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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송요




1

글쓰기 세계에서 이름은 액체 상태다. 사람들은 익명으로 쓰거나 무기명으로 쓰거나 가명으로 쓰거나 필명으로 쓰거나 신분증에 적힌 것과 같은 이름으로 글을 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이름은 출렁거린다.

 

필명, 익명, 가명이라고 불리는 이름들을 구분해 보면 필명엔 본명이 아닌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해도 그 자체로 작가를 지시하는 고유명사라는 느낌이 있고, 익명이나 가명이라는 말엔 본래 그 사람을 부르던 이름이 따로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가져다 붙인 이름이라는 느낌이 있다. 대개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은 익명과 가명 쪽인데,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의 이름 앞에 이 두 단어가 붙는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원래의 이름으로 이름값을 벌어왔다는 뜻이고, 익명과 가명은 본명만큼 값을 쳐주지 않을 무명의 존재가 되기를 자처했다는 증거물로 남아 본명의 명성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느라 이름을 만든’ 것은 같은데 그 디테일은 제각각이다.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에 등장하는 작가들에게 부여되는 뉘앙스는 이런 것이다. “내가 부러워한 소설가들의 목록. 김해경, 줄리언 반스, 폴 오스터, 스티븐 킹, 로맹 가리…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다른 자아를 내세워 쓴 소설이 있다는 사실이다. (...) 내게 글을 쓴다는 건 애당초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던 셈이다.”  줄리언 반스는 댄 캐버나라는 이름으로, 폴 오스터는 폴 벤저민이라는 이름으로 추리소설을 썼고 김연수는 그 글들이 대단한 흥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쓰고 싶은 것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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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분류에 걸리는 것은 이를테면 이들이다. 맥카시즘의 시대 작품활동에 제동이 걸렸던 ‘할리우드 텐’ 중 하나인 트럼보는 친구 이안 멕켈란 헌터의 이름을 꿔다가 <로마의 휴일>을 썼고―<로마의 휴일>이란 시나리오의 제목은 이름의 주인인 헌터가 지었다―,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 발표 이후 탄압을 피해 조지프 앤턴이라는 이름으로 저작했다. 한편 브론테 자매는 ‘벨’이라는 가상의 성을 공유했는데 샬롯은 ‘커러’, 에밀리는 ‘엘리스’, 앤은 ‘액턴’이라는중성적 이름을 써서 자신들이 여자임을 가리되 가족임은 표현했다. 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19세기 중반 여성 작가가 ‘단지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믿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2

그러나 익명과 가명이 본명과 맺는 관계도 액체 상태다.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하는 듀나는 얼굴도 본명도 드러내지 않고, 보통은 그것들이 채우는 프로필 자리에 ‘듀나’란 이름과 토끼 사진 또는 그림을 게시한다. 사람들은 듀나라는 이름을 필명이라고 하기보다는 익명이라고 한다.

 

아마도 모습을 보여주지도 본래 누구인지 알리지도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이 단지 본명이 아니거나 본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본명이 대변하는 (지면 바깥의) 사람 자체를 뒤로하고 그 앞에 세우는 이름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일 테다. 한동안은 듀나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구태여 찾을 다른 정체란 없고 새로운 영화를 챙겨보고 수백 명의 여배우를 좋아하며 극장의 상영 상태를 점검하고 꾸준히 여러 종류의 글을 생산하는 것이 고스란히 그라고들 여기는 것 같다. SNS에 익숙해지면서 누군가를 온라인에서 쓴 글, 찍은 사진, 좋아하는 음악, 소설, 음식, 영화를 통해 아는 것이 오프라인에서 이름, 얼굴, 나이 정도를 아는 것보다 더 그 사람을 잘 아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된 탓일 수도 있고, 그저 익명을 쓰는 누군가의 신상에 집착하지 않을 정도로 익명을 대할 때의 감각이 심상해진 것일 수도 있지 싶다. 백사장 모래알 같은 익명의 세상에서 여전하고 꾸준하게 듀나의 익명성과 신상에 대해 떠보고 간 보며 정작 듀나의 작품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아 비판을 받은 문예지 <Axt>input image에 듀나가 보낸 간단명료한 이메일은, 익명이 이름값을 흥정하는 도구나 유명세를 슬쩍 가리는 마스커레이드의 가면으로 남는 대신 ‘안물안궁’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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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나무



‘제 고정독자 대부분은 제 익명성 따위엔 관심이 없어요. 그 사람들은 익명성 운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이미 신물이 나 있고 그걸 놀려대는 것도 지겨워하죠.’

 

반대로 익명을 쓰는 사람의 본명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해서 익명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1991년 발간된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 대해 얘기할 땐 저자인 구회영을 설명하려는 노력 대신에 구회영(김홍준)이라는 간편한 병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막상 김홍준 자신은 구회영이 별개의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영화계에서 활동하게 된 감독 김홍준과 그 이전 밤을 꼬박 새우며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필자 구회영은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잡지 <로드쇼>에 연재했던 ‘도시에’의 구회영, 김주현, 오윤평이라는 세 시네필은, 이 단어가 지금 조금쯤 놀림감일지라도, 제일 씩씩하고 열과 성을 다해 좋아한다는 데서, ‘설령 이 책에 거짓말과 틀린 정보가 있더라도 적어도 이 책을 쓴 저자의 태도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니까,input image정말이지 딱 그때 본명과는또 다른 이름으로 명명할 만했던 존재였다. 익명이면 익명인 것이지 익명의 곁에 본명을 그 정체로 둘 필요는 없다. 얼굴 없는 가수의 본명이나 얼굴이나나이를 우쭐하며 밝히는 것은, 한 시절 얘기로 지나갔다.




1) 비판받은 이 인터뷰에 대해 편집인들은 사과문을 게재했다.

2) 영화천국 편집부, “대담: 정성일, 구회영을 만나다”, 한국영상자료원, 2016.03.03. http://www.kmdb.or.kr/column/indi_column_view.asp?tbname=indi_column&seq=140(The Annunciation), 1472-1475




3

본명과 익명과 가명이 있기 전에 우선 이름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액체 상태다. 페소아의 이름 같은 것. 페르난두 페소아는 수많은 이름으로 글을 썼다. 페소아의 수많은 이름이 여전하게도 그러나 꾸준하게도 회자되는 까닭은 아마도 문장 그대로 그 수가 많음 때문이기도 할 테고 그가 창안한 독특한 개념 때문이기도 할 거다. 적으면 71개, 많으면 136개, 또 발견되면 136개보다 더 많이, 페소아는 이름을 만들었다. 각 이름마다 나이와 성별과 능숙한 언어와 신체적 특징과 살아온 배경 등을 다르게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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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이나 가명과는 구분되는 독창성이 돌출하는 지점은 바로 이름의 쓰임에 있다. 그가 만들어 낸 이름들은 쓴 글을 남들 앞에 내어놓는 과정에서 경유하는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글쓰기를 확장했다. 페소아는 고정된 자아로 쓴 글에 이름표만 바꾸거나 덧씌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다른 자아가 저를 저라고 밝힐 수 있는, 즉 제 이름으로 써 주기를 요청한 글에 그 자아의 이름을 달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페소아의 문장으로 된 글이다.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이 어떤 일인지 탐구함으로써 키운 것 또한 페소아 자신이다. 이것을 익명이라 할지 필명이라 할지 대체 무어라 부를지는, 내가 제안하거나 선언할 수 없다. 이미 그 다른 이름을 부르는 말이 선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페소아가 쓴 다른 이름은, 각별히 이명heteronym이라고 부른다. 익명이나 가명과 달리 아예 독립된 정체성을 명명하는 이름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명名자가 사람의 머릿수를 세는 단위기도 하다는 것은 이 순간 재미있다.




3-1

나는 낮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밤에는 나 자신이다.

 

내 영혼은 비밀스런 오케스트라다. 내 안에서 어떤 악기가 연주되고 울리는지, 현악기인지 하프인지 심벌즈인지 북인지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이 교향곡 같다는 것만 알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집착은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정체성에 관한 숙고가 느껴지는 이 문장들은 모두 페소아의 이명 실험이 만든 인물, 베르나르두 수아르스가 쓴 <불안의 서>input image에서 가져온 것이다. 페소아의 말에 따르면 그는 페소아와 유사하지만 본인에게서 ‘이성주의와 감정을 없앤’ 것과 같은 인물이며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젊다. 그런데 이 다른 이름의 남자 대신, 지금은 한국에서도, 영미권에서도, 포르투갈에서도 모두 저자명에 페르난두 페소아라고 쓴 <불안의 서>를 판다. 분명 페소아가 자신의 ‘개성 바깥에 존재하는 저자’더러 화자가 되게 했음에도, 아포리즘이든, 편지글이든, 희곡이든, 그 모든 글이 결국 페소아란 캡션을 달고 페소아의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로 모여든다는 점은 기묘하다. 그러나 그것을 아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쓴 사람은 페소아니까. 페소아가 사고하는 자아와 행동하는 주체를 쪼개어 글을 썼을 때 이름의 자리는 자아의 그것이 채워야 한다고 여겼다면, 후대의 편집인은 기명記名할 자리가 자아 아닌 주체의 몫이라고 여겼으리라 생각하면 그럴싸하다. 이름이 여기서 저기로 흐를 수만 있다면?




3) 페소아의 문장이 내가 쓸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명료해서 그냥 두 페이지 내내 페소아가 쓴 글만 가져다가 요리조리 붙이고 글쓴이 이름을 페소아의 음차로다가 배수아라고 적어서 기고해 볼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불안의 서>의 역자인 배수아 작가를 사칭하는 것처럼 될까봐 단념하였다. 하필이면 베르나르두 수아르스의 준말도 꼭 배수아 같아서 배수아 외의 한글 이름은 떠올리려야 떠올릴 수가 없는데… 그러고 보니 익명/가명의 꼬리에는 종종 사칭이라는 의혹이 달라붙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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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숙



4

종종은 본명 대신 만든 새 이름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설령 그러려는 의도가 없었을 경우에도. 애초에 본명이 아닌 이름을 댄다고 그걸 가짜 이름이라고 할 곳은 신분증에 박제된 고체 이름을 사용하는 행정문서의 세계이지, 거짓말로 참말도 하고 그러는 글쓰기 세계는 아니니까. 새로운/다른 이름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자아를 가리킨다. 누가 지어준 본명보다야 내가 붙여둔 새 이름이 더 찰싹, 흘러내리지 않고 자아에 잘 붙을 수도 있다. input image




참고문헌

1. 슈테판 볼만 지음, 우영미 옮김, 『여자와 책』 RHK, 2015.

2.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불안의 서』 봄날의 책, 2014.

3.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페소아와 페소아들』 워크룸프레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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