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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웅

           

호랑이가 남기는 가죽과 사람이 남기는 이름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기는 ‘그것’을 자신 생애에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것. 호랑이는 당연히 제 가죽이 벗겨질 것을 모르고, 사람은 다른 이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부조리가 생겨난다. 마치 호랑이 가죽이 웬 산장에 걸쳐있거나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처럼, 사람의 이름은 단지 기억되지 않는 걸 넘어 제한되고 변형되기 일쑤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름은 불림으로써 성립한다. 심지어 직업이라는 자신의 행위가 명시된 일을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직업과 무관하게 세계적 석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니, 끝내는 그 명성이 실제에 영향을 주기에 이른다. 사람들의 호명에 따라 그는 현재 대학에서 독립적인 학문기관이라는 뜻의 ‘인스티튜트 프로페서’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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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과거를 기리는 방식에서 더욱 자명해진다. 미술가이면서 과학자·기술자·사상가·요리사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작가·철학자·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공국의 재상이었던 괴테를, 물리학과 수학·천문학·연금술·자연철학과 광학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경제학까지 섭렵한 뉴턴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르네상스형 인간' 같은 이름을 새로 만들어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분류의 기능인만큼 그의들 공식적인 명칭은 하나로 선택돼야 한다. 그리하여 다빈치는 화가가, 뉴턴은 수학자가, 플라톤은 철학자가 된다. 아무리 다른 분야에서의 노력과 업적이 훌륭할지라도, 심지어 당시의 실제 직업이 그것이 아니었더라도, 현재 그들은 화가와 수학자와 철학자로서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스파게티 개발자보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로서 더욱 의미를 부여하고, 세상의 질서가 미처 자리 잡히지 않을 때 철학은 모든 일들의 기본이 되면서 모든 종류의 스승인 플라톤을 철학자로 일컫게 한다.

역사 속의 특정한 일에 집중하는 현상을 보면서, 달리 말해 특정한 이름이 어떻게 불리는지만 놓고서도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수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유독 한 분야에 집중함으로써 소위 천재가 모이는 일, 시대마다 어떤 재능이 집중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시인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보들레르는 당대 미술계를 주름잡던 비평가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에는 글을 쓰는 작가들이 예술 전반에 대한 명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괴테와 마찬가지로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쉽게 진출하고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또 다른 예로는 현재 문화반 전에 통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대도시가 이제 막 탄생하며 건축가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20세기 후반 건축에서 시작된 것 말이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렘 쿨하스는 전시, 출판, 도시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를 부르는 이름은 어디까지나 ‘건축가’이며, 그 스스로도 ‘건축가’로서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alt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The Annunciation), 1472-1475

 

한편 일련의 호명들 중에서도 예술가의 경우는 유독 복잡하다. 예술이라는 분야 자체가 정의되지 못하는 만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이름을 합의하기란 좀처럼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냥꾼이었을 누군가가 인류 최초의 미술 동굴벽화를 그린 예술가로 불리기도 하고, 최고의 예술가로 불리던 바흐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은 금세 후원자의 주문에 작품을 찍어내는 사람들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뜩이나 예술의 범위 설정이 180도로 뒤바뀌는 현대에 이르러 누구를 예술가라고 부를지는 더욱 애매해진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나도 하겠다” 싶은 것들을 수행하는 이들을 예술가라고 부르고, 그들을 예술계 안에서 추앙하는 걸 볼 때 ‘예술가’라는 이름은 한없이 곤혹스러워지는 것이다. 앤디 워홀의 명언으로 둔갑하여 널리 퍼진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예술”이라는 말은 예술에 대한 대중적 불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예술’이라는 일이 ‘예술가’라는 직업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라는 이름 자체가 ‘예술’이라는 노동을 함축해버리는 경우를 일러준다. 새로움을 추구할 때부터 이미 새로운 게 아니게 되어버린 아방가르드 이후의 세대에서 예술가들의 상황은 분명히 이전 세대와 큰 차이를 보인다.

alt ⓒ김경수

 

‘예술가’라는 이름 자체가 가진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연기예술을 들 수 있다. 연기를 정말 못하는 배우는 ‘발연기’라는, 그래도 연기예술로 인정을 받고 시작하는 반면 현실에서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겉과 속이 다른 사기꾼으로 몰아세워지는 풍경을 말이다. 오늘날 예술가라는 알리바이가 필요한 예를 종종 보게 된다. 따라서 예술분야에서 중요한 문제는 일단 ‘사람들이 불러주는 것’이라는 이름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대신에 ‘스스로가 이름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송호준은 한동안 시민 과학자로 불리다가 돌연 예술가로 선언하고 전시를 하기 시작한다. 활동 내용은 모두가 동일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면서 예술가로 불리게 되고 예술을 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예술가라는 직업, 이름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여타 직업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노동을 보여주었다는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이름이 불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예술이라는 노동은 그 대가와 효과를 가시적으로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예술가’라는 이름이 갖는 기능이 뭐가 있을까. 얼마 전 예술인 복지법과 함께 예술가가 직업으로서 실질적인 수익을 눈앞에 두는 광경을 보는 듯했다. 이내 예술가를 어떻게 정의할 거냐는 문제에 맞부딪혔지만 말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모두의 난제일 테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예술가’라는 이름을 갖는 순간 모든 활동이 예술작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그 이름이 예술을 함축하는 의미인 만큼, 이름을 갖는 순간 앞으로의 활동과 이름은 변형되기는커녕 일방적인 예술활동이 되어 호명된다. 그렇기에 예술가에게 있어 이 호명이 중요하다. ‘예술가‘라는 이름은 누가 불러주기 전에 우선 스스로 먼저 부르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누구나 예술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예술을 할 수는 없기에 예술을 하는 주어를 소신껏 정의내리는 일이 제일 중요해진다. input image 


(김춘수의 시 <꽃>에서 제목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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