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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작가라고 불리는 게 이상하고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쑥스러웠던 것 같다. 내 작업을 봐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나는 나를 작가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그랬다. 유독 내켜하거나 유독 기꺼워하는 대신 다른 말을 하던 때와 똑같이 말했다. ‘할 수 있는 것 (재밌게) 하기’로 시작해서 ‘할 수 있는 것 (잘) 하기’를 하고,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은 만큼) 하기’로 마음을 먹은, 작가 김희천.

글. 김송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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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튼튼히.
“호연지기로 일상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찍으리라 했지만 도리어 그때마다 일상이 구원을 받았다.”

 

건축과에 다니는 중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학기 중에는 워낙 바쁜데 사진은 간단한 장비로도, 이동 중에도 할 수 있는 취미란 장점이 있었다. 굳이 사진을 찍고 모은 건 거기서 포착한 현상들이 가리키는 징후를 찾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귀던 친구가 종말론에 관심이 많아서 항상 “2012년 말에 세계는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 세계가 멸망하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로 했다. 멸망이나 종말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 같고 분명 이미 망해가는 징조가 곳곳에 존재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13년 캐논 미래작가상을 받고 전시를 하게 되면서 ‘내가 사진을 작업으로서 보여줘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막상 마야 문명이 경고한 2012년 12월 21일, 멸망의 날에는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해서.

영상 작업을 한 건 그 뒤다. 친구와 상봉동에 있는 공간 ‘반지하’에서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생겼다. 영화제의 이벤트인 ‘관객과의 대화’를 해 보고 싶었고 그러려면 영상이 있어야 되니까 만들었다. 그게 시작이다. 촬영한 영상과 엮어내는 요소는 지금의 서울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단 생각이 들어 사용한 것들이다. 3D 인터페이스도, 푸티지도 그렇다.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거다.
움짤을 파일로 저장하지는 않는다. 막상 저장하면 다신 안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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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데모험input image
빙고가 끝나고 나면 모든 대화는 휘발하고 빙고판에 적힌 단어들만 남게 됩니다. 그 후 취합된 빙고판 질문들의 기록은 어떻게 읽히게 될까요? 결국 작가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도 시험에 들게 하는 GV입니다.


‘데굴데굴 데모험’은 최근 ‘뉴 스킨’ 전시에서도 진행했다. 일종의 관객과의 대화다. 방식을 설명하자면, 우선 영상을 보면서 관객들이 빙고판에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가가 사용할 법한 단어를 생각해서 적는다. 그리고 그 단어를 듣기 위한 질문을 하는 거다. 관객과의 대화에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하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빙고 게임이 그걸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특정 단어를 말하게끔 하는 질문을 하고, 일부러 답을 피해 에둘러 대답을 하며 관객과 말 그대로 게임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막상 해 보니 게임을 하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많이 나왔고, 빙고 완성까지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첫 번째 우승자는 친한 친구였는데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고 빙고를 완성했다. ‘이를테면’, ‘말하자면’ 같은, 내 말버릇만으로. 그때 ‘음, 역시 잘못 만든 게임이구나’ 했다. 어떤 관객은 빙고판에 ‘로맨틱’을 적었다. 그분은 내가 ‘로맨틱’이라고 말할 것 같았을까? (‘로맨틱, 성공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어, 그럴 것 같다.


alt <바벨>

바벨
스크린처럼 납작해진 세계와 디폴트 3D 인체모델처럼 움직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 닿을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세상은 망할 것’이라며 겁을 주는 징조를 통해 이 세상이 이미 제대로 망해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애매하게 망한 껍데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상 작업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그 경계나 벌어진 사이 같은 걸 보여준다. 개인적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데이터로 남은 아버지의 흔적은 볼 수 있지만 실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장거리 연애를 한 애인과 헤어졌을 땐 일 년 반 가까이 온라인을 통해 이어진 만남이 ‘순수한 온라인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섞이고 합쳐져 있는 나라니까 그게 꽤 생경한 느낌이었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틈을 발견하고, 내가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질문하면서 작업이 이어졌다.

< 바벨 >이 아르헨티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라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를 쓰게 됐다. 내레이션을 입혀 보니 스페인어가 거리감을 잘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특유의 리듬이나 높낮이가 주는 재미도 있고. 영어처럼 쉽게 알아들을 순 없되 자막과 음성이 아예 따로 논다는 느낌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영어와 비슷하거나 자막과 매치해서 뜻을 추측할 수 있는 단어를 집어넣기도 했다. 스페인어는 앞으로 더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계속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alt <Soulseek / Pegging / Air-twerk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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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seek / Pegging / Air-twerking
우리 세대의 삶은 mp3와 같고, 세상은 가상을 열화 구현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상은 거세된 사람들에게 남은 비효율적인(인간적인) 요소들을 통해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2012년 군대를 전역하고 멀리 떠나고 싶어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다. 흔히 한국 반대편에 아르헨티나가 있다고들 하니까. 거기서 만난 친구들 중에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취미로든 뭐든 재밌는 것들을 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작은 갤러리가 많았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그 공간들이 만들어내는 일에 참여하는 경험을 했다. 돌아와서 ‘반지하’를 만나게 되면서 나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르헨티나에 가지 않았어도 언젠가 작업을 하긴 했을 것 같다. 아르헨티나에서의 경험이 이를테면 ‘반지하와 뭔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작업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작업은 평소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야기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던 순간을 말한 것이니까. 물론 출발점이나 스타트 방식이 달랐다면 과정과 결과도 지금과 달랐을 수 있다. 공간을 만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작업을 보여주지 못했을 수도 있고, 관객과의 대화를 목표로 하지 않으니 매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alt <랠리>

랠리
시선의 주체는 무슨, 우리는 시선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병신들인데.


커먼센터에서 개인전 ‘랠리’를 열었을 땐 전시가 이뤄지는 환경에 대해 고민했다. 창문을 떼고 공간을 다 비우는 것이 유치하고 뻔한 수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장치를 통해 사람들이 전시에 이입할 ‘틈’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시를 보러 가는 길, 작업이 놓여 있는 공간, 전시를 보는 환경,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했다. <랠리>에 주요하게 등장한 게 전면이 유리로 된 파사드다 보니 영상 속과 전시 공간을 연결지은 게 아니냐는 물음도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다.

alt <랠리> ⓒ이원섭

작업을 특수한 환경에서 또는 특수한 방식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도리어 특수한 것이 없는 공간에서 전시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차 이전처럼 성격을 타는 전시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획과 공간에서 작업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성적인 화이트큐브에서 전시를 할 땐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어떤 전략을 짜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요즘은 작업을 한다기보단 작업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도 두세 군데의 전시에 참여할 예정이다. 전시에서 보여드릴 것은 새로운 작업일 수도 있고 기존 작업일 수도 있다. 일부러 쥐어짜내는 편은 아니어서 무언가 됐을 때 알려드리려 생각 중이다. 10년, 20년 뒤의 계획도 마찬가지다. ‘작업을 하게 되면 열심히 하고, 안 하게 되면 그때 하고 있는 거 열심히 해야지’하고 있다.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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