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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혜주




무더웠던 여름,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욕심과 무분별한 개발로 밀려난 자연이 지금 복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도시의 콘크리트가 열을 뿜어내며 사람들을 밀어내는 듯하다. 자연이 뿔났다.

웅녀 신화가 떠오른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던 이야기. 그렇게 멀고 먼 옛날에는 곰이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곰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어울려 살았더랬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문명화된 인간은 자기들만 살겠다며 곰들을 몰아낸다. 그런데 막상 곰이 사라지니 사람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어떡하나. 인간과 곰은 화해하고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제5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극작가 고연옥의 희곡 <처의 감각>과 이를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연출가 고선웅의 연극 <곰의 아내>는 이 질문에 대한 각각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시작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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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아내, 동굴 밖으로
곰과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곰은 길을 잃고 발을 다쳐 울고 있는 인간 여자 아이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여자가 임신해 아이를 낳았을 때는 그녀의 몸을 오래 오래 핥아 주었다. 동굴 속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날 찾아온 사냥꾼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곰과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죽이고, 어깨에 여자를 둘러메고 마을로 돌아간다. 여자는 새끼를 잃은 곰이 온몸을 뜯으며 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곰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마을에서 도망 나온다.

마침 곰과 여자가 살던 숲으로 한 인간 남자가 흘러들어온다.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며 숲 속으로 들어온 남자는 죽을 지경에서 여자를 만나 목숨을 건진다. 그녀는 곰 남편을 만나 용서를 빌어야 한다며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아뿔싸, 곰 사냥꾼들이 묶고 가는 여인숙에서 여자와 남자는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홑몸이 아님을 느낀 그녀는 그를 따라나선다. 간이역에서 그들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함께 떠난다. 그렇게 곰의 아내는 인간 세상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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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보다 더 동굴 같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왔건만 세상은 이미 짐승 같은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남자는 먹고사는 일에 치여 점점 신경질적이 되어 가고, 자신을 묶어두는 아내와 아이를 원망하며 헤어진 여자친구를 그리워한다. 결국 남자는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회사의 기밀문서를 팔아넘기려 하지만 들통이 나 회사를 그만둔다. 한편 여자는 가정부로 일하던 곳에서 수중 들던 노인에게 겁탈당할 뻔 한다. 자신이 짐승이 된 것 같다는 여자의 말에 노인은 말한다.





" 여자
          내가 짐승이 된 것 같아요.

" 노인
          이 여자야, 그게 정상이야.





곰들을 쫓아내고 짐승이 된 인간들. 이제 그들은 곰 같은 인간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곰을 사랑했던 곰의 아내 역시 그렇게 버림받는 존재다.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 남편을 사랑하고 노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여자의 진심은 번번이 왜곡된다. 남자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곰 남편을 여전히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노인은 그녀의 친절을 성적 유혹으로 멋대로 해석해 버린다.

사랑을 모르는 삭막한 세상은 이제 인간을 쫓아낸다. 곰과 살던 동굴 속에서 곰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던 새끼에게 동굴은 드넓은 산이고 바다였건만. 인간 세상은 산과 바다는커녕 서 있을 자리조차 없다. 인간 세상은 자연의 동굴보다 더 비좁고 숨 막히는 동굴이다.

남자는 이 동굴에서 도망치려 한다. 여자와 두 아이를 데리고 기차역을 지나 도착한 펜션. 그곳에서 남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버려두고 헤어진 여자친구에게로 향한다. 일찍이 세상에 자기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여행을 하며 떠돈다는 여자친구에게로, 남자 역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난다.





" 남자
          분명한 건, 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떠난다는 거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
          그곳으로 갈게.
          거기, 순수 박물관으로.





다시, 동굴 어귀에서
남자가 떠나고 아이들과만 남겨진 여자는 이윽고 동굴을 발견한다. 동굴에서는 곰 남편의 기척이 느껴진다. 여자는 곰과 다시 만나 화해할 수 있을까. 그녀는 동굴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다.





" 여자
          …… 당신은 내 아내였지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다가
          남김없이 빼앗기고 쫓겨나야 했던,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
          … 이제 나도 당신의 자리에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에게서 전해져 온 감각으로…
          당신에게 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
          조금만 기다려 줘요.






그리고 여자는 방울을 울린다. 이내 곰의 새끼를 죽였던 사냥꾼이 나타난다. 꼭 가야 하냐는 사냥꾼의 물음에 여자는 애들이 죽어야 자기가 떠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마지막 지문.

사냥꾼, 칼을 뽑는다.




altⓒ남산예술센터



인간에 대한 분노로 울부짖는 곰의 화를 풀고 화해하는 방법으로 그녀가 택한 것. 그것은 제물로서 인간 아이와 어쩌면 자신마저 희생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인간성 상실이 불러온 현대사회의 비극을 그려내고자 했던 극작가 고연옥이 택한 희곡의 결말이다.

그러나 특유의 과장된 연극적 메소드로 화해와 희망의 무대를 만드는 연출가 고선웅의 공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울고 있는 여자를 향하여 곰(!)이 동굴에서 무대 위로 걸어 나온 것이다. 희망찬 노래가 울려 퍼지고 곰과 다시 만난 곰의 아내는 환한 웃음을 짓는다. 이들 뒤로 떠난 남자와 여자친구가 재회하여 애틋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보고 섰다. 잃어버렸던 순수의 자리로 돌아간 두 연인들의 미래는 전보다 밝을 것 같다.

이렇듯 희곡과 공연은 전혀 다른 분위기의 결말을 그리지만, 가만 보면 두 작품 모두에서 화해를 소원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다만 희곡에서는 이를 위한 여자의 희생을 암시하는 반면, 고선웅의 공연에서는 곰의 용서로 화해가 이루어진다는 점이 차이랄까. 이 차이가 가져온 결과가 결코 사소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외침이 울린다. 우리가 인간의 이기심을 반성하고 화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이 시대를 사는 웅녀의 간절한 외침이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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