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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아침 병원>, oil on canvas, 145.5x122.1cm, 2015



글. 이동연(문화평론가)


익명匿名은 사전적인 용어로는 자신의 본명을 숨기거나 그 대신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익명은 실명의 반대말이지만, 그것의 목적과 용법에 따라 가명, 필명, 닉네임 등으로 대체하여 사용할 수 있다. 가령 가명은 자신의 실명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이지만, 대체로 실명 이름의 일반 규칙을 따른다. 인터뷰를 할 때나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꺼릴 때 보통 가명을 사용하는데, 그 가명은 대체로 성과 이름을 달리하지만, 성과 이름의 순서와 세 글자는그대로 사용한다. 이동연이란 이름의 실명을 가명으로 바꿀 때는 통상 세 글자의 다른 이름으로 바꾼다.

그런데 필명은 가명과는 다르게 필자가 원하는 독특한 이름으로 구성된다. 소설가 이상은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알다시피 김해경이다. 그의 필명이 이상이 된 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최근에 한 국문학자는 이상이라는 이름은 친구가 선물로 준 ‘스케치 상자’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했다. 무협지 작가들은 거의 모두 필명을 사용하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무협지 작가인 ‘좌백’, ‘금강’도 모두 필명이다. 작가의 멋진 선택의 결과이다.

 

가수들 역시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아이돌 그룹의 멤버 이름들은 대체로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가명을 많이 쓴다. 가명을 쓰는 가수가 많은 것은 연예인들의 독특한 활동 스타일 때문이다. 가수들의 가명은 사실상 자신의 음악적 특성을 표현하기 위한 닉네임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소찬휘의 실명은 김경희이고, 서태지의 실명은 정현철이고, 태양의 본명은 동영배이다. 가수들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는 뭔가 자신의 존재를 쿨하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다. 이메일 주소, 게임 아이디, SNS 닉네임, 별명 등은 엄밀한 의미에서 익명의 유형으로 간주할 수는 없지만, 익명을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의 본능과 욕망을 내장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익명을 사용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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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병원>, oil on canvas, 155.5x122.1cm, 2015




익명을 사용하고 싶은 욕망은 크게 보아 세 가지 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익명은 자신의 실명을 숨기고 싶은 필요에 의해서 비롯된다.

 

가령 해리포터의 소설가 조앤 롤링은 <쿠쿠스 콜링>이란 추리소설을 쓸 때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판타지 소설가로서 유명해진 자신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익명은 때로는 실명의 존재를 지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가령 “익명을 요구한 한 정치인은”이라는어느 신문 기사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기를 거부하는 의도를 가진다. 가명이든 필명이든 어떤 이름의 교환도 원치 않는다. 이런 경우는 사실 실명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 경우로서 주로 내부고발, 양심선언의 행위에 사용된다. 익명의 요구는 신분의 노출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익명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드러내놓고 하지 못한 말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실명을 의무화하여 공론장에서 말의 공적인 책임을 지우려는 제도적인 규제에 반발하고 싶은 심리를 드러낸다. 익명은 폐쇄적인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실천적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은폐라기보다는 적극적인 표현의 다른 방법이다.

 

둘째로 익명은 실명을 부정하거나 부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형하려는 욕망을 가진다. 익명은 이름이 없음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의 호출을 소망한다. 익명의 선택은 존재의 부정이 아닌 존재의 문화적, 미적, 감각적 드러냄을 위한 과정일 수 있다. 가령 내 블로그의 이름은 트리스탄이다. 트리스탄은 내가 한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열성적으로 시청할 때, 2000년대 초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출신의 공격수였다.

 

당시 스페인 리그를 호령한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나 다보 수케르처럼 화려한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만년 하위 팀이었던 데포르티보를 일약 강팀의 반열로 올린 주인공이다. 트리스탄의 활약에 매료된 나는 곧바로 네이버 블로그의 닉네임을 트리스탄으로 선택했다. 트리스탄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렇듯 익명을 대신하는 닉네임과 같은 이름들은 대체로 개인의 문화적 취향을 은밀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프랑스 어느 지방의 와인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지을 것이고, 오페라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익명은 자신을 숨기기 위한 수동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취향을 은밀하게 드러내기 위해 능동적인 행위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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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 <병원>, oil on canvas, 162.2x112.1cm, 2015


마지막으로 익명은 온라인 디지털 정보문화의 시대에서 아주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정보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한다. 소위 익명의 상태에서 온라인 공간을 활보하고 다니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올리고 싶어 한다. 온라인은 편리하고 유용하지만, 언제 어디서든지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공간이다. 누가 나의 아이디를, 게시물을, 사적인 정보들을 훔쳐보고 분류할지 모른다. 더욱이 온라인에서의 실명은 이른바 신상털기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충돌한다.

 

사람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보호받으려 한다. ‘인터넷실명제’가 사적인 발언의 공적 책임을 위해 필요한 제도처럼 보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린 이유도 개인의 표현의 자유 때문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익명은 통제되고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익명은 자신을 보호하면서 역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 방법이다. 익명은 그런 점에서 방어적, 배타적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적극적, 포함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익명은 다양성의 문화, 자율성의 문화, 취향의 문화를 위한 개인의 즐거운 놀이다. 물론 익명의 문화가 현대 권력에 맞서고 집단 폭력을 피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익명에 그런 목적만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니 이미 정해진 자신의 이름, 얼마나 진부한가? 부모가 정해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새로운 이름을 만들려는 욕망은 익명의 원초적 본능이 아닐까? input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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