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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캠퍼스를 걸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그날은 제자가 된다는 학생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학교는 그대로였다. 식당도, 교정도, 건물도. 그사이 나는 학생에서 교수로 훌쩍 자랐다. 내가 걸었던 학교에서 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후배들을 내가 가르친다는 것. 기대했던 순간보다 훨씬 일찍 다가온 기회에 막연한 두려움이 들었다. 나는 어떤 교수가 될 것인가. 기억 속의 나의 스승이 떠올랐다. 최상호 교수님께 레슨을 받던 어느 날, 방에 찾아온 손님에게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저놈이 홍혜란이라는 놈인데, 잘 봐두세요. 나중에 뭐가 돼도 될 놈이니까.” 특별한 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그 말을 유학 내내 잊을 수 없었다. ‘우리 선생님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내가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나 또한 그런 교수가 되고자 한다. 나의 스승이 그랬듯, 자신의 제자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주는 스승.

글. 최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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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꿈도 아닌 내가 선택한 노래이기 때문에

아홉 살부터 본격적으로 성악을 시작했다. 음악시간에 앞에 나가서 노래했고, 대전 극동방송에서 어린이 찬양 프로그램을 2년 정도 진행하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도 노래를 평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친구 어머니께서 성악을 하셔서 자연스럽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은 굉장히 반대하셨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합창단 활동을 못 하게 하신 적이 있었다. 그래도 수업이 끝나면 무작정 연습 장소에 갔다. 2층에서 연습을 하고 있으면 끝날 때까지 1층에서 그 연습을 들으며 기다렸다. 부모님은 대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유학을 갔을 때도 항상 말씀하셨다. “그만 해도 돼. 언제든 힘들면 그냥 돌아와.”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노래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내 인생을 얼마나 바쳐서 하고 있는지. 어느 누구 하나 나에게 노래를 잘하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정을 가질 수 있었고 더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며 노래에 매달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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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예술가다

처음 미국 줄리어드 음대 시간표를 봤을 때는 해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침 9시부터 아카데미 수업이 시작해서 오후 4시가 되어야 본격적인 오페라 클래스나 코칭 수업을 진행하는, 미국인 친구들도 힘들어 포기하는 시간표. 점심시간은 물론 5분의 쉬는 시간도 꿈꿀 수 없는 빡빡한 일주일의 스케줄. 그전까지 노래하는 사람은 8시간 이상의 수면과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소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이 스케줄은 내 능력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학기가 지나고 나니 모든 스케줄을 소화하고 잠을 줄여도 노래를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나는 할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 내 앞에서 바빠서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가진 능력에 제한을 두지 말자. 지금 수업만으로 힘들다고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다른 친구들이나 다른 학교와의 경험도 쌓고, 다양한 나라의 언어도 배워라. 우리에겐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더 많이, 더 바쁘게 움직일 수 있는 음악가, 그리고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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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201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하고 커리어를 시작하던 시기의 첫 콩쿠르였고 우승할 것이란 생각도 못 했다. 뿌듯했다. 내가 했던 노력이 이만큼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보다 좋은 조건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면 좋은 여건이 보장되었겠지만 겁이 났다. 내가 생각하는 오페라 가수란 무엇인가. 음악가로서의 삶은 무엇인가.

나는 한국행 대신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선택했다. 그 무대에서 대가들의 평범한 삶을 보았다. 바리톤의 대가 브린 터펠을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허름한 차림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유명한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는 늘 남편과 아이와 함께 연습을 다녔다. 언젠가 연습실 문을 열었는데 거기서 수유를 하고 있는 그녀를 봤다. 그들을 보면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나 가수야’라는 멋진 척이 아닌 진짜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 좋은 음악이란 그 보통의 삶들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나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5년이란 시간 동안 나의 커리어는 주역이 아니었지만 많은 오페라 가수와 좋은 지휘자들에게서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배운 감사한 시간이었다.


alt <사랑의 묘약> 중 아디나와 벨꼬레   ⓒ세종문화회관 서울시오페라단


나는 소프라노다
왜소한 체구의 소프라노는 과거에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모습은 소프라노의 모습이 아니다. 넌 살쪄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들었던 때 내가 왠지 부족한 소프라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대 위에서도 부족한 소프라노가 되어 있는 나를 보게 됐다. 예술가가 받는 비평은 기준이 항상 같진 않다. 아티스트의 눈을 그것에 돌린다면 휩쓸릴 수밖에 없다. 유학을 처음 갔을 때 나를 딸처럼 봐주시는 선생님이 해준 말이 있었다. “착한 애가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사람이 너를 예뻐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 그 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주활동을 시작하고 나서 내가 얼마나 타인에게 맞추려고 했던가를 생각하게 됐다.

이제 나는 무대에서 ‘사람들이 나를 소프라노로 볼까’보다 ‘오늘은 사람들이 어떤 눈으로 나를 바라볼까’를 먼저 생각한다. 더 이상 전형적인 소프라노에 나를 끼워 맞추지 않는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소프라노니까. 그래도 난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alt <사랑의 묘약> 중 네모리노와 아디나   ⓒ세종문화회관 서울시오페라단



아디나로 돌아오고 싶었다

내게 한국의 오페라는 특별하다. 외국의 오페라 프로덕션은 동료들과 사적인 교감을 나누지 않지만 한국의 오페라 프로덕션은 작품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나눈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는 추억이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사랑의 묘약>에서 아디나 역을 맡았다. 한예종 음악원의 오페라 커리큘럼에는 ‘오페라 캠프’가 있는데 2주 동안 숙식을 같이하고 함께 살면서 오페라 연습을 하는 것이다. 잘해보겠다고 선배들이고 동기들이고 모두 함께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기억은 유학 내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당시 총장님이자 현재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으로 계시는 이건용 총장님께서 <사랑의 묘약> 아디나 역을 제안하셨을 때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번 <사랑의 묘약> 프로덕션은 특히나 배우들과의 대화가 많았다. 사전에 배우들과 나눈 교감은 특별한 노력이 없어도 무대 위의 ‘케미’를 형성한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오페라 프로덕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너지다.

‘홍혜란’은 책임감의 이름이다

현재 서울시 오페라단을 이끄는 이건용 단장님께서 매번 만날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다. “학생들, 사랑해주세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학생들이 있고, 내 맘 같지 않게 나를 힘들게 하는 학생들도 있고, 잘 안 따라오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 학생들을 사랑해주는 것만이 답이라고 이어 말씀하신다. 이건용 단장님의 실제 모습에서도 항상 느껴진다. 오페라 가수들이나 같이 일하는 분들을 신경 쓰고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학생들을 대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사랑의 묘약> 공연이 끝나고 “선생님이 롤모델이에요. 전 선생님 같이 되고 싶어요”라는 얘기를 들었다. 제자들의 눈에서도 ‘선생님처럼 하고 싶어요.’라는 애정이 보인다. 예전 같으면 그게 부담으로 다가왔을 텐데 이제는 책임감이라는 힘이 된다. 나 또한 자신 없을 때도 있고,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굉장히 감사하다. ‘저 친구가 나를 보고 따라오고 있구나’ 그 눈빛을 위해서라도 나는 ‘홍혜란 소프라노’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오늘도 노래하고 있다.  input image

*이 글은 인터뷰를 토대로 각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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