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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하빈




공든 탑이 무너지랴. 정성을 다한 일은 헛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속담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쌓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속담은 거짓말이다. 공든 탑도 종종 무너진다. 또한 탑이 무너진 자리에는 그 잔해뿐만이 아니라 힘들게 탑을 쌓아 올렸던 사람의 허탈함이 남는다.

2011년의 어느 날, 무너지기만 하는 탑에 질려버린 어느 청년들은 생각했다. ‘1층짜리 탑을 쌓으면 절대 안 무너지지 않을까?’ 그 청년들은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단돈 20만 원으로 1층짜리 탑만을 위한 축제를 만들었고, 모교의 강의실에서 축제의 첫 막을 올렸다. 2011년 3월 스튜디오 쉘터의 주최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상영실에서 열렸던 제1회 10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이야기다. 다섯 명의 청년이 이렇게 장난처럼 시작한 축제가 2016년에 이르러 230명이 함께 만드는 대형 장난으로 거듭났다. 강렬한 여름 햇살 가운데 복합문화공간 탈영역 우정국에서 ‘잔상After Image’이라는 컨셉 아래 개최된 제6회 10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세 가지 ‘날’ 키워드로 풀어본다.




#1. 날(生) : 있는 그대로, 날것의 아이디어

심사도, 예선도, 저명한 심사위원도 없는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출품 조건은 단 하나, 10초 내외의 애니메이션일 것. 10초. 첨예한 서사구조나 다층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너무나 짧은 시간이지만,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날것의 아이디어를 담아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페스티벌 현장에서는 각종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시종일관 스크린 위에 떠올라 있었다. 10초 내외의 작품이라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코믹하고 단순한 움직임으로 실소를 유발하는 작품부터 시사적 이슈에 대한 시각을 제시하는 진지한 작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230개의 10초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페스티벌의 6대 권장사항-고민금지, 과열금지, 오바금지, 반칙권장, 숙면권장, 실험권장-을 성실히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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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나 지브리에서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이 일류 요리사의 요리라면,
10초 애니메이션은 날것 그대로의 음식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재료의 맛, 날것의 맛을 알지 못한다면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0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처음 생각해 내고 현재 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스튜디오 쉘터 소속 박태준 감독의 말이다. 그의 말은 페스티벌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훌륭하게 전달하고 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뒤 권위 있는 누군가의 식탁에 오르지 않더라도 날것의 재료 그 자체로 충분히 좋은 작품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2. 날(我) : 모두의 축제, 날 참여하게 하다

‘누구나 감독이 되고 누구나 심사위원이 될 수 있고 단 한 명의 탈락자도 없는 진짜 축제.’ 페스티벌 프로그램북 바로 첫 장에서 볼 수 있는 문장이다. 말 그대로 10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는 출품만 한다면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으며 시상을 원한다면 누구나 심사위원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출품하지 않더라도 애니메이션 제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페스티벌 현장에서 진행되는 ‘킵드로잉 프로젝트Keep Drawing Project’ 덕분이다. 10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는 방문자들이 그린 그림을 한 장씩 모아 짧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밑그림을 바탕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그림을 그려 참여할 수 있으며 이렇게 제작된 애니메이션은 페스티벌 마지막 날 폐막작으로 상영된다.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그림들이 앞뒤로 이어지는 순간, 그림들은 정지 화상의 틀을 벗어나 아름다운 움직임으로 재탄생한다.
‘킵드로잉 프로젝트’와 더불어 페스티벌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DIY 시상식’ 역시 누구나 페스티벌의 주체로 탈바꿈할 기회를 제공한다. 1등이 상금 1만 원을, 10등이 상금 10만 원을 가져가는 10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특유의 파격적인 시상과 스튜디오 쉘터가 선정한 올해의 작품 시상이 끝나고 나면 바로 ‘DIY 시상식’이 펼쳐진다. 이 시상식에서는 누구나 사전 접수를 통해 자신의 기준으로 상을 만들고 시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박장대소를 끌어내 손바닥을 아프게 한 작품에게 ‘찰과상’을, 아쉽게 놓쳐 유감을 표하고 싶은 작품에게는 ‘스미마상’을 수여하는 식이다. 그 떠들썩하고 유쾌한 현장에서 보통의 시상식에서 느낄 수 있는 권위나 경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10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은 수동적으로 페스티벌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페스티벌을 만들어나가는 창작의 주체로서 축제를 향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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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날(飛) : 예술가들, 날아오르다

10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라고 해서 애니메이션만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면 그건 아직 이 축제를 반밖에 모른다는 소리다. 이번 페스티벌은 마포구의 창전동 우체국 옛 건물을 개조한 복합문화공간 탈영역 우정국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정국 1층과 2층은 물론이고 건물의 외벽까지 활용할 만큼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1층 상영관 옆에서는 마야 요네쇼Maya Yonesho 작가의 작업을 전시한 ‘실험애니메이션 초청전’을, 2층으로 올라가면 다양한 청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작업을 모은 기획전 ‘YOUTH탐구생활’과 대안 만화 잡지를 모은 특별전 ‘손의 맛’을 만나볼 수 있었다. 또한 즉석에서 그림이 완성되는 모습을 관람할 수 있는 ‘카툰 드로잉 쇼’, 예술가들의 실패담을 들어보는 ‘실패왕 토크쇼’ 등 여러 행사가 지루할 틈 없이 축제의 일정표를 채웠다. 주목할 만한 점은 흔히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미술과 영상 기반의 프로그램이 아닌 ‘한 여름밤의 파티’ 퍼포먼스나 음악가의 ‘작고 느린 콘서트’ 공연 역시 이 페스티벌의 프로그램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은 강의실의 스크린에서 그 막을 올린 지 5년, 이제 10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초단편 애니메이션을 위한 페스티벌인 동시에 다양한 예술가들이 각자의 창작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화합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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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초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스튜디오 쉘터에서는 ‘10’이라는 상징적 숫자에 맞추어 열 번의 축제만을 예정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2016년에 6회를 맞았으니 4번의 축제만이 남아있는 셈이다. 지난 여섯 번의 페스티벌을 돌이켜 보았을 때 단순히 그 규모를 더하는 부피의 성장이 아니라 견고함을 더해가는 경도의 성장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모두가 크고 높은 것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이 당연해진 요즘, 작고 낮은 것의 미학을 즐기자 권하는 이 페스티벌은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만하다. 이 기상천외한 페스티벌은 분명 그 자체로도 1층짜리 탑임에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모습 그 아래로 무엇이 얼마나 묻혀있는지 알 수 없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탑 말이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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