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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연수

           

9명의 극작가들
‘먹고 살면서 예술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예술가들의 고민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10년 동안 계속해서 글을 써 온 극작가들이 있다. 바로 박춘근, 고재귀, 조정일, 김현우, 김태형, 유희경, 천정완, 조인숙, 임상미 극작가다. 2005년 12월, 이 9명의 극작가가 의기투합해 창작집단 ‘독’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매년 하나의 주제를 정해 20여 분 분량의 단막극을 쓰고 2주에 한 번씩 합평하며 함께 고쳐오고 있다. 3부에 걸쳐 총 26편의 희곡이 담겨 있는 두툼한 희곡집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끈질긴 10년의 결과물이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극작가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치이지 않고, 홀로 글을 쓰는 외로움에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꾸준히 글을 써올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조정일 극작가는 한 기사에서 그 비결을 일컬어 ‘같이 노는 거’라고 했다.

 

“극작은 연극판에서 상대적으로 외로운 작업이거든요. 얼마 전 모임에서 재귀 형이 ‘10년만 같이 놀자며 독을 만들었는데 진짜 10년 잘 놀았다. 10년만 더 놀아보자.’ 하더라고요. 같이 노는 거. 이게 10년 함께 갈 수 있는 비결이겠죠.”

조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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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편의 이야기들
희곡집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그렇게 함께였기에 쓰여졌고, 함께 있기에 더 다양한 의미들을 엮어낸다. 각 장 8~9편의 희곡들은 같은 주제나 공간, 혹은 상황을 공유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정은 인생을 다 겪어내고도 한 번도 빛나는 순간이 없으면 어쩌지?

조인숙 <소녀가 잃어버린 것>

           

1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의 주제는 상실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주인공들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난데없이 들려오는 매미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잃은 것 대신 다른 것을 얻거나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 김태형 작가의 <하이웨이>는 5년 전 스키캠프에서 46명이 죽은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18세 소녀와 그 캠프에서 아들을 잃은 동화작가의 만남을 다룬다. “울다 보면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얻은 것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무언가를 상실한 자리에서 우리는 또 무언가를 얻는다.
고재귀 작가의 <두통>에 등장하는 이석호는 김현우 작가의 <언제나 꽃가게>에서 꽃을 사면서 잃어버렸던 사람이자 다시 찾을 사람에게 줄 거라고 말한다. 꽃가게 주인 애린이 추천한 꽃은 프리지어. ‘당신의 시작을 응원해’라는 꽃말을 가진 꽃이다. 이렇듯 1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은 우리 모두 무언가를 잃지만, 대신에 다른 것을 얻고 또 다시 시작하며 살아감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우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어. 아무것도.”

2부 [사이렌]은 서울 외곽의 한 오래된 빌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 1층은 라멘가게와 카페, 2층은 기원과 마사지샵, 3층과 4층은 각각 원룸과 투룸이고 5층은 개척교회, 옥상에는 낡은 첨탑과 빛바랜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곧 헐릴 예정인 건물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인생은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우리 사회 소시민들의 불안을 암시하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들려오는 각종 사이렌 소리는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높인다. 그러나 이들의 불안한 상황은 화장실이 급한 택배기사의 방문에 희극적 상황으로 승화된다.

 

택배 선생님. 제가 실례지만 똥이 마려워서.
이만리 근데요?
택배 댁에서 똥을 좀…… (사이) 살려주십시오.

천정완 <우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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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터미널]의 무대는 누군가가 오고 또 떠나가는 각종 정거장들이다. 희곡의 공간은 대학 앞 버스정류장에서부터 버스터미널, 전철역, 서울역, 인천국제공항과 남극세종기지뿐만 아니라 달에 있는 우주선착장대합실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터미널은 누군가를 만나고 또 헤어지며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터미널 속 주인공들은 떠나는 데 성공하기도 하지만(박춘근 <은하철도 999>), 실패하기도 한다(김태형 <Love so sweet>). 서로 만나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고(유희경 <전하지 못한 인사>), 이별하기도 한다(김현우 <거짓말>).

 

태현이 떠난다.
잠시 뒤, 기차가 도착한다. 기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온다.

효주 당신은 떠나고 나만 여기 남아요. 나만.

김현수 <거짓말>

           

‘따로 또 같이’의 가치
26편의 희곡들은 각각이 개성 있는 한 편의 작품들이지만 함께 모여 있음으로써 또 다른 의미들을 엮어낸다. 가만 보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각각 존재하지만 함께 살아가며 맺는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곤 하니까. 9명의 극작가들이 희곡을 써온 방식도 이와 같았다. 따로, 또 같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예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너와 나는 같다’는 공감, ’그래도 괜찮다’는 근거 없는, 그러나 따뜻한 힘이 되는 위로일지 모른다. 하나의 이름 아래 있다는 동질감과 안정감 같은 것 말이다. 각박해져가는 삶 속에서 함께 놀고, 배우고, 독려하는 창작집단 ‘독’ 작가들의 유대는 그래서 가치롭다. 9명의 극작가들이 앞으로도 창작집단 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계속 뛰놀지 기대가 된다.

 

펭귄 펭귄도, 사람도, 혹등고래도, 춥다, 춥다, 춥다. 도둑갈매기도, 삿갓조개도, 유령멍게도,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크릴새우도, 말미잘도, 불가사리도, 허무하다, 허무하다, 허무하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모든 영혼이 아름다운 조화 속에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리움 속에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영혼들은, 안 춥다, 안 춥다, 안 춥다. 저 달도, 별자리도, 이 지구도, 모두 먼지로 변하는 그날까지, 안 춥다, 안 춥다, 안 춥다.
암전  

조정일 <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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