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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윤지



1
누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분리장벽 양쪽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 커다란 인물 사진을 두 장씩 나란히 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아트 갤러리에서 이루어진 익명의 불법 예술 전시회였다. 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사진들을 붙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을 붙이던 사람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사진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두 사람의 택시 운전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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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은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거리에서 활동하는 프랑스의 예술가다. 그의 작업은 간단하다. 사람들을 찍고 그 사진을 거리에 붙이는 것이다. 작업은 불법적으로, 게릴라처럼 이루어진다. 2005년 프랑스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JR은 28mm 카메라를 가지고 그곳에 찾아가 직접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는 부촌에 붙였다.

 

언론이 집단으로 왜곡한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한 사람의 생경한 모습을 건져 올린 것이다. 이 단순한 작업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왜 여기에 사람들의 사진이 붙었는가. 왜 이 사진을 붙이는 사람은 익명을 택하는가.

 

1년 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을 보기 위해 그곳으로 떠난 JR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기 시작했다. 거리의 아무하고나 이야기를 나눴다. 택시 운전사, 변호사, 요리사, 뮤지션, 미용사, 선생, 배우 등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직업의 진짜 표정을 보여달라고 했고 얼굴 가까이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들은 상대 국가의 인물과 함께 사진이 붙여지는 것에 동의했다. 심지어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까지도. 그렇게 프로젝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함께 그들을 억압하던 편견을 깨부수려 했다.

 

편견이 가져왔던 억압 아래의 그들은 서로의 곁에서 이름 없는 누군가가 되었다. 그가 벌인 프로젝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미술관에서 벌어지던 예술 감상이 천재적인 개인에 의해서 창조된 작품을 통해 감상자에게 감동을 주는 방식이었다면, JR에게 예술이란 작품을 매개로 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사진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사람의 곁에 있게 된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세우고 분리장벽에 붙은 얼굴을 마주한다. 그 시간 동안 숨겨진 국가, 언제인가의 시간, 이름 모를 누군가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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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40년의 세월, 스무 살에 시작하여 예순 살이 넘어 완성된 로맹 가리의 작품 <가면의 생>의 한 구절이다. <가면의 생>을 통해 로맹 가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물음을 던진다. 익명의 사회 안에서, 익명의 공간 속에서, 익명의 삶을 추구하는 ‘나’는 아무도 아니면서 모두인 존재를 꿈꾼다. 인간 존재가 소속된 종과 속의 법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두 번 수상하였지만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정체를 죽을 때까지 숨겼던 그는 스스로의 삶 또한 온전히 소유할 수 없음을 <내 삶의 의미>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난 내가 삶을 산 거라는 확신이 그다지 서지 않는군요. 오히려 삶이 우리를 갖고 소유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았다는 느낌이 들면 우리는 마치 스스로 삶을 선택이라도 한 것처럼 자기 삶인 양 기억하곤 하지요. 개인적으로 나는 살면서 선택권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사적이며 일상적인 의미의 역사가 나를 이끌었고, 어떤 면에서는 나를 속여 넘겼지요.”

 

작품 속 에밀 아자르는 외친다. “유일하고 독특한 존재란 말이에요! 나는 내 작품의 아들이자 아비이기도 해요! 나는 나 자신의 아들이자 아비란 말이에요!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것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의 저자이며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나는 진짜예요!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위장이 아니에요! 나는 고통받는 인간이에요. 더더욱 고통받기 위하여, 내 책에, 세상에, 인류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인간이라고요! 내 작품에 관한 한 나로서는 감정도, 가족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작품뿐이에요!” 그는 정말이지 익명으로 남고 싶을 뿐이다.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 로맹 가리에게 익명이란 삶에 의해 살아지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로맹 가리가 유언처럼 남긴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글에서 말한 것처럼.“그것은 새로운 탄생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했다. 나는 이제 모든 기회를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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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려한 뉴욕 도시 이면의 빈민가에서 젊은 흑인들의 힙합문화가 회화적 형식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 그라피티다. 한밤중에 몸을 숨기고 행해졌던 낙서들이 지금은 키스 해링, 장 미셸 바스키아 등을 위시하여 현대 미술의 중요한 한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그라피티가 범법으로 규정된 영국에 얼굴 없는 작가, 뱅크시가 있다. 거리의 화가, 얼굴 없는 예술가, 게릴라 아티스트,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사람. 그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뱅크시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순찰 중인 경찰의 눈을 피해 스탠실로 재빠르게 작업하고 사라진다. 그는 스스로의 작업을 반달리즘으로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나는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는 자유, 평화, 정의 같은 것들을 적어도 익명으로 부르짖을 정도의 배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하며 직접적인데, 일상의 일부였던 거리에서 하루아침에 서로 열렬하게 키스하고 있는 두 경찰의 모습을 마주쳤을 때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스티브 잡스가 무언가를 훔쳐서 달아나게 하고, 한 여성을 쇼핑카트와 함께 추락시키며, 무장한 채 무언가를 투척하려는 남자의 손에 수류탄 대신 꽃 한 다발을 쥐여 주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에게 방탄복을 입힌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것이 그려진 거리를 적극적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새로운 소통과 참여를 꾀한다. 그렇게 뱅크시는 발견된 공간과 시간을 제작된 공간과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예술적인 경험의 경계에서 새로운 탐험을 하는 셈이다. 그 경계에서 교환되는 담론은 다양할 터이지만, 익명성을 통해 예술의 경계가 흐트러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뱅크시는 영국 대영박물관 고대 전시실에 원시인이 쇼핑 카트를 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자신의 작품을 8일 동안 도둑 전시한 바 있다.

위법적인 면이 다분한 그의 행위는 익명성을 활용해 예술의 엘리트주의와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비록 그의 작품이 벽에서 뜯어져 무단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뱅크시는 거리의 예술가이며 그라피티는 거리의 소유물이다




4

카프카의 소설, <성>을 읽고 나는 포착할 수 없는 낯선 세계에 선 낯선 인간의 피로감에 휩싸였으며 서글프게도 익명의 권력 아래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성>에는 주인공 K에 대한 묘사가 없다. K의 과거, 성격, 외모까지도 소설은 밝히지 않는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그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성으로부터 비롯된 알 수 없는 관료제도에 의해 지배받는 마을에서 K가 토지측량사로서 마땅히 가졌어야 할 권한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K의 토지측량사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과 관리로부터 거부당하는 실패를 연속해서 보여준다. 다양한 인물을 만나 다양한 기회를 만나는 듯하지만 그의 노력은 늘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야기는 나선을 그리며 돈다. 그 중심에 선 K, 그를 둘러싼 관료사회의 공포가 스멀거리며 흘러나온다. K는 마을에 도착한 다음 날 스스로에게 주어진 권리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성을 향해 전진한다.

 

“그렇게 그는 다시 걸어 나아갔지만 길이 아주 멀었다. 이 마을의 중심 도로인 그 길은 성이 있는 산으로 뻗어 있지 않았다. 산에 가까이 다가가긴 했지만길은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옆으로 휘었으며, 성에서 멀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K의 현실을 구성하는 장소, 역사, 신체, 가족이 모두 제거된 상황은 익명성이 주는 해방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그는 삶을 집어 던진 상황에서 기성의 관념에 틈입하려 했다. 묵살된 과거와 경시된 현재에서 K의 미래에는 성이라는 기성의 관념만이 기억된다. 여태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왔던 익명성은 시간과 공간을 분할하던 기성의 관념을 뒤흔들어야 한다. 하지만 익명의 권력이 지배하는 익명의 집단 안에서 K는 아무 존재도 될 수 없다. “당신은 성에서 온 사람도 아니고 마을 사람도 아니지요.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K라는 불완전한 형태의 인물로부터, 미완성이라는 작품의 형식으로부터 그의 경험은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현실로서 권력의 세계 속에서 무기력한 개인이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게 되었다. 익명의 속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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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우데자네이루와 나이로비의 이 눈들은 우리를 향한다. JR은 언덕 전체를 사진으로 메웠고 이 커다란 프로젝트의 전경을 헬리콥터를 가진 미디어가 비출 수 있었다. 브라질 최초의 난민가에서 세 명의 아이들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군에 의해 수감되었고 결국 다른 빈민가에 넘겨져서 토막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JR은 접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다. 여행사도 NGO단체도 없는 곳에서 JR은 그 아이들의 엄마와 할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진들은 그녀들의 것이다. JR은 언덕 전체를 그녀들의 눈으로 뒤덮었다. 미디어는 익명의 여성들을 주목했다. 여성들의 눈은 소리 없이 미디어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JR은 말했다. “미디어와 익명의 여성 사이에 다리를 만든 셈이죠.”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장소를 찾아다니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최초의 희생자가 되는 여성들을 주목했고 이들의 이름 없음으로부터 어떤 가치를 발견했다.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창의성에는 진정한 자아가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표정과 함께, 로맹 가리가 꿈꾸는 주체성 파괴로부터의 혁명과 함께, 익명의 K가 주는 낯선 기대와 함께, 뱅크시가 익명으로 부르짖는 자유, 익명성의 자유를 통해 새로운 인식이 출현하고 이들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바뀐다. 이들은 소수의 목소리이다. 권력의 고발이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두이다. 에밀 아자르가 말했듯이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거예요.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찬란하게 존재하는 거죠.”

익명의 눈들이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들은 그들의 눈을 바라본다. 그곳에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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