하고 전시하고 판매한다. 글로리홀이란 이름은 유리 블로잉 작업 중 유리가 차갑게 굳지 않도록 하는 도구에서 따왔다. 반짝이고 보스락거리는 소재의 비닐, 색색 깃털, 드라이플라워 등 까마귀가 좋아한다고 알려진 아름다운 것들이 사용된다. 존재하는 곳을 마구 극장으로 만들며 공연을 벌이는 출몰극장이나, 짧고 굵은 일들을 번쩍깜짝 내는 초단발활동 역시 개별 멤버를 아우르는 정체성으로 관객들에게 호명된다.

짝사랑의 이름만 알아도 커다란 것을 알게 된 기분이 드는 것도, 스마트폰 음악검색과 포털사이트 지식검색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제목 뭔지 아시는 분’ 게시물이 항상 분주하게 누군가와 무언가의 이름을 찾고 있는 것도, 이름을 가졌을 때 조금 더 정확해질 사랑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닐까. 작품도, 팀도,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일 거다.이름을 짓고 부르는 것은 힘이 세다. 적어도 기억력이라는 힘만큼은.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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